전쟁이 가장 먼저 때린 현장···하청 직원부터 택배기사까지 ‘청구서’ 떠안은 사람들

이재덕 기자 2026. 4. 5. 0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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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추, 버섯 등 농촌에서 생산한 식재료들이 택배 상자에 담겨 있다. 전북 순창 구준회씨 제공

[주간경향] 이른 아침 서울의 한 아파트 대문 앞에 놓인 택배 상자에는 두부 한 모와 달걀, 감자, 채소가 들어 있다. 스마트폰을 몇 번 터치해 결제한 식재료 가격은 미국의 대이란 전쟁 직전인 한 달 전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러나 이 식재료가 우리의 식탁에 오르기까지, 보이지 않는 공급망 곳곳에서는 이미 누군가 ‘전쟁의 청구서’를 맨몸으로 떠안고 있다. 전남 여수 산단의 노동자부터 경남 진주의 비닐하우스 농민, 충남 아산의 두부공장 대표, 서울 노원구의 택배노동자까지. 전쟁이 가장 먼저 때린 현장의 목소리를 차례로 담았다.

사내하청은 월급 줄고, 중기는 자금줄 걱정

전남 여수에는 대기업 석유화학업체가 몰려 있다. 이들은 원유를 정제해 만든 나프타(납사)를 국내 정유사를 통해 구하거나 중동에서 직수입한다. 석화업체들은 이 나프타를 고온에서 열분해해 에틸렌, 프로필렌 등을 생산한다. 에틸렌은 폴리에틸렌(PE)과 폴리염화비닐(PVC), 프로필렌은 폴리프로필렌(PP) 등의 원료다. 비닐과 플라스틱을 만들기 위한 주요 재료다.

호르무즈 해협 봉쇄 장기화로 나프타 수급난이 심각해지자 석유화학업체들의 공장이 멈춰섰다. LG화학은 여수 산단 내 2공장 가동을 중단했다. 석화업체들은 4~5년마다 생산을 멈추고 대정비(TA·Turn Around) 기간에 들어가는데, 롯데케미칼은 당초 4월 18일부터 5주간 진행할 계획이었던 대정비를 지난 3월 27일에 조기 시작했다. 정비 기간도 8주로 늘렸다. 롯데케미칼 관계자는 “나프타 재고가 한 달치밖에 남지 않아 내린 전략적 판단”이라고 말했다.

지난 3월 26일 전남 여수 국가산업단지 모습. 연합뉴스

롯데케미칼 원청과 사내하청 노동자들은 각각 4조 2교대, 4조 3교대 방식으로 24시간 가동하는 공장에 노동시간을 맞췄는데, 정비 기간 동안은 일근 형태로 전환됐다. 여기서 노동자들의 희비가 엇갈렸다. 원청 직원들은 공장 정비와 관리 감독, 설비 업그레이드 업무에 투입되면서 야근과 주말 근무에 들어갔다. 롯데케미칼 원청 노조 관계자는 “야근·주말 수당을 받기 때문에 급여에는 큰 타격이 없다”고 말했다.

반면 포장과 하역을 맡던 사내하청 노동자들은 일이 줄면서 곧바로 생계 위협에 직면했다. 사내하청 노동자 A씨는 “기본급이 낮아서 각종 수당이 붙어야 그나마 생활이 되는데, 대정비 기간에는 청소 같은 일만 한다. 야근도 없다”며 “수당이 빠지면 월급이 기본급과 상여금을 더한다고 해도 세금 떼고 260만원 남짓”이라고 말했다. 그는 “전쟁이 더 길어져 LG화학처럼 공장 하나가 문을 닫거나, 구조조정을 해야 한다며 우리를 먼저 해고하지 않을까 두렵다”며 “그러면 말 그대로 길거리에 나앉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된다”고 했다.

여수에서 생산되는 에틸렌·프로필렌 물량이 줄자 충격은 곧바로 이를 원료로 멀칭용 비닐(잡초가 자라지 않게 밭에 덮는 비닐), 비닐하우스용 비닐 등을 생산하는 중소업체로 번졌다. 경기도의 한 비닐업체 관계자는 “당장 원룟값이 올랐다. 더 큰 문제는 가격보다 원료 확보 자체가 어려워진다는 점”이라며 “석화업체들로부터 받는 여러 품목 가운데 한두개씩은 언제부터 공급이 끊긴다는 통보를 받고 있다”고 말했다.

여수 산단의 대기업들은 공장 가동을 멈추거나 대정비에 들어가더라도 재고 판매, 보유 현금 활용, 운전자본 조정, 단기 차입 등을 통해 현금 흐름을 버틸 여력이 있다. 그러나 중소기업 가운데는 이런 충격을 흡수할 최소한의 완충장치조차 갖추지 못한 곳이 적지 않다.

지난 3월 11일 인천 강화군 교동도에서 농민들이 밭에 멀칭용 비닐을 덮으며 농사 준비를 하고 있다. 연합뉴스
4~5월 이후 농사 어쩌나, 포장용기도 없어

여수에서 시작된 ‘원료 절벽’의 공포는 비닐을 공급받는 전국의 농촌 현장으로 들불처럼 번졌다. 그나마 농가에는 당장 가격 폭탄을 막아주는 방어막이 있다. 비닐이나 비료처럼 많이 쓰이는 농자재는 통상 ‘농협 계통구매’ 방식으로 조달되기 때문이다. 매녈 말 지역 단위농협들이 파악한 필요 수량을 바탕으로 농협중앙회가 업체들과 이듬해 적용될 구매 단가를 사전 계약하는 구조다.

이 시스템이 일종의 완충 장치 역할을 한 덕분에, 아직은 여수 산단의 원료 가격 상승분이 농가의 구매 단가에 직격타를 날리지는 않았다. 농가들은 농협중앙회와 업체가 사전 계약한 단가로 필요할 때마다 지역농협 농자재센터에서 구매하거나 대리점에 주문한다. 대부분 미리 재고를 쌓아두는 것이 아니라 주문이 들어가면 공장에서 그때그때 만들어 농가로 직배송하는 방식이다.

그러나 현장의 불안감은 턱밑까지 차올랐다. 원재료 수급난이 길어지면 결국 계통구매 단가 재협상과 가격 인상은 불가피하기 때문이다. ‘조만간 둑이 무너질 것’이라는 공포는 농자재 선구매 조짐으로 나타나고 있다. 경남 진주에서 딸기를 재배하는 농민 B씨는 평상시라면 가을에 구매했을 비닐하우스용 비닐을 반년이나 앞당겨 지난 3월 28일 주문했다. 그는 “비닐을 취급하는 지역 총판 대리점에서 이후에는 가격이 20% 이상 뛸 것이 확실하다고 했다. 가을에는 돈을 줘도 구하기 쉽지 않을 것이라는 말까지 나온다”며 “일단 주문은 했지만, 받을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고 말했다.

충남의 한 지역농협 농자재센터 직원 C씨는 “어제(3월 29일) 하루에만 300명 가까운 농민이 다녀갔다”며 현장 분위기를 전했다. 그는 “비닐이며 요소비료, 농약값이 다 오른다고 하니 어떻게든 미리 사두려는 것”이라며 “농사에는 ‘때’가 있다. 제때 멀칭 비닐을 씌우고 모종을 심지 못하면 한 해 농사를 통째로 망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이어 “지금 당장은 물량이 들어오고 있지만, 4~5월 이후 가격과 수급이 어떻게 요동칠지가 진짜 문제”라고 우려했다. 이에 대해 농협중앙회 관계자는 기자와의 통화에서 “지역농협 등을 통해 파악한 결과 아직 비닐이나 요소비료 등의 수급에는 이상이 없다. 현재로선 계통구매 단가 인상 계획도 없다”고 선을 그었다.

지난 3월 27일 경기도 광주시 한 플라스틱 제조업체에서 포장 용기가 생산되고 있다. 연합뉴스

충남 아산의 한 두부공장은 지역 농민들이 농사지은 콩을 수매해 두부로 가공한다. 이곳은 플라스틱 포장재 비상이 걸렸다. 두부공장 대표 D씨는 “당장 4월 1일부터 포장재 가격이 15%나 뛰었다”며 “수급 차질이 우려돼 추가 주문을 넣었더니, 포장재 공장 측에서 아예 주문을 거절했다”고 토로했다. 그는 “1주에 두부가 1만 모씩 나가는데, 딱 3주치 물량인 포장재 3만개만 제한적으로 공급하겠다는 거다. 원단 확보가 힘드니 앞으로는 물량을 더 줄이거나 아예 공급을 중단할 수도 있다는 통보를 받았다”고 말했다. 콩은 창고에 쌓여 있지만, 정작 두부를 담을 ‘플라스틱 용기’가 없어 공장 가동을 멈춰야 할 판이다. 포장재 대란으로 이 두부공장이 휴업에 들어가면, 당장 지역 농민들이 기른 콩을 수매해줄 곳이 사라지게 된다.

양상추와 감자 등을 포장해 유통하는 충남의 또 다른 업체는 최근 포장재 공장으로부터 결제 조건으로 선급금을 요구받았다. 업체 대표 E씨는 “포장용 비닐 단가가 장당 100원에서 130원으로 뛰었는데, 주문과 동시에 대금의 30%를 먼저 입금하라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선급금을 주지 않으면 아예 물건 공급이 어렵다고 통보받았다”며 “공급 대비 수요가 상대적으로 너무 많다 보니 벌어지는 현상”이라고 말했다.

서울 종로구에서 배달노동자들이 일을 하고 있다. 한수빈 기자
유류비 폭탄은 온전히 기사 몫

두부, 감자, 채소 등이 소비자에게 가려면 한 단계가 더 남았다. 물류회사의 트럭에 실려 서울로 가야 한다. 1톤(t) 탑차를 모는 CJ대한통운 택배노동자 F씨는 매일 길 위에서 전쟁의 여파를 실감한다. 그의 집은 서울 노원구 월계동, 배송 구역은 인근의 하계동이다. 하지만 매일 35㎞ 떨어진 경기 포천의 CJ대한통운 서브(Sub)터미널로 가서 그곳에서 택배 물건을 싣고, 다시 36㎞를 되돌아와 하계동 집마다 배달한다. 일주일이면 어김없이 F씨의 탑차에 주유 경고등이 켜지고, 그때마다 50ℓ씩 연료를 가득 채워야 한다.

전쟁 직전 8만원(ℓ당 1600원대)이던 주유비는 지난 3월 중순 9만~9만1000원(ℓ당 1820원대)으로 뛰더니, 4월 2일에는 약 9만6000원(ℓ당 1910원대)이 됐다. “기름값이 무섭게 오른다”는 그의 말은 엄살이 아니다. 정부의 2차 최고가격제(경유는 ℓ당 1923원)로 가격이 묶이지 않았다면 부담은 더 컸을 것이다. F씨는 “충북 옥천이나 대전 등 CJ대한통운의 허브(Hub)터미널까지 장거리를 이동하는 기사들의 기름값 부담은 더 어마어마할 것”이라고 말했다.

F씨는 원청(CJ대한통운)과 하청업체 지시를 받지만, 법제도상으로는 개인사업자 성격의 ‘특수형태근로종사자’로 분류된다. 원청이 지급한 배달료에서 하청업체가 10%의 수수료를 떼고 남은 금액이 그의 몫이 된다. F씨는 “수수료율을 10%에서 9%로 조금이라도 낮춰주거나, 원청이 유류비를 보전해주거나, 20년간 동결된 택배비를 인상하는 식의 분담을 원하지만 그런 논의는 전혀 이뤄지지 않는다”고 했다.

그렇게 식료품이 담긴 택배가 서울의 가정집에 도착해 식탁에 오른다. 두부와 감자, 채소 가격은 아직 그대로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 곳에서는 이미 누군가의 월급이 줄었고, 누군가는 다가올 농사를 걱정하거나 공장 가동 중단을 고민하고 있다. 이란 전쟁 한 달. 먼 곳에서 발송된 전쟁의 청구서가 본격적으로 도착하기 시작했다. 언제나 그랬듯, 청구서는 가장 약한 곳부터 들이닥친다.

이재덕 기자 duk@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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