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실명제·사채동결 때 썼던 긴급재정경제명령이란?…“수급 불안에 선제 대응”[경제뭔데]
경향신문 경제부 기자들이 쓰는 [경제뭔데] 코너입니다. 한 주간 일어난 경제 관련 뉴스를 쉽고 재미있게 풀어서 전해드립니다.
이재명 대통령이 중동 전쟁발 에너지 수급 위기에 대응해 ‘긴급재정경제명령’ 발동 가능성을 언급하면서 정부 물가 대응 수단의 ‘최대치’가 어디까지일지 관심이 쏠립니다. 다만 엄격한 발동 요건과 국회 승인 절차를 고려하면 실제 활용 가능성을 두고는 신중론도 적지 않습니다.
이 대통령은 지난달 31일 국무회의에서 중동 전쟁으로 인한 에너지 수급 위기와 관련해 “긴급할 경우 헌법이 정한 긴급재정경제명령을 활용할 수도 있다”고 말했습니다. 정유사의 유류 공급가를 통제하는 ‘석유 최고가격제’를 30년 만에 부활한 데 이어 ‘더 센’ 조치를 할 수도 있다고 시사한 것인데요. 긴급재정경제명령이란 무엇이고 어떤 조건에서 활용할 수 있을까요.

긴급재정경제명령은 헌법상 대통령 고유 권한입니다. 헌법은 비상시 대통령 명령에 법률적 효력을 부여합니다. 다만 성립 요건이 엄격합니다.
먼저 내우·외환·천재지변 또는 중대한 재정·경제상 위기가 있어야 하고, 국회의 집회를 기다릴 여유가 없어야 합니다. 대통령의 권한은 ‘최소한으로’ 행사해야 합니다. 기본권 침해를 막기 위해서입니다. 사후 규제 절차도 있습니다. 대통령은 명령 후 지체 없이 국회에 보고하고 국회의 승인을 받아야 합니다. 만약 국회의 승인을 얻지 못하면 명령은 무효가 됩니다.
과거에 긴급재정경제명령을 발동한 사례를 들여다보면, 대통령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어떨 때 쓸 수 있는 조치인지 이해하기 쉽습니다.
과거 긴급명령, 발표 다음날 전격 시행, 극도 보안 지킨 두 사례
가장 최근 사례는 1993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1993년 8월 12일 밤 7시45분 김영삼 대통령은 긴급재정경제명령을 동원해 금융실명제 전격 도입을 발표했습니다. 이날 금융실명제 발표 사실을 미리 알고 있던 정부인사는 대통령과 비서실장, 경제수석 등 극소수였다고 합니다. 당시 차명통장이 비자금, 탈세 경로 등으로 이용됐습니다. 전체 계좌의 10%가 차명계좌로 추산되기도 했습니다. 비실명 통장의 자금 인출을 바로 다음날인 13일부터 단박에 막아 버린 겁니다. ‘검은돈’ 차단이 목적이었죠.
금융실명제 직전에 단행된 ‘긴급명령’은 박정희 전 대통령 시절인 1972년입니다. 박 전 대통령은 8월 3일 자정 직전에 ‘경제안정과 성장에 관한 긴급명령’이라는 이름으로 사채를 일시에 동결했습니다. 기업들이 진 빚 이자를 대폭 경감해준 것이죠. 사채가 전체 통화량의 80%를 차지할 정도였고, 사채업자들의 ‘돈놀이’로 인한 사회 문제가 심각해지자 비밀리에 이같은 작업을 단행한 겁니다. 이 사실이 미리 알려지면 사채업자들이 돈을 미리 빼돌릴까봐 극비로 진행한 탓에 당시 장관들 대다수가 몰랐다고 합니다.
이름은 다르지만 두 사례 모두 국가 위기 상황이라고 판단한 뒤, 극도의 보안을 지켜가며 진행한 조치입니다.
민주화 이후 긴급명령은 대통령이 권한을 남용하지 못하도록 재정과 경제분야에만 한정하도록 ‘긴급재정경제명령’으로 바꿨습니다. 대통령이 긴급재정경제명령으로 할 수 있는 일은 ‘재정·경제상의 처분’ 혹은 ‘법률의 효력을 가지는 명령’ 발동입니다.
예를 들어 현재 ‘고유가 충격’ 상황인 점을 고려하면, 국회의 승인을 받지 않고도 석유류 상승으로 고통받는 취약 계층이나 수출 피해기업에 긴급하게 재정을 지원할 수 있습니다. 핵심 물품 수급 안정을 위해 법률이 정한 범위를 넘어 한시적으로 세금을 깎아줄 수도 있겠습니다. 물가 안정을 위해 수입품 관세를 깎아주는 할당관세의 세율을 법률이 정한 40%포인트 이상으로 대폭 인하하는 조치도 이론적으로는 가능합니다.
법률상 오래 걸리는 행정 절차를 간소화할 수도 있습니다. 이 대통령은 지난달 31일 국무회의에서 “요소, 요소수, 헬륨, 알루미늄 등 핵심 원자재 수급 불안 우려에 대해서는 선제적이고 과감한 대응에 나서주기 바란다”면서 긴급재정경제명령 발동을 언급했습니다.
발동 요건 충족하는지는 논란 소지
다만 현 상황이 긴급재정경제명령 발동 요건을 충족하는지는 논란의 소지가 있습니다. 무엇보다 지금은 ‘국회의 집회를 기다릴 여유가 없다’고 보기 어려운 상황입니다. 최보윤 국민의힘 수석대변인은 지난달 31일 논평에서 “현재 국회는 상시 국회 체제로 운영되고 있는데, 이를 무시하고 먼저 비상 카드를 꺼낸 것은 헌법 절차를 무시한 정치적 쇼”라고 반발했습니다.
게다가 지금도 정부가 법 개정 없이도 행정처분만으로 할 수 있는 비상조치들이 많습니다. 특히 박정희 정부 시절인 1975년 제정된 물가안정법이 물가 비상 상황에서 정부에 광범위한 권한을 부여합니다. 이 법에 따라 정부는 최고가격 지정, 매점매석 금지, 판매 명령 등을 통해 특정 물품의 공급, 수요, 가격을 통제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정부는 긴급재정경제명령 없이도 현재 시행 중인 석유류 최고가격제 적용 대상을 기존 정유사에서 일선 주유소로 확대할 수 있습니다. 정유사의 공급가뿐 아니라 주유소의 소비자 가격 상한선을 정할 수 있습니다. 물가안정법이 최고가격은 생산단계뿐 아니라 도매단계·소매단계 등 거래단계별로, 지역별로 지정할 수 있다고 규정하기 때문입니다.
정부는 특정 산업에 원자재를 우선 배분하도록 유도하거나, 석유화학제품 수출을 금지할 수 있습니다. 특정품목을 매점매석하는 업자들에게 강제 방출을 명령할 수도 있습니다. 실제 산업통상부는 고시 개정으로 지난달 27일부터 나프타 매점매석 금지, 수출제한 조치를 시행해오고 있습니다.
민간 차량 5부제 의무화 아이디어도 나오고 있습니다. 현행 에너지이용합리화법에 따라 민간에도 차량 부제를 의무화하고, 위반하면 과태료 300만원 이하를 부과할 수 있습니다. 실제 단행하면 시민 불편을 초래할 수 있어 ‘최후의 수단’으로 아껴두고 있을 뿐입니다.
지금의 에너지 위기 상황은 1973년 중동전쟁 발발로 벌어진 ‘오일쇼크’ 때와 비슷합니다. 박정희 정부는 국내 석유 위기가 오자 1974년 1월 ‘국민생활의 안정을 위한 대통령의 긴급조치’를 통해 법률로 정해진 소득세·통행세·유류세·주세 등을 감면했습니다. 아울러 그해 2월 ‘종합물가안정대책’을 시행해 가격 통제 정책을 폈는데요. 당시 정부는 ‘1~2월에 원유 등 국제원자재 가격변동에 대응하는 물가구조를 개편하고, 3~4월에 물가를 조정하고, 5월 이후에는 안정 기반을 재건한다’는 목표를 세우고, 품목별 물가 최고가격제와 기준가 제도를 운용했습니다. 석유 파동은 1975년 물가안정법 제정으로 이어졌습니다.
대통령의 긴급재정명령은 고도의 통치행위로 여겨질 수 있지만, 재산권 등 기본권을 제한할 소지가 있습니다. 정부가 도입에 신중한 태도를 보이는 이유입니다. 재정경제부 관계자는 “행정적 명령이나 지침으로 할 수 있는 건 굳이 긴급재정경제명령으로 할 필요가 없다”며 “법률을 개정해야만 할 수 있는 시급한 조치가 무엇인지 살펴봐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구윤철 부총리 겸 재정경제부 장관은 지난 2일 국회 재정경제기획위원회에 출석해 “긴급재정명령을 활용할 수도 있을 것”이라는 이 대통령 발언을 두고 “그렇게 하라는 뜻이 아니었다”고 말했습니다. 이 대통령이 실행을 의도하고 한 발언이 아니라는 겁니다.강유정 청와대 대변인도 지난달 31일 “예시로 든 것”이라며 확대 해석을 경계했습니다.
김윤나영 기자 nayoung@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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