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찬일의 ‘밥 먹고 합시다’] 소년과 전쟁

소사라고 부르는 잡무 봐주는 아저씨가 우리가 들고 간 양동이에 삽으로 탄을 퍼서 넣어주었다. 낑낑대며 교실까지 들고가서 탄을 피우는 것도 우리들 일이었다. 저학년은 소사아저씨들이 피워주었지만 고학년은 알아서 해야 했다. 불쏘시개감을 같이 타서 왔는데 왜 그리도 불이 잘 붙지 않던지. 요령 좋은 아이가 소사아저씨에게 석유를 조금 얻어오면 그럭저럭 해결됐다. 기름의 힘이었다.
그 무렵 겨울방학은 두 달 정도로 길었다. 연료를 아끼기 위해서였다. 길고 긴 겨울을 골목에서 아이들이 놀면서 보냈다. 때로는 야산으로 무엇이든 캐러 갔다. 겨울에 삽날이 안 먹는데도 어떻게든 칡을 캤다. 배고프고 춥다는 말을 실감하던 시기였다.
어머니는 풍로에서 밥 짓는 기름도 아꼈다. 도시 변두리는 따로 땔감을 해올 수 없으니 연탄과 석유가 연료였다. 연탄아궁이에는 헌 수건을 틀어막아 불을 줄여서 썼다. 안방에 놓아둔 자리끼 물이 얼어붙는 냉방을 견뎠다. 안 그래도 대충 지어서 추운 엉터리 도시형 문화주택의 벽으로 칼바람이 숭숭 들어왔다. 골목 담벼락에 기대어 따스한 햇볕을 쬐던 그 겨울의 풍경을 아직도 잊을 수 없다. 싸구려 운동화를 신은 발은 얼어 있는데 볼에 달라붙던 볕의 간지러운 따뜻함이 주던 이질감 같은. 추위와 배고픔은 소년에게도 일상이었다. 이른바 오일쇼크였다. 중동에서 전쟁이 일어났다고 했다. 나이 먹고나서 알았다. 그 가혹한 유신정권이 무너진 건 기름 때문이었다고. 1973년 10월, 중동전쟁이 터졌다. 아랍 산유국들이 석유를 무기로 꺼내 들었고, 국제유가는 넉 달 만에 네 배로 치솟았다. 오일쇼크였다. 그 충격은 지구를 한 바퀴 돌아 박정희 정권의 심장부를 강타했다.
당시 한국은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의 절정기였다. 중화학공업 육성, 새마을운동, 수출 드라이브. 박정희 체제의 정통성은 경제 성장률이라는 숫자 위에 세워져 있었다. 그런데 유가 폭등은 그 토대를 뒤흔들었다. 수입 원자재값이 폭등하며 물가가 치솟았고, 1974년 한국의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25%에 육박했다. 성장의 과실이 민중의 손에 닿기도 전에 물가가 먼저 가져갔다.
유신체제는 이 압박에 억압으로 응했다. 긴급조치를 남발하고 반대 목소리를 짓눌렀다. 그러나 물가고를 계엄령으로 막을 수는 없었다. 1979년 제2차 오일쇼크가 덮쳤다. 유가가 다시 두 배로 뛰었고 한국 경제는 사상 초유의 마이너스 성장(-1.7%)을 기록했다. 그해 10월 26일, 박정희는 궁정동 안가에서 쓰러졌다. 총탄은 김재규의 것이었지만 방아쇠를 당기게 한 분노의 에너지는 부마민주항쟁으로 분출된 민중의 경제적 고통이기도 했다.
유신은 전쟁이 만든 유가 충격 앞에서 내부로부터 무너졌다. 총칼로 유지하던 체제가 기름값 앞에 속수무책이었다는 이 역설은, 경제의 물리적 조건이 정치 체제의 운명을 규정한다는 냉엄한 진실을 남겼다. 미국은 과연 이 전쟁의 후과를 견딜 수 있을까. 다행스러운 건 우리는 어렵게 쟁취한 민주적 정권과 질서 안에 살고 있다는 것이다. 지난 정부 아래였다면 이 파고를 어떻게 헤쳐 나갔을까 생각만 해도 아찔하다.
현실은 냉혹하다. 과거보다 경제적 완충장치가 훨씬 다양하고 맷집도 생겼지만 불안하다. 이미 물가가 심상치 않은 와중이었다. 대도시에서는 짜장면 값이 1만원에 육박하고 마지노선으로 여겨지던 순댓국 1만원이 깨졌다. 우리에게 시험대가 놓였다. 전문가들은 전쟁이 끝난다고 해서 이미 세계 경제 하락은 피할 수 없다고 한다. 자영업자들은 힘들다고 아우성이다. 재료비 상승에 손님은 없다. 경쟁은 치열하다. 자영업은 단군 이래 늘 불황이라고 하지만 이번에는 진짜 같다. 겨울은 끝났지만 마음은 다시 겨울이다. 한국은 어려운 시험대에 놓여 있다. <음식 칼럼리스트>
/박찬일 chanilpark@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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