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4·3 사건의 시작? 3·1 발포 사건의 진실 [호준석의 역사전쟁]

호준석 국민의힘 전 대변인, 현 서울 구로갑 당협위원장 2026. 4. 4. 17: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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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현대사의 최대 비극 제주4.3사건에 대한 좌파의 설명에서 빠지지 않는 것이 3·1발포 사건입니다. 1947년 3·1발포 사건에서 경찰이 양민을 살해했고, 그래서 성난 민중의 봉기가 1년 뒤 1948년 4·3사건으로 이어졌다는 것입니다. 과연 역사의 진실은 어떤 것일까요.

8·15 해방 5일 뒤인 1945년 8월 20일. 제주도에서도 건국준비위원회(건준)가 조직됐습니다. 이때만 해도 좌우익 가리지 않고 사회 안정과 건국에 기여하자는 분위기였습니다. 그러나 좌익 박헌영이 서울에서 건준을 장악하고, 9월 6일 멋대로 조선인민공화국(인공)까지 수립하자 상황은 달라졌습니다.

9월 28일에는 제주도에도 미군이 상륙해 군정청이 들어섭니다. 그러자 제주도 좌익은 10월 9일 제주극장에 모여 제주도 건준을 좌익만의 기구로 개편하고, 인공의 제주 지부인 인민위원회를 리 단위까지 조직합니다. 미군정에 맞서는 별도의 행정 기구를 만든 것입니다.

제주도 우익은 좌익과 맞서기도 어려울 만큼 세력이 약했습니다. 제주도는 육지의 통제가 잘 미치지 않았고, 해방 후 도쿄·오사카·서울 등에서 귀향한 좌파 지식인과 중국 의용군·팔로군 출신 등이 몰려들어 남로당세가 막강했습니다. 해방 전 22만명에서 28만명으로 급증한 제주도 인구 중 남로당원은 5만명이 넘었습니다. 1947년 3·1 발포 사건 전까지 사실상 제주도 전역을 지배한 행정 기구는 미군정이 아닌 인민위원회였습니다.

“제주도에서는 아무런 반대파의 저항도 없이 인민위원회가 생겼고 민전(민주주의민족전선)의 천하가 되었다. 미군정에서 보낸 지사나 경찰은 좌익에 단호한 태도를 취하지 못했고 도리어 이에 가담하고 배양했다.” (조선일보 1949년 6월 3일 자)

/조선일보 유튜브 '호준석의 역사전쟁'

1946년에는 콜레라가 번져 369명이 목숨을 잃었고 보리 흉작으로 식량난이 겹쳐 도민들의 살림은 피폐하고 민심은 흉흉했습니다.

1946년 가을 박헌영이 조선정판사 위조지폐 사건으로 수배돼 월북하면서 남로당은 합법 정치 무대의 주도권을 상실했습니다. 남로당은 폭력 투쟁으로 전환해 대한민국 정부 수립 저지에 나섰습니다. 대구·경북 전역을 남로당이 휩쓴 1946년 대구 10월 사건으로 무려 300여 명의 경찰관, 공무원, 우익 주민이 학살당했습니다.

이런 가운데 해가 바뀌고 1947년이 찾아왔습니다. 3·1운동 28주년인 3월 1일 남로당은 서울·부산·정읍·순천 등 전국 각지에서 의도적으로 우익과 충돌했습니다. 서울에서는 우익이 서울운동장, 좌익이 남산공원에서 따로 기념행사를 연 뒤 남대문에서 양측이 충돌해 16명이 사망하고 50여 명이 다쳤습니다. 남로당세가 강한 제주도에서는 오래전부터 대규모 집회가 준비되고 있었습니다.

/조선일보 유튜브 '호준석의 역사전쟁'

2월 16일 하달된 남로당 제주도당의 ‘3·1운동 기념투쟁 방침’은 이런 내용이었습니다. ‘당일 복장은 전투복장으로 하며, 인민위원회 기를 들고, 구호는 ‘인민위원회로의 정권 양도, 박헌영 체포령 철회, 인민항쟁 관계자 석방, 남로당 깃발 아래로의 인민의 결집’으로 하라.’

/조선일보 유튜브 '호준석의 역사전쟁'

2월 20일 남로당 제주도위원회가 각 농촌 야체이카(세포)에 하달한 서한은 ‘우익이라 칭하는 반동분자들을 철저히 숙청함으로써만 우리의 승리를 기대할 수 있다’는 섬뜩한 내용을 담았습니다.

/조선일보 유튜브 '호준석의 역사전쟁'

2월 25일 자 민청 제주읍위원회의 지령서는 “3·1운동 기념일을 대중을 고무하여 끌어들이는 기회로 삼아야 한다. 표어는 ‘우리들의 지도자 박헌영 선생 체포령 즉시 철회하라! 정권은 인민위원회로 넘기라! 우리의 지도자 박헌영, 허헌 선생, 김일성 장군 만세!’ 등이다” 였습니다.

/조선일보 유튜브 '호준석의 역사전쟁'

제주도 출신 학자인 신상준 전 대구대 총장이 저술한 <제주도4.3사건>에 기록된 이 지령들은 남로당의 목적이 처음부터 3.1절 기념이 아닌 체제 전복이었음을 보여줍니다. 이런 정보는 2월초부터 미군정 경무부에 입수되고 있었습니다. 미군정은 폭력사태에 대비해 2월 23일 경찰 응원대(지원병력)를 제주도로 파견했습니다. 2월 28일에는 안세훈 등 남로당 지도부를 불러 이들이 요구한 제주북국민학교 대신 서비행장(현 제주국제공항)에서 3.1절 기념행사를 열 것과, 시위는 금지한다는 방침을 최후 통고했습니다. 그러나 남로당은 이를 묵살했습니다.

다음날인 3월 1일 제주북국민학교에서 대규모 집회가 열렸습니다. 제주도 인구의 10분의 1, 무려 2만 5천명이 모였습니다. 좌익계열 민전, 인민위원회, 민청, 부녀동맹, 교원조직, 직장조직이 총동원된 결과였습니다. 부녀동맹원들은 붉은 완장을 두르고 반미 삐라를 뿌렸습니다.(제주신보 1947.4.6일자) 오전 11시 시작된 대회는 민전 위원장 안세훈 등 각계 대표의 ‘민족 반역자 처단, 신탁통치 절대지지, 경찰 비방’ 등을 내용으로 하는 연설이 이어진 뒤 “인민공화국 수립 만세” 삼창으로 오후 2시 끝났습니다. 시위 불허 방침에도 불구하고 기념식이 끝나자마자 대규모 시위가 시작됐습니다. 좌익 청년들이 앞장서 스크럼을 짜고 ‘미군정은 물러가라’, ‘친일파를 처단하라’ 등의 구호를 외치며 서문통과 동문통을 향해 쏟아져 나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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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2시 50분쯤 기마경찰관 임영관 경위가 발 디딜 틈 없는 군중 사이를 헤치고 제주경찰서로 가던 중 골목에서 튀어나온 대여섯 살 어린이가 말의 발에 부딪쳐 쓰러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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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상황을 바로 앞에서 목격한 제주시 화북동 출신 1933년생 김하영 씨는 이렇게 증언했습니다. “시위대원이 플래카드용 장대를 뽑아내어 말의 항문을 찔러대는 바람에 놀란 말이 이리저리 뛰었다. 미처 피하지 못한 어린 소년 1명이 발에 차이는 사고가 나자 이를 지켜본 군중들이 야유와 ‘저 놈 잡아라!’ 라는 함성과 함께 돌멩이를 던지며 쫓아갔다.”(김영중 <내가 보는 제주4.3사건>)

/조선일보 유튜브 '호준석의 역사전쟁'

1989년 발간된 4.3증언자료집 <이제사 말햄수다>는 “임 경위가 아이가 쓰러진 줄도 모르고 그냥 지나치려 했고, 성난 군중들은 기마병이 사람을 치었다고 고함을 지르며 기마경찰관에게 돌을 던졌다. 임 경위의 말이 놀라 경찰서로 뛰어 들어갔다”고 기술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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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 출동한 경찰은 제주 출신 330명과 2월 23일 충남에서 파견된 경찰 100명 등 430명이었습니다. 제주경찰서는 충남 경찰관들이 지키고 있었습니다. 성난 군중이 제주경찰서로 몰려들자 보초를 서던 경찰과 도청 정문 망루에 있던 경찰이 군중을 향해 무차별 사격을 가해 6명이 숨지고 6명이 다쳤습니다. 비극적 사건이었습니다.

/조선일보 유튜브 '호준석의 역사전쟁'

충남에서 온 경찰관들은 다섯 달 전 대구와 경북 전역을 휩쓸었던 대구 10월사건 때 투입됐던 사람들이었습니다. 당시 대구경찰서는 좌익에 점거돼 무기고가 탈취되고 경찰관 38명이 학살됐습니다. 경북에서도 성주,칠곡,달성,왜관,영천,상주 등 곳곳에서 경찰서가 습격 받고 경찰관 80명이 참혹하게 살해됐습니다. 10월사건의 트라우마에서 벗어나지 못한 경찰관들이 군중에 대한 공포심에 발포한 것입니다. 당시 미군 정보보고서는 “그들은 대전에서 훈련을 받았고 1946년 가을, 좌익들에 의해 동료 경찰이 잔혹하게 당했던 사실을 오랫동안 잊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고 평가했습니다.

/조선일보 유튜브 '호준석의 역사전쟁'

사망자와 부상자를 도립병원으로 옮길 때 도립병원에서 또 발포사건이 일어납니다. 이 병원에는 허화 순경이 교통사고로 입원해 두 사람의 육지 경찰이 간호를 하고 있었습니다. 총성이 울린 뒤 피투성이가 된 부상자들이 들이닥치자 충남 공주경찰서 소속 이문규 순경이 공포심에 총을 발포해 행인 2명이 중상을 입었습니다.

삽시간에 일어난 비극이었습니다. 조병옥 미군정 경무부장, 박경훈 제주지사, 제주도 미군정관 써먼 스타우트 소령 등 3자에 의해 민관합동 진상조사위원회가 구성돼 진상조사를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남로당은 이 사건을 반 미군정, 대 경찰 투쟁의 불쏘시개로 삼았습니다. ‘경찰이 발포해 6명이 사망했다’는 전단이 제주도 전역에 살포됐습니다. 3월 5일 제주 남로당 간부 수십 명이 제주읍 삼도리 김행백의 집에 모여 투쟁위원회를 구성하고 파업지령서 문안을 배포했습니다. 대구10월사건을 ‘10월 혁명’이라고 찬양하며 ‘전도(全島)가 총파업에 즉시 돌입한다’는 내용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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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10일 총파업이 시작됐습니다. 북군청을 제외한 제주도의 모든 관공서, 통신, 운송, 은행, 교사, 학생까지 무려 41,211명이 참여해 제주도 전체가 마비됐습니다. 심지어 애월, 대정, 중문지서 등 경찰까지 파업에 가담했고 중문지서는 양경환 지서장 등 6명이 사표를 내고 나가버렸습니다.

/조선일보 유튜브 '호준석의 역사전쟁'

다음날인 11일 강인수 제주도 감찰청장(경찰청장)은 도립병원 앞 발표는 경찰의 무례한 행위였다며 사과했습니다. 그러나 파업은 멈추지 않았습니다. 사태가 심각해지자 3월 15일 전라남북도에서 222명, 18일 경기도에서 99명의 경찰관이 추가 투입됐습니다. 3월 19일 민관합동 진상조사위원회는 ‘제주경찰서에서 발포한 행위는 치안 유지를 위한 정당방위로 인정된다. 그러나 도립병원 발포 행위는 무사려한 행위임이 인정돼 순경 이문규는 행정 처분에 처해야 한다’는 결론을 전원일치로 내립니다.(제주신보 1947.3.22일자)

총파업은 3월말에야 완전히 끝났습니다. 사태의 책임을 지고 제주 미군정장관 스타우트 소령, 강인수 제주경찰감찰청장, 강동효 제주경찰서장은 해임됐고, 도립병원에서 발포한 이문규 순경은 파면됐습니다. 조병옥 미군정 경무부장(훗날 민주당 대통령 후보)은 3월 21일 담화를 통해 “이번 파업은 북조선 세력과 통모해 미군정을 전복하고 사회적 혼란을 일으키려는 정치사회단체들의 행동”이라고 밝혔습니다. 파업에 가담한 경찰 66명이 파면됐고, 총파업본부장이었던 제주도청 산업국장 임관호, 인사과장 송인택을 비롯한 도청 간부 10여명 등 파업을 선동한 500여 명이 체포됐습니다.

3.1발포사건은 일어나지 말았어야 할 비극입니다. 지리적 특수성으로 외부인들에게 거부감이 있는 제주도민들과, 대구10월사건을 겪은 ‘육지경찰’ 간 갈등이 이 사건으로 심화됐고 이는 1년 후 4.3사건 발발에도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러나 ‘3.1발포사건 때문에 분노한 민중이 일으킨 민주항쟁이 4.3사건’이라는 주장은 사실이 아닙니다. 남로당은 1946년 이후 일관되게 체제 전복과 인민공화국 수립을 위해 폭력투쟁을 벌였습니다. 1947년 3.1운동 기념투쟁도, 1948년 4.3사건도 같은 목표 아래 계획하고 실행한 것입니다.

/조선일보 유튜브 '호준석의 역사전쟁'

좌익단체들은 1948년 1월 남로당 간부 221명 체포사건과 3월 경찰의 고문치사 사건으로 제주도민이 극심하게 탄압을 받아 4.3사건이 일어났다고도 주장합니다. 그러나 1948년 1월 제주도 남로당 간부들이 연행된 것은 이들이 4.3사건을 모의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1948년 3월 경찰의 고문치사 사건은 명백히 잘못된 일이지만, 이는 이미 2월에 남로당이 4.3사건을 결정한 뒤 발생한 사건입니다. 남로당의 불변의 목표는 민주주의가 아닌, 인민공화국 수립, 즉 한반도 공산화였습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재임 시절 미국 CNN 인터뷰에서 4.3사건은 공산주의자들의 폭동으로 시작됐다고 말했습니다.(1998.11.23.) 남로당이 일으킨 폭력투쟁을 민주주의 수호를 위한 민중항쟁이라고 선동하는 것은 역사 왜곡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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