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뉴브강 낭만 뒤에 숨겨진 유럽 ‘배터리 심장’ 헝가리

한겨레 2026. 4. 4. 0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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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코노미 인사이트 _ Economy insight
세계는 지금
‘관광대국’이라는 수식어 뒤에 가려졌지만 헝가리는 유럽 한가운데서 미래산업의 명운을 쥔 ‘이차전지 제조 허브’라는 엔진을 힘차게 구동하고 있다. 관광객들이 부다페스트에서 다뉴브 강변을 걷고 있는 가운데 체인브리지와 부다성이 보인다. REUT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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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 포털 사이트에서 ‘헝가리’를 검색하면 가장 먼저 쏟아지는 연관 검색어는 다뉴브강, 야경, 국회의사당 그리고 어부의 요새다. 한국인에게 헝가리는 동유럽 특유의 우수와 낭만을 품은 아름다운 관광국가로 널리 알려져 있다. 우리의 육개장을 쏙 빼닮은 전통 수프 ‘구야시’(굴라시) 한 그릇과 황금빛으로 물든 부다페스트의 밤거리는 매년 수많은 한국 여행객의 발길을 사로잡는다.

하지만 부다페스트무역관에서 헝가리의 경제와 산업 현장을 매일 마주하다보면 낭만적인 모습 뒤에 역동적인 진면목이 숨쉬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지금 헝가리는 유럽 한가운데서 미래산업의 명운을 쥔 ‘이차전지(배터리) 제조 허브’라는 거대한 엔진을 힘차게 구동하고 있다. ‘관광대국’이란 수식어 뒤에 가려진, 우리가 잘 몰랐던 헝가리의 진짜 모습이다.

헝가리의 전략적 부상

현재 글로벌 자동차산업의 패러다임은 내연기관에서 전기자동차로 빠르게 바뀌고 있다. 이 거대한 전환기 속에서 유럽연합(EU)은 역내 전기차 밸류체인을 독립적으로 구축하는 데 집중하고 있다. 그 중심축을 담당하는 핵심 국가 중 하나가 헝가리다.

헝가리가 유럽 최고의 투자처로 떠오른 이유는 명확하다. 유럽 한가운데라는 지리적 이점과 내연기관 시대부터 탄탄하게 다져온 자동차 제조업 기반 덕분이다. 실제로 유럽에서 독일을 제외하고 독일 프리미엄 3사(아우디, 베엠베(BMW), 메르세데스벤츠)의 생산 거점을 모두 품은 국가는 헝가리가 유일하다. 아우디와 벤츠는 일찌감치 대규모 공장을 가동 중이고, BMW도 데브레첸에 차세대 전기차 전용 공장을 구축하며 대열에 합류했다.

배터리는 부피가 크고 무거워 물류비용이 전체 원가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높다. 따라서 완성차 공장 근처에 배터리 생산기지가 위치하는 것이 필수 요소다. 내연기관 시절부터 맺어온 헝가리와 글로벌 완성차 업체들의 끈끈한 생태계는 전기차 시대를 맞아 자연스럽게 배터리 수요 급증으로 이어졌다.

이런 이점을 바탕으로 헝가리는 전세계 배터리 자본이 집중되는 핵심 거점이 됐다. 헝가리 투자청(HIPA)에 따르면, 본격적인 전기차 전환이 시작된 지 10년도 안 되는 최근 기간(누적 기준)에 헝가리는 이차전지 분야에서 40개 이상의 글로벌 기업으로부터 60개가 넘는 프로젝트를 통해 약 265억유로(약 45조3천억원) 규모의 외국인직접투자(FDI)를 유치했다. 현재 삼성에스디아이(SDI), 에스케이(SK)온, 닝더스다이(CATL), EVE에너지(億緯鋰能), 선워다(Sunwoda) 등 글로벌 상위권 주요 배터리 제조사의 상당수가 유럽 진출의 최전선 교두보로 헝가리를 선택했다.

물론 긍정적 면만 있는 것은 아니다. 급격한 배터리 산업 확장은 대규모 전력 수급과 환경규제, 지역사회의 수용성이라는 새 과제도 함께 제기하고 있다. 헝가리도 산업 성장과 환경적·사회적 지속가능성 사이의 균형점을 모색하는 과정에 있다.

헝가리의 산업 지형 변화를 최일선에서 이끌어온 개척자는 단연 한국 기업들이다. 선제적 투자를 통해 헝가리에 안착한 케이(K)-배터리 기업들은 현재 현지 이차전지 생태계에서 높은 비중을 차지한다. 우리 주요 배터리셀 제조사들은 헝가리 곳곳에 대규모 생산기지를 선도적으로 구축하며 유럽 완성차 업계의 핵심 파트너로 자리매김했다. 셀 제조사뿐만 아니라 배터리 생산에 필수적인 양극재, 동박, 분리막 등 소재·부품·장비(소부장) 기업의 진출도 이어지며 탄탄한 자체 밸류체인을 완성해가고 있다.

하지만 끝없이 질주할 것만 같던 헝가리 평원의 K-배터리 기업들도 최근 새로운 국면을 맞이했다. 글로벌 전기차 시장이 대중화 단계로 넘어가기 전에 겪는 일시적 수요 정체기, 이른바 ‘캐즘’(chasm)에 진입했기 때문이다. 주요국의 전기차 보조금 축소와 고금리 장기화 여파로 시장의 성장 속도가 안정 추세에 접어들면서 우리 기업들의 현지 전략도 중대한 변곡점을 지나는 중이다.

양적 팽창 대신 질적 성장

기업들은 과거에는 쏟아지는 수요에 발맞춰 공격적인 생산라인 증설과 ‘양적 팽창’에 집중했다면 지금은 시장 상황을 예의주시하며 투자와 가동 속도를 유연하게 조절하는 ‘질적 성장’에 방점을 찍고 있다. 무조건적인 덩치 키우기보다는 현재 가동 중인 설비의 운영 효율을 극대화하고 원가 경쟁력을 높이는 보수적이고 내실 있는 경영 기조로 선회한 것이다. 이는 일시적인 시장 둔화의 파고 속에서 무리한 확장보다는 효율화에 집중하는 전략이다. 다가올 전기차 대중화 시대를 더 단단하게 준비하는 K-배터리의 현명한 숨고르기라고 볼 수 있다.

숨고르기 기간에 우리 기업들이 가만히 웅크리고만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제조 원가를 낮추고 후발 주자와의 기술 격차를 구조적으로 벌리는 이른바 ‘초격차’ 전략을 적극적으로 가동하고 있다.

선제적 투자로 헝가리에 안착한 케이(K)-배터리 기업들은 현재 현지 이차전지 생태계에서 높은 비중을 차지한다. 헝가리 괴드에 있는 삼성에스디아이(SDI) 배터리 공장의 전경. REUTERS

먼저 생산성 측면에서의 디지털 전환이 눈부시다. 배터리 제조는 수율(합격품의 비율)이 곧 기업의 생존과 직결된다. 이를 위해 우리 기업들은 기존의 단순한 기계적 자동화를 넘어 인공지능(AI) 기반의 제조실행시스템(MES) 등 고도화된 스마트 제어망을 헝가리 현지 공장에 발 빠르게 이식하고 있다. 생산공정 전반에서 발생하는 방대한 데이터를 실시간으로 수집하고, AI가 이를 분석해 수율 저하 원인을 즉각 차단하고 최적화하는 시스템을 구축한 것이다. 이를 통해 과거에는 수년씩 걸리던 신규 공장의 수율 안정화 기간을 획기적으로 단축하며 가동 초기부터 생산성과 품질 경쟁력을 탄탄하게 끌어올리는 데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우수 인재 선점과 현지화를 위한 밀착형 행보도 돋보인다. 거대하고 고도화된 스마트 공장을 장기적으로 안정화하고 글로벌 경쟁력을 극대화하기 위해서는 본국의 핵심 기술 노하우를 현지의 우수 인재에게 이식하고 함께 시너지를 내는 과정이 필수적이다. 이를 위해 K-배터리 및 주요 소부장 기업들은 헝가리 내 주요 공과대학 및 연구기관과 긴밀한 산학협력 네트워크를 구축하며 현지 기술인재 육성에 직접 팔을 걷어붙였다. 현지 대학과 맞춤형 연구·교육 프로그램을 공동 운영하거나 인력 수급을 위한 포괄적 협력체계를 선제적으로 마련하는 방식이다.

이는 단순히 국외에 생산기지를 짓고 일자리를 창출하는 생산기지 투자 수준을 넘어선다. 현지의 우수한 청년들을 첨단산업의 핵심 인력으로 직접 길러내, 헝가리 지역사회와 함께 호흡하고 장기적이고 지속 가능한 성장의 토대를 단단히 다지는 가장 모범적인 현지화 전략으로 평가받고 있다.

우수한 제조 인프라 외에 우리 기업들이 헝가리에 뿌리를 깊게 내리는 또 다른 중요한 이유가 있다. 바로 점차 강화되는 EU의 환경 및 무역 규제다. EU는 핵심원자재법(CRMA)을 비롯해 배터리 생산부터 폐기까지 전 과정의 탄소배출량과 이력을 추적하는 ‘배터리 여권’(Battery Passport) 제도를 도입했다. 이는 단순히 질 좋고 저렴한 배터리를 만들어 수출하는 과거의 방식으로는 더는 유럽의 무역장벽을 넘을 수 없음을 의미한다.

이에 K-배터리 생태계는 헝가리 현지에서 제조 경쟁력을 높이는 것을 넘어, 다 쓰고 버려진 폐배터리에서 핵심 광물을 다시 추출해 재사용하는 ‘순환경제’ 구축까지 시야를 넓히고 있다. 배터리셀 제조부터 소재 가공, 그리고 폐배터리 재활용으로 이어지는 ‘닫힌 고리’(Closed-loop) 밸류체인을 유럽 역내인 헝가리에서 완성해 새로운 도약의 기회로 역이용하고 있는 것이다.

유럽 시장을 향한 전진기지

부다페스트에서 바라본 헝가리의 하루하루는 ‘조용한 산업혁명’의 한가운데 있다. 과거 서유럽과 동유럽을 잇는 물류와 교역의 거점이었던 헝가리는 이제 아시아의 첨단 배터리 기술과 유럽의 전통 자동차 자본이 연결되는 미래 모빌리티의 요람으로 위상을 새롭게 다지고 있다.

우리에게 헝가리는 다뉴브강의 낭만적인 야경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대한민국 경제의 미래 먹거리인 이차전지 산업이 가장 치열하게 꽃피우고 있으며, 시장의 불확실성 속에서도 묵묵히 내일을 준비하는 든든한 경제 파트너다. 캐즘이라는 짙은 안갯속에서도 흔들림 없이 질적 성장을 도모하는 K-배터리 생태계의 고군분투가 머지않아 유럽 전역에서 더욱 공고한 경쟁력으로 이어지기를 기대한다.

이수현 KOTRA 부다페스트무역관 과장 suhyun0530@kotra.or.kr

대한무역투자진흥공사(KOTRA)와 함께 세계 각국의 최신 경제 흐름과 산업 동향을 소개한다. KOTRA는 전세계 85개국에 131개의 해외 무역관을 보유한 ‘대한민국 무역투자 정보의 메카’로 생생한 해외 정보를 수집·전달하는 것은 물론 국내 기업들의 해외 진출을 돕는 안내자 역할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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