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령어 몇 줄’이 수십년 경험 압도하는 AI 시대…‘창작자의 미래’ 어디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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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들어 지인들로부터 연락이 부쩍 늘었다. 연락이야 늘 하는 것이지만 그 내용이 좀 달라졌다. 예전엔 작업 의뢰나 협업 제안이 대부분이었는데 요즘은 ‘문 닫았다’ ‘접었다’ ‘다른 거 알아봐야 할 것 같다’는 말이 섞이기 시작했다.
20년 넘게 광고 영상을 만들어온 선배, 기업 홍보 영상으로 탄탄하게 자리 잡았던 동료, 웨딩 영상만으로 10년을 버텨온 후배. 이들이 하나둘 영상계를 떠나거나 새 흐름에 따라가기 위해 늦은 나이에 발버둥 치고 있다.
처음에는 그저 경기 탓이라고 생각했다. 실제로 경기가 나쁘기도 하다. 하지만 조금만 들여다보면 그것만이 이유라 할 수 없다. 대화 속에 구태여 인공지능(AI)이란 단어를 입에 올리지 않는 건 어쩌면 마지막 남은 제작자의 자존심일지도 모른다. 그 자존심의 이면에 한 시대를 풍미했던 기술이 단 몇 초 만에 생성되는 알고리즘 앞에 무력화되는 것을 지켜봐야 하는 창작자의 허망함이 깔려 있다.
재편되는 제작 생태계
비용 구조는 더욱 충격적인 파괴력을 보여준다. 2026년 현재, AI 영상 제작 업체들이 제시하는 상업용 숏폼 광고 영상의 제작 단가는 건당 15만원에서 200만원 수준이다. 반면 실제 촬영이 포함된 전통적 방식의 제작비는 인건비, 장비 대여료, 장소 섭외비 등을 포함해 최소 2천만원에서 수억원에 이른다.
자본의 논리로 움직이는 광고주들에게 비용을 4분의 1로 줄일 수 있다는 제안은 거부할 수 없는 유혹이다. 미국 인터넷광고협회(IAB)가 2025년 7월 발표한 보고서에 따르면, 미국 광고주의 86%가 이미 생성형 AI를 실무에 도입했거나 계획 중이다. 전문가들은 2026년 말까지 전체 광고물의 40% 이상이 AI 손을 거쳐 탄생하리라 전망하고 있다.
글로벌 비디오 생성 AI 시장은 ‘복합 연평균 성장률’(CAGR) 18.8%를 기록하며 2034년에는 35억달러(약 4조8천억원) 규모에 이를 전망이다. 이는 단순한 기술 진보를 넘어 ‘제작'이라는 행위 자체가 ‘자본 집약적 노동'에서 ‘데이터 집약적 지능'으로 패러다임이 완전히 이동했음을 의미한다.
광고 영상 쪽은 그나마 낫다. 중소 규모 프로덕션과 기업 홍보 영상 업계는 그야말로 직격탄을 맞고 있다. 고객이 AI로 직접 만든 시안을 들고 와서 “우리가 어설프게 만져도 이 정도 나오는데, 프로인 당신들은 왜 이렇게 비싸고 시간이 오래 걸리느냐”고 묻는 상황이 일상이 됐다. 30년 가까이 현장을 누비며 다져온 연출력과 편집 감각이, 이제는 텍스트 명령어 몇 줄과 경쟁해야 하는 비참한 상황에 놓인 것이다.
이런 소리를 들을 때마다 제작자로서 충격받을 수밖에 없다. 수십 년간 우리가 믿어온 ‘기술과 경험이 쌓이면 대체 불가능한 자산이 된다’는 원칙이 근간부터 흔들리는 말이기 때문이다. 과거 활자공이 디지털 조판의 등장과 함께 역사 속으로 사라졌듯, 우리 역시 기술 과도기의 희생양이 되는 것이 아니냐는 공포가 업계 전반에 퍼져 있다.
서서히 무너지는 것들
필자는 콘텐츠 업계에서 일한 지 30년이 돼간다. 그사이 아날로그 필름에서 디지털 센서로 넘어오는 격변을 겪었다. 인터넷이 종이 매체를 삼킬 때도, 스마트폰이 모든 소비 방식을 수직 화면으로 바꿀 때도 현장에 있었다. 그때마다 살아남은 건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고 기술을 도구 삼아 먼저 뛰어든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이번엔 조금 다른 감각이 든다. 지금의 AI 변화는 속도가 너무 빠르고, 영역을 가리지 않으며, 무엇보다 인간의 ‘숙련도' 자체를 무력화한다. 20년을 갈고닦은 컷 편집의 리듬감, 조명을 세밀하게 조정하는 손의 경험, 인터뷰이로부터 진심 어린 답변을 끌어내는 노하우. 이것들이 과연 AI가 절대 흉내 낼 수 없는 인간만의 영역인지, 아니면 결국 AI의 방대한 학습 데이터 앞에 무너질 ‘퇴물'의 자기 위로에 불과한지 더욱 불분명해지고 있다.

특히 40대 후반과 50대 중장년 제작자에게 이 변화는 더욱 가혹하다. 20대 젊은 제작자는 AI를 당연한 ‘도구'로 받아들이며 새로운 규칙의 경주를 시작하지만, 기성세대는 달리던 중간에 갑자기 규칙이 바뀐 경기를 맞이한 셈이다. 국내 연구 결과만 봐도 AI로 인한 실직 가능성을 가장 높게 인식하고 실제 고용 위협에 노출된 집단으로 중장년층 제작자가 꼽히고 있다.
우리는 이 거대한 파도 앞에 속수무책으로 휩쓸려가야만 할까. 필자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기술이 정점으로 치달을 때, 시장은 반드시 그 반대급부를 찾기 마련이다. AI가 콘텐츠를 무한히 쏟아낼수록 사람들은 역설적으로 ‘진짜 사람의 냄새’에 더 굶주리기 시작했다.
2025년 말, 코카콜라가 선보인 AI 생성 크리스마스 광고 사례는 우리에게 중요한 시사점을 던진다. 최신 기술로 무장한 유려한 영상이었음에도, 소비자는 “수십 년간 쌓아온 코카콜라 특유의 따뜻한 감성이 사라지고 차가운 기계적 이미지만 남았다”며 거세게 비판했다. 반면 속옷 브랜드 에어리나 즉석카메라 브랜드 폴라로이드 등은 AI를 전혀 사용하지 않은 인간의 창작물임을 전면에 내세우며 차별화에 성공했다. 효율성이 극대화돼 모든 영상이 매끄럽고 완벽해지는 시대에, 인간만이 가진 투박한 진정성과 불완전한 창의성이 오히려 고가의 프리미엄 자산으로 격상되는 것이다.
30년 경력의 제작자로서 나는 스스로에게 묻는다. ‘AI가 내 자리를 위협한다면, 끝까지 AI가 넘보지 못할 인간 제작자만의 보루는 무엇인가.’
귀해지는 ‘인간적 불완전함’
둘째는 ‘맥락의 해석’이다. AI는 주어진 데이터 안에서 최적의 조합을 찾지만, 노련한 제작자는 고객도 미처 깨닫지 못한 브랜드의 본질적 문제를 꿰뚫어보고 질문 자체를 재정의한다. 이는 데이터가 아닌 직관과 통찰의 영역이다.
마지막은 ‘책임’이다. AI는 결과물을 뱉어내지만 그 결과에 대해 사회적, 도덕적 책임을 지지 않는다. 프로젝트의 성패를 온몸으로 받아내고 수습하며 다음을 도모하는 것은 오직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필자 역시 최근 AI 툴을 배우기 시작했다. 반복적인 컷 편집과 자료 조사, 초안 구성은 AI라는 ‘고성능 비서'에게 맡긴다. 그리고 나는 더 본질적인 기획과 감정적 연출에 집중하려 노력한다. 이는 항복이 아니라 영리한 협업이다. 세계경제포럼(WEF)은 전세계 기업의 상당수가 AI와 협업할 수 있는 인재를 최우선 순위로 꼽고 있다고 밝혔다. 숙련된 제작자는 이제 직접 도구를 드는 장인을 넘어 AI라는 거대한 오케스트라를 지휘하는 마에스트로가 돼야 한다.
비슷한 나이에 비슷한 고민을 하며 밤잠을 설치는 ‘동지’들에게 감히 말하고 싶다. 우리가 지난 30년간 쌓아온 것은 낡은 기술이 아니라, 어떤 기술도 쉽게 모방할 수 없는 ‘현장을 대하는 태도’와 ‘콘텐츠를 바라보는 깊이’다. AI가 영상 제작의 문턱을 낮춰 ‘창작의 민주화’를 가져왔을지는 몰라도, 그 콘텐츠에 영혼을 불어넣어 대중의 마음을 움직이는 법까지는 아직 배우지 못했다.
AI 시대는 분명 제작자에게 가혹한 시험대다. 데이터도, 시장도, 고객 요구도 우리를 벼랑 끝으로 내모는 듯하다. 하지만 인류 역사의 모든 전환기가 그랬듯 위기는 늘 새로운 종의 탄생을 예고한다. 살아남는다는 것은 그저 과거의 영광을 붙잡고 버티는 것이 아니다. 시대의 거센 흐름 속에서 변해야 할 것은 과감히 버리되, 자신이 가진 인간적 오리지널리티를 어떻게 기술과 결합해 증폭할지 고민하는 유연함이 필요하다.
30년 전 처음 카메라를 잡았을 때의 그 설렘과 긴장을 기억한다. 지금 우리는 그때보다 훨씬 강력한 무기를 손에 쥐게 된 것일지도 모른다. 비록 규칙은 바뀌었지만 경기는 계속된다. 그리고 이 경기의 마지막 승자는 가장 빠른 알고리즘이 아니라 그 알고리즘을 품고 끝까지 인간의 진심을 이야기하는 제작자가 될 것이라 믿고 싶다.
문동열 콘텐츠산업 칼럼니스트 rabike0412@gmail.com
문동열 칼럼니스트는 업계 경력 20년 이상의 콘텐츠산업 전문가다. 글로벌 콘텐츠 제작자로 활동하며, 콘텐츠 제작과 금융이 전문이다. 일본 게이오대학원을 졸업하고 LG인터넷과 SBS콘텐츠허브 등에서 방송·게임·영화 등 다양한 콘텐츠의 기획과 제작을 맡았다. IBK기업은행에서는 콘텐츠 금융과 관련한 시스템 구축에 참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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