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4일) 밤, 우리를 다시 미치게 할 그 시절 홍콩… 왕가위의 '중경삼림' [세계의 명화]

[마이데일리 = 서기찬 기자] 왕가위 감독의 역대급 걸작 '중경삼림'을 다시 본다.
4일 저녁 10시 55분, EBS1 TV '세계의 명화'를 통해 1990년대 홍콩 영화의 정점이자 스타일의 혁명이라 불리는 왕가위 감독의 명품 '중경삼림'(Chungking Express, 1994)이 안방극장을 찾아간다.
개봉한 지 30년이 넘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세련된 영상미와 독보적인 감수성으로 전 세계 영화 팬들의 가슴을 설레게 하는 작품이다.
엇갈리는 두 사랑, 멈춰버린 시간의 조각들
영화는 홍콩의 번화가 침사추이를 배경으로 두 개의 독립된 에피소드로 구성된다.
첫 번째 이야기는 실연의 상처를 잊기 위해 유통기한이 5월 1일인 파인애플 통조림을 모으는 경찰 223(금성무 분)과 마약 밀매를 하는 의문의 금발 여인(임청하 분)의 기묘한 만남을 다룬다.
이어지는 두 번째 이야기는 전 여자친구가 남긴 이별 편지를 외면하는 경찰 663(양조위 분)과 그가 자주 찾는 단골 식당의 점원 페이(왕페이 분)의 이야기다.
페이는 경찰 663의 집 열쇠를 얻어 몰래 그의 집안 물건을 하나 둘 씩 바꾸며 자신만의 방식으로 그에게 다가간다. 이들은 모두 누군가를 떠나보냈거나, 누군가를 기다리는 고독한 도시인의 얼굴이다.

1997년 홍콩 반환, 불안이 빚어낸 '유통기한'의 미학
'중경삼림'이 제작된 시기는 1997년 홍콩의 중국 반환을 앞두고 홍콩 사회 전체가 거대한 불확실성에 휩싸여 있던 때다.
왕가위 감독은 이 불안감을 직접적으로 드러내는 대신, '유통기한'이라는 상징을 통해 은유한다. 영원한 것은 없으며 모든 사랑과 존재에는 끝이 있다는 상실감은 당시 홍콩 청년들이 느꼈던 정체성의 혼란과 맞닿아 있다.
영화 속 주인공들은 수많은 인파 속에서도 철저히 고립되어 있다. 만기된 통조림을 먹어 치우거나, 젖은 수건과 대화를 나누는 기이한 행동들은 타인과 진정한 소통을 이루지 못하는 현대인의 지독한 고독을 투영한다.
"사랑에 유통기한이 있다면 만 년으로 하고 싶다"는 대사는 역설적으로 찰나의 순간에 매달릴 수밖에 없는 당대 젊은이들의 슬픈 소망을 대변한다.
스텝프린팅과 핸드헬드: 흔들리는 도시의 시각적 언어
이 영화를 전설로 만든 것은 단연 왕가위 감독과 촬영 감독 크리스토퍼 도일이 완성한 파격적인 촬영 기법이다.
특히 인물은 느리게 움직이는데 배경은 잔상처럼 빠르게 흘러가는 '스텝프린팅(Step-printing)' 기법은 '중경삼림'의 전매특허다. 이는 혼란스러운 대도시의 속도감과 그 속에서 정체된 개인의 심리적 괴리를 시각적으로 완벽하게 구현해냈다.
또한, 카메라를 손에 들고 찍는 '핸드헬드(Hand-held)' 방식은 관객으로 하여금 홍콩의 좁은 골목과 번잡한 시장통 한복판에 서 있는 듯한 현장감을 부여한다.
거칠게 흔들리는 화면과 강렬한 색채의 대비는 정형화된 영화 문법을 파괴하며 ‘왕가위 스타일’이라는 고유의 장르를 탄생시켰다.
세대를 초월한 불멸의 '시티 팝' 감성
여기에 마마스 앤 파파스의 'California Dreamin''과 왕페이가 번안해 부른 'Dreams' 등 감각적인 OST는 영화의 정취를 배가시킨다.
낡은 아파트의 창문을 열면 캘리포니아의 햇살이 쏟아질 것 같은 환상을 심어주는 이 음악들은, 지금도 많은 이들에게 90년대 홍콩의 공기를 기억하게 하는 매개체다.
세상의 끝에 서 있는 듯한 불안 속에서도 끝내 새로운 만남을 꿈꾸는 이들의 기록, '중경삼림'. 오늘(4일) 밤, 유통기한 없는 명작의 감동에 젖어보는 것은 어떨까.
잊고 지냈던 청춘의 한 페이지가 다시금 선명하게 되살아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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