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에서 탈출하고 싶어도 못 나가는 기업들

조은진 러시아변호사(법무법인 율촌 모스크바사무소) 2026. 4. 4. 05:00
음성재생 설정 이동 통신망에서 음성 재생 시 데이터 요금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글자 수 10,000자 초과 시 일부만 음성으로 제공합니다.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2026년은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4년째에 접어드는 해다. 전쟁이 장기화되면서 서방국의 대러 제재는 완화될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 이로 인해 러시아에 생산기지를 두고 있는 한국 기업들은 점점 더 어려운 선택의 기로에 놓이고 있다.

문제는 러시아 시장 리스크만이 아니라는 점이다. 많은 기업들이 미국 등 서방 시장에서도 사업을 영위하고 있어, 대러 제재를 무시한 채 러시아 사업을 지속하기는 현실적으로 어렵다. 반대로 공장 가동을 중단하거나 사업을 축소하면 러시아 규제기관의 감독과 개입이라는 또 다른 리스크에 직면하게 된다. 결국 기업은 사업 유지와 철수 사이에서 '이중 압박'에 놓이게 된다.

이러한 상황에서 러시아에 공장 등 자산을 보유한 기업은 철수를 단순한 의사결정으로 접근할 수 없다. 전략 없이 철수를 진행할 경우, 철수 과정 자체가 새로운 리스크로 전환될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유보금이 있는 경우 상황은 더욱 복잡해진다. 

러시아는 자본 통제를 강화하여 해외 송금이 사실상 불가능하며, 자산은 현지에 묶인 채 자금 회수도 어려운 구조가 형성되어 있다.

필자는 삼성전자, LG전자, 현대자동차, KT 등 한국 기업들의 러시아 시장 철수 관련 법률 자문을 수행하면서, 현행 규제가 실무에서 어떻게 적용되는지를 직접 경험해 왔다. 전쟁 장기화와 함께 국내 기업들의 우려가 커지면서, 실제로 러시아 사업을 어떻게 철수해야 하는지에 대한 문의도 크게 증가하고 있는 상황이다.

이제 러시아 사업 철수는 일부 기업의 예외적 선택이 아니라, 많은 기업이 직면한 현실적 과제다. 그러나 실무에서의 철수는 단순한 사업 종료가 아니라, 복합적인 법률·규제 리스크가 결합된 고난도의 프로젝트다.

철수 방식의 선택이 결과를 좌우한다
공장을 보유한 기업에게 현실적인 선택지 중 하나는 공장 및 설비를 제3자에게 임대하는 방식이다. 임대는 법인과 자산을 유지하면서 일정 수준의 현금흐름을 확보할 수 있고, 향후 복귀 가능성도 남겨둘 수 있다는 점에서 유연한 구조다. 다만 장기화될 경우 사실상 매각과 유사한 결과로 이어질 수 있으며, 근로자 승계 문제로 노동 분쟁이 발생할 가능성도 있다.

유보금까지 보유한 기업이라면 자산 매각이 보다 명확한 출구 전략이 될 수 있다. 매각이 완료되면 법적 리스크가 종료되고 자금 회수의 가능성이 열린다. 그러나 현실적으로는 정부 승인, 반독점 심사, 강제적인 가격 할인이라는 구조적 제약이 존재한다. 최근에는 시장가 대비 약 60% 수준의 할인 매각이 일반화되어 있으며, 이와 함께 이른바 '철수세' 성격의 추가 부담까지 발생한다.

더 큰 문제는 매각 이후에도 자금 회수가 쉽지 않다는 점이다. 외환 규제로 인해 해외 송금이 제한되면서, 형식적으로 철수를 완료하더라도 실질적인 회수가 이루어지지 않는 경우가 많다.

셧다운은 단기 대응으로 선택될 수 있는 방식이다. 법인을 유지한 채 생산만 중단할 수 있다는 점에서 유연하지만, 인건비 부담과 고정비 유지, 규제기관 조사 가능성으로 인해 장기적으로는 리스크가 누적된다.

철수보다 더 어려운 것은 '철수 과정'이다
실무에서의 핵심은 철수 방식 자체보다 그 과정에서 발생하는 리스크다. 러시아에서는 철수 과정 자체가 규제 대상이 된다.

가장 먼저 직면하는 것은 세무 리스크다. 사업 중단이나 청산 과정에서 세무당국은 과거 수년간의 거래를 대상으로 집중적인 조사를 실시한다. 자산 처분, 계열사 거래, 해외 송금이 주요 점검 대상이며, 거래의 적정성에 대한 재평가가 이루어질 수 있다.

특히 매각 가격이 시장가격보다 낮다고 판단될 경우 과세표준이 재산정되고 상당한 과태료가 부과될 수 있다. 여기에 외환 규제가 결합되면 자금 이전 자체가 제한되거나, 위반 시 형사책임으로까지 확대될 수 있다.

노동 리스크는 가장 현실적인 '폭탄'이다
사업 철수 과정에서 가장 직접적으로 발생하는 분쟁은 노동 문제다. 러시아 고용감독기관은 해고, 임금, 퇴직금 등 노동관계 전반을 엄격하게 감독 한다.

특히 구조조정이나 집단해고의 경우 절차적 요건이 엄격하게 적용되며, 사전 통지와 보상, 행정기관 협의 여부가 핵심 쟁점이 된다. 생산이 중단된 상태에서도 임금 지급 의무가 발생할 수 있으며, 이를 위반할 경우 즉각적인 제재가 이루어진다.

노동 문제는 단순한 행정 리스크에 그치지 않고 분쟁과 소송, 나아가 형사 리스크로까지 이어질 수 있다는 점에서 특히 주의가 필요하다.

최종 리스크는 '검찰'이다
러시아에서 모든 리스크의 종착점은 검찰이다. 검찰은 기업 활동 전반에 대한 법 준수 여부를 감독하며, 세무·노동·환경 조사 과정에서 위법 정황이 발견될 경우 개입할 수 있다.

특히 자산 매각 과정에서 채권자에게 불이익이발생하거나 거래 구조가 비정상적으로 설계된 경우, '의도적 파산'과 같은 형사 문제로 전환될 수 있다. 임금 체불, 대규모 분쟁, 세무 위반 역시 검찰 개입의 주요 계기가 된다.

초기에는 시정 요구에 그칠 수 있으나, 위반이 확인될 경우 형사 절차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

결론: 철수는 '결정'이 아니라 '설계'다
러시아 사업 철수는 단순한 의사결정이 아니다. 세무, 외환, 노동, 형사 리스크가 동시에 작동하는 복합적인 구조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철수 여부"가 아니라 "철수 방식의 설계"다. 자산 매각 구조, 자금 회수 방식, 인력 정리, 규제 대응까지 모든 요소가 하나의 전략으로 통합되어야 한다.

준비되지 않은 철수는 손실을 확정짓는 결과로 이어진다. 반면 전략적으로 설계된 철수는 리스크를 통제하고 자산을 최대한 회수하는 '관리된 출구 전략'이 될 수 있다.

러시아에서의 철수는 끝이 아니라 또 다른 법적 절차의 시작이다. 그리고 그 결과는 결국 준비의 수준에 따라 달라진다.

조은진 러시아변호사(법무법인 율촌 모스크바사무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