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질서 해체…미국이 뭘 할지 모르는 불확실성의 시대”
■ 1·2차 세계대전의 거울에 비친 2026년
「 강대국들의 패권경쟁과 무력 선호, 경제 위기와 민주주의 후퇴 그리고 권위주의 부상, 국제기구 무력화….
오늘을 읽는 키워드지만, 100년 전에도 유효한 키워드였다. 기존 질서가 무너지며 낯설어진 오늘을 이해하기 위해 과거로 시선을 돌리는 이들이 늘고 있다. ‘100년간의 평화’ 막바지였던 1차 세계대전 직전, 그리고 1·2차 세계대전 사이의 전간기(戰間期) 시기와의 비교다. 세계적 역사학자인 마거릿 맥밀런은 “(양차 대전) 당시 전 세계를 짓눌렀던 개전(開戰)의 공포를 우리가 느끼기 시작했다”고 말했고 투자계의 스티브 잡스로 물리는 레이 달리오는 “1945년 형성된 새 질서가 진화해 1929~1939년 당시와 유사한 지점에 도달했다”고 봤다. 미 국방부전략기획담당 특별보좌관 출신의 할 브랜즈도 “지금의 세계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1930년대와 훨씬 더 닮았다”고 했다.
과연 어느 정도로 유사한 것인가. 역사의 반복(repeat)인가, 비슷한 변주(rhyme)인가. 중앙SUNDAY와 동아시아연구원(EAI)이 4일부터 공동기획 ‘1·2차 대전의 거울에 비친 2026년’을 통해 이 논쟁을 다룬다. ‘100년간의 평화’와 전간기가 왜 비극적으로 귀결됐는지, 오늘날 그 경로를 차단하려면 어떠해야 하는지에 대한 모색이기도 하다. 12명의 전문가가 상호의존부터 패권 경쟁, 극단주의까지 12주제를 탐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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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밀런 옥스퍼드대 명예교수 인터뷰
![세계적 석학인 맥밀런 옥스퍼드대 명예교수. 1차 대전 종전 당시 영국 총리인 데이비드 로이드 조지가 증조부다. [사진 앤더 매킨타이어]](https://img1.daumcdn.net/thumb/R658x0.q70/?fname=https://t1.daumcdn.net/news/202604/04/joongangsunday/20260404010945955wfop.jpg)
지난달 25일 캐나다 토론토에 체류 중인 그와 줌인터뷰를 했다. 그는 “우리는 거대한 전환의 시대에 살고 있다. 트럼프가 물러나고 다른 대통령이 오더라도 관계는 즉각 회복되지 않는다. 깨진 신뢰를 복구하는 건 어렵기 때문”이라며 “지금은 미국이 무엇을 할지 알 수 없다는 불확실성의 시대”라고 말했다. 이어 “우리는 여전히 전쟁이 확산될 위험에 대해 지나치게 안일한(complacent) 듯하다. 늘 얘기하지만 전쟁은 예측 불가하고 어떻게 퍼질 지 모른다”고 했다. 그에게 먼저 1·2차 세계대전 사이의 전간기(Interwar period, 戰間期)부터 물었다.
Q : 가장 우려할만한 유사점은 뭔가.
A : “강대국 간에 긴장 고조와 무력이 목표 달성을 위한 수단이라는 인식이 전간기에 확산했다. 1930년대 일본의 만주 침공과 독일을 전쟁 체제로 바꾼 히틀러의 집권이 그 예다. 또 경제 위기는 국가 간 보호무역주의와 상호 공포를 유발했다. 이는 민주주의에 대한 도전이었고 많은 이들이 정부에 대한 신뢰를 잃었다. 오늘날 우리도 유사한 걸 목격한다. 아울러 1차 대전 직전의 상황도 주목해야 한다.”
Q : 어떤 상황을 뜻하나.
A : “타자를 적으로 간주하는 민족주의가 고조됐다. 프랑스는 독일을 숙적으로 봤고, 독일도 프랑스를 그리 봤다. 독일은 러시아를 두려워했다. 이런 민족적 감정과 공포는 군비 경쟁으로 이어졌다. 군비가 늘면 무력 사용의 유혹도 커진다. 식민지·영토·경제를 둘러싼 경쟁도 치열했다. 1914년 이전과 1930년대 이런 특성들을 오늘날에도 보고 있다.”
Q : 1914년 이전의 사람들은 교역 등 상호의존이 전쟁을 막아줄 것이라고 믿었다.
A : “적어도 지금까진 막지 못한 것 같다. 오늘날 지도자들은 이제야 우리가 얼마나 상호의존적인지를 깨닫기 시작했을 것이다. 중동 전쟁과 호르무즈 해협 폐쇄가 유가와 세계 경제에 미치는 영향만 봐도 알 수 있다. 전쟁은 그러나 일단 시작되면 예측할 수 없다. 감정이나 두려움에 휩싸여 자신에게 합당하지 않은 일도 하게 된다. 1차 대전 이전만 해도 독일과 영국은 서로의 최대 교역국이었는데도 전쟁에 돌입했다.”
A : “1914년의 지도자들처럼 군사력이 모든 것을 해결하고 원하는 바를 이뤄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오늘날 푸틴의 러시아에서 보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 하의 미국 역시 군사력을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으로 여기고 있다. 전쟁은 그러나 일단 시작하면 어디로 튈지 모른다는 위험성이 있다. 당시 강대국들은 모두 단기간 승리를 노린 공격적인 계획을 세웠으나 4년의 참호전을 벌였다. 푸틴은 우크라이나 전쟁이 금방 끝날 줄 알았으나 4년이 흘렀다. 이란 역시 미국의 예상과 다르다. 이게 전쟁의 위험이다. 전쟁은 통제 불능 상태로 치닫기 마련이다.”

Q : 1914년의 철도 시간표가 전쟁의 속도를 강제했다면, 오늘날엔 AI와 드론 체계가 지도자들의 이성적 판단을 앞지르는 ‘자동화된 확전(Automated Escalation)’을 유발하고 있지는 않나.
A : “AI의 위험성은 의사결정권자들에게 즉각적인 결정을 내리도록 압박한다는 점에 있다. 더한 위험은 인간이 통제력을 잃고 AI가 스스로 결정을 내리게 되는 지점이다. AI의 결정이 기계적으로는 합리적일지 몰라도 인간에게 최선의 선택이 아닐 수 있다. 드론의 경우 이토록 중요해질 것이라고 예상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이란과 우크라이나의 사례에서 보듯, 상대적으로 약한 세력이 드론을 활용해 훨씬 강력한 상대를 공격할 수 있게 되었다.”
다시 지도자들 얘기로 돌아왔다.
Q : 트럼프만큼 질서를 해체한 대통령이 있었나.
A : “트럼프가 숭배하는 앤드루 잭슨 정도를 꼽을 수 있겠다. 하지만 트럼프처럼 국제적으로나 국내적으로나 모두 파괴적인 대통령은 찾기 어렵다. 그는 미국의 전통적인 동맹들을 무시하고 미국의 근간을 흔들고 있다. 1945년 이후 미국 대통령은 나토(NATO)와 동맹의 가치를 인정했으나, 트럼프는 이를 미국의 부담으로 여기며 철저히 거래적 관점(Transactional terms)으로만 본다. 미국이 얻는 것이 없다는 그의 시각에 동의하지 않지만, 그것이 그의 입장이다.”
Q : 붕괴하는 국제 질서란 면에서 시진핑과 푸틴을 어떻게 평가하나.
A : “중국은 ‘도광양회’(韜光養晦·빛을 감춰 밖으로 새지 않도록 하면서 은밀하게 힘을 기른다)를 주장했던 덩샤오핑의 말처럼 전쟁은 피하려 할 것이다. 단 대만은 예외다. 필요시 무력으로라도 점령할 준비를 지속해왔다. 푸틴은 전쟁을 택했다. 더군다나 크림반도·조지아·우크라이나에서 1945년 이후 유지된 강력한 국제적 합의, 즉 ‘무력으로 탈취한 영토는 인정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깨뜨렸는데, 이건 아주 나쁜 선례가 될 수 있다. 세계엔 ‘이곳은 실제론 내 영토’라고 할 만한 곳이 아주 많다. 다른 이들도 따라하려 할 것이다.”
Q : 미국이 현 질서를 유지할 의지가 없다면 어떤 대안이 있나. 자유민주주의 질서를 대체할 대안이 있나.
A : “‘세력권(Spheres of Influence)’의 부활이 언급된다. 트럼프가 언급하는 먼로 독트린처럼 미국은 서반구, 중국은 동아시아, 러시아는 유라시아를 지배한다는 구도다. 유럽연합은 발 붙일 곳이 없어지고 호주 같은 나라들은 고립된 처지가 된다. 이미 이런 현상이 나타나고 있는 것 같다. 본질적으로 대단히 불안정한 체제라 매우 나쁘다고 본다. 특정 세력권 내 국가가 거기에 머무는 걸 달가워하지 않을 가능성이 있고 세력권 간 서로 충돌하며 그 경계선에선 늘 마찰이 발생한다. 의미는 다소 다른데, 세력균형(balance of power)의 경우 국가 간 서로 간 균형을 맞추는 것이다. 이 역시 불안정하다. 일부 국가는 편을 바꿀 것이고 일부는 균형을 무너뜨리려할 것이기 때문이다. 1차 대전 전 유럽이 일종의 세력균형이었으나 전쟁을 막진 못했다. 한 세력이 지배하는 패권(Hegemon)도 대안이 될 수 있겠지만, 중국이 그 역할을 맡으려 할지, 그리고 다른 국가들이 이를 수용할지는 의문이다. 마크 카니 캐나다 총리가 제안했듯, 규칙을 믿는 민주주의 국가들과 중견국들이 연대하는 것이 대안이 될 수 있다. EU·일본·한국·캐나다·호주 등인데, 국제 질서의 붕괴로 가장 큰 타격을 입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들이 단결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과제일 것이다.”
Q : 최근 한·일 관계가 개선되고 있다.
A : “흥미로운 소식이다. 한국은 미국이 태평양에서 후퇴하고 중국이 이웃을 위협하는 상황에 직면해 있다. 북한이라는 직접적인 위협도 있다. (일본과) 갈등 요소가 많지만 역사적, 문화적 유대감이 깊고 무역 관계도 오래되었다. 과거 큐슈의 후쿠오카에서 한국의 강한 영향력을 느꼈던 기억이 난다. 베트남이나 대만처럼 기존의 당연했던 것들을 더 이상 당연하게 받아들일 수 없게 된 국가들이 자신의 위치를 고민해야 할 시점이다.”
맥밀런 교수와는 12년 전 옥스퍼드에서 만났다. 1차 세계대전 발발 100년이 계기였다. 당시 그는 “한국의 운명은 중국의 의도를 걱정하는 것”이라고 했다. 여전히 유효한지 묻자 이렇게 답했다. “권력이 시진핑 한 사람에게 집중되어 있어 내부 논의를 알기 어렵다는 점이 문제다. 그는 대만 통일 의지를 명확히 했다. 한국에 대한 그의 입장은 명확하지 않다. 중국 입장에서 북한은 골칫거리다. 핵무기를 가졌으면서도 중국의 말을 듣지 않기 때문이다. 중국 정부는 북한 정권의 붕괴로 수백만 명의 난민이 유입되는 것을 우려하여 조심스럽게 접근하고 있다. 하지만 시진핑이 무엇을 원하는지 외부엔 여전히 불투명하다.”
고정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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