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 첫 여성 장관, 대통령 오른팔, 중앙대 설립자… 여걸의 난국 돌파법
[전봉관의 해방 거리를 걷다]
검찰 중립 논쟁 불러온
임영신 장관 독직 사건

1948년 10월 안동 을(乙)구 국회의원 정현모가 경상북도 도지사로 임명돼 사임하면서 이듬해 1월 13일 보궐선거가 치러졌다. 9명의 후보가 출마한 경북 안동 을구 국회의원 보선에서 초대 외무부 장관을 역임한 경북 칠곡 출신 장택상 후보, 안동 지역 유지 권중순 후보와 치열한 득표전 끝에 당선된 인물은 뜻밖에도 전북 금산(1963년 충청남도로 이관) 출신 현직 상공부 장관 임영신 후보였다. 당선 첫 일성은 당차고 도발적이었다.
“안동은 완고하고 배타적인 곳이요, 여성을 멸시하는 풍속이 아직도 남아 있는 곳이나, 나의 당선으로 이와 같은 고풍은 완전히 타파된 셈이다.”
이로써 대한민국을 넘어 아시아 최초의 여성 장관이었던 임영신은 제헌의회 유일의 여성 의원이라는 또 다른 기록을 남겼다. 중앙대학 학장직까지 유지해 ‘1인 3역’을 수행했다.
1899년 전북 금산에서 12남매 중 다섯째로 태어난 임영신은 전주 기전여학교를 졸업하고 소학교 교사로 근무하던 중 3·1운동 관련 혐의로 징역 6개월 집행유예 3년형을 선고받았다. 남캘리포니아대학(USC)에서 학사·석사학위를 취득했고, 미국 유학 시절 식모, 보모, 농장 일, 자동차 운전, 주유소 경영 등으로 모은 돈으로 1933년 귀국 후 경영난에 처한 중앙보육학교를 인수해 이후 중앙대학교로 키워냈다.
임영신은 미국 유학 시절부터 이승만의 독립운동을 헌신적으로 지원한 측근이자 동지였다. 사석에서 이승만을 ‘파파’라 부를 만큼 가까운 사이였다. 해방 이후 조선여자국민당을 조직해 당수로 추대됐고, 이승만이 귀국한 이후에는 미국으로 건너가 이승만을 대신해 미국 정부와 유엔을 상대로 대한민국 정부 수립을 위한 ‘비공식 외교’ 활동에 주력했다.

초대 내각 인선 과정에서 임영신은 유력한 문교부 장관 후보로 하마평에 올랐다. 국무총리 인선이 난항을 겪을 때는 국무총리 후보로도 거론됐다. 그러나 2년 동안 미국에서 활동하던 임영신을 급히 귀국시켜 이승만이 제안한 자리는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상공부 장관직이었다. 평생 여성운동가이자 교육자로 살아온 임영신 자신조차 납득하기 어려운 인선이었다. 이 대통령은 미국의 원조 물자 분배와 귀속재산 처리를 담당할 부서를 자신이 가장 신뢰할 수 있는 사람에게 맡기고 싶다고 임영신을 설득했다.
임영신은 대통령에 이어 ‘권력의 제2인자’라고 불릴 정도로 실세 장관이었다. 그런 그가 국회의원까지 겸직하게 되니 야당 격이었던 한민당과 사정 기관의 철저한 검증이 이어졌다. 한민당은 ‘국무위원이 현직을 유지한 상태에서 국회의원에 입후보할 수 있는지’ 적법성을 따졌다. ‘선거법’ 제4조 “관공리는 재직 중 국회의원을 겸할 수 없음. 단 정무관은 예외로 함”이라는 조항에 어긋나지는 않지만, 제29조 2항 “…기타 일반공무원은 선거운동을 할 수 없음”이라는 규정에 따라 ‘국무위원이 자기 선거에 선거운동을 한 것이 불법이 아닌지’ 문제 삼았다. 국회 본회의에 출석한 선거위원회 노진설 위원장은 “정무관은 일반공무원이 아니므로 선거운동을 할 수 있다”고 일축했다.
3월 31일 감찰위원회(감사원의 전신)는 임영신 장관의 보궐선거 기간 불법 선거 행위와 상공부 장관으로서 비위를 조사해 ‘파면 결정’을 내리고, 검찰에 고발했다. 임영신 장관은 ‘석명서(釋明書)’를 발표하고 결백을 주장하며 ‘파면 결의 취소 청구 행정소송’을 제기했다. 이 대통령도 ‘감찰위원회에서 파면 결의는 월권이며 법원의 판결 전까지 파면을 보류한다’는 담화를 발표했다.
4월 4일 검찰 수사가 시작되자, 임영신의 여동생이자 보궐선거 당시 선거 사무장이었던 임영선이 구속됐다. 상공부와 경북 도청 공무원, 귀속재산 기업체 임직원 등 10여 명이 잇따라 구속됐다. 이 대통령이 이인 법무부 장관을 통해 검찰에 임영신을 기소하지 말고 정치적으로 해결하라고 지시했지만, 5월 28일 최대교 서울지검장은 대통령과 법무부 장관의 뜻을 거스르고 임영신을 불구속 기소했다. 기소된 임영신의 혐의는 보궐선거 선거 비용 충당을 위한 공금 유용, 기업체로부터 금품 모금, 유권자에게 향응 제공 등 선거법 위반 행위, 통제 물자를 선거운동에 도움을 준 인사에게 특혜 배정, 이승만 대통령 75회 ‘탄신일’ 기념 선물 명목으로 산하 기관과 기업으로부터 금품 모금 등 11가지였다. 앞서 감찰위원회가 파면 결정을 내린 사유와 대동소이했다.
임영신이 기소되자 이 대통령은 더 이상 감싸지 못하고 임영신을 상공부 장관에서 경질했다. 같은 날 이인 법무부 장관은 “검찰을 대통령과 법무부 장관의 뜻대로 절제시키지 못한 책임을 진다”고 사임했다. 임영신에 대한 감찰을 주도한 정인보 감찰위원장과 여성 정치인 박순천 감찰위원도 대통령으로부터 “집에 가서 몇 달 쉬라”는 말을 듣고 사직했다.
현직 국무위원 겸 국회의원이 기소되자, 김병로 대법원장은 서울지방법원장 한격만을 재판장, 민동식·사광욱 부장판사를 배석으로 특별재판부를 구성했다. 심리를 공정하게 진행하겠다는 대법원장의 의지였지만, 법원의 수장이 정권의 외압에 굴복한 것으로 해석하는 사람도 있었다. 공판이 개시되자 피고인들은 검찰에서의 진술을 모두 뒤집고 임영신 장관의 범죄 관련성을 전면 부인했다. 1949년 9월, 1심 선고공판에서 18명 피고인 중 임영신을 포함한 9명 무죄, 나머지 9명은 유죄가 선고됐다. 그마저도 1명을 제외하고는 모두 집행유예인 솜방망이 처벌이었다. 1951년 9월, 대법원은 임영신의 무죄를 확정했다.
검찰의 논고와는 너무 다른 1심 판결 뒤 담당 검사들이 줄지어 사직했다. 대부분 사직이 반려됐지만, 서울지검장 최대교와 주임검사 강석복의 사직은 수리됐다. 강석복은 훗날 “경무대가 불온사상을 가진 적색분자라고 비난하며 사표를 강요해 부득이 사직했다”고 회고했다. 이후 최대교는 정치적 외압에 굴하지 않는 참된 검사의 사표로 추앙받았다.
1950년 5·30 국회의원 총선거에 임영신은 고향인 금산에서 출마했다. 14명이 입후보한 가운데, 임영신은 훗날 야당 거물 정치인으로 성장하게 될 유진산을 누르고 당선돼 정치적으로 명예를 회복했다. 임영신은 경상도와 전라도에서 번갈아 당선된 유일한 국회의원이라는 또 하나의 기록을 세웠다. 임영신의 신조인 “의(義)에 죽고, 참에 살자”는 지금도 중앙대학교의 교훈으로 이어진다.
<참고 문헌>
김이조, ‘법조비화 100선’, 고시연구사, 1997
김인식, ‘임영신 독직 사건의 발단 경위’, 한국민족운동사연구 제103집, 2020
문준영, ‘검찰 중립과 화강 최대교’, 법학연구 제25집, 2007
법률신문사편, ‘법조 50년 야사’, 법률신문사, 2002
Copyright © 조선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이정후, 18경기 연속 안타 마감 후 2경기 침묵
- 작년 고용보험기금 지출 20조원 돌파…실업급여는 사실상 ‘빚’으로 버텨
- 경총 “최저임금 업종별 차등 적용해야...숙박·음식점업 감당 못해"
- [김지호 기자의 월드컷!] 한국인이여, 형제여, 이제 너는 멕시코인이다
- 2달 연속 美 주식 순매도했던 서학개미, 다시 미국으로…‘속슬(SOXL)’마이크론·브로드컴 담았
- 뉴욕 닉스, 53년 만에 NBA 챔피언 등극...5차전 45득점 브런슨 MVP
- 美·이란 종전 기대감에 국제 유가 80달러대 안착, 브렌트유는 석 달 만에 최저치
- 월드컵 첫 출전 ‘카리브해 돌풍’ 아이티, 유럽 빅리거 즐비한 스코틀랜드 몰아치고도 0대1 석
- ICT 수출액 역대 최고...반도체 수출 증가율 169%
- 2차 국민성장펀드, 6000억원 규모로 3분기 중 출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