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이 복원한 클레오파트라의 향수, 후각으로 떠나는 시간여행
[이영완의 딥사이언스]
‘잊힌 향기’ 되살리는 첨단 과학
시공간의 벽 넘는 프루스트 현상

봄은 장범준의 노래 ‘벚꽃엔딩’으로 시작된다. 봄바람 휘날리며 흩날리는 벚꽃잎이 울려 퍼질 거리를 둘이 걷는다. 하지만 늘 그렇듯 사랑도 변한다. 이제는 ‘흔들리는 꽃들 속에서 네 샴푸 향이 느껴진 거야’의 시간이다. 늘 뒤돌아보지만, 그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향기의 추억만 뇌에 새겨졌다.
과학자들은 후각이 가장 원시적인 감각이라고 말한다. 감각 정보를 처리하는 시상을 거치지 않고 감정·기억을 담당하는 편도체, 해마와 직접 연결된다. 후각이 불러일으키는 기억이 생생하고 감정을 흔드는 것도 그 때문이다. 코끝을 스치고 지나간 샴푸 향은 옛사랑을 떠올리게 하고, 구수한 청국장 냄새는 어머니를 그리게 한다.
향기가 기억을 되살리는 것을 ‘프루스트 현상’이라고 한다. 프랑스 작가 마르셀 프루스트는 어느 겨울날 홍차에 마들렌 과자를 적셔 한입 베어 문 순간, 어릴 적 고향에서 맛보았던 마들렌의 향기를 떠올렸다. 프루스트의 머리에 펼쳐진 고향의 기억은 그의 대표작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탄생시켰다.
이제 과학은 기억에도 없는 까마득한 시간의 향기까지 재현하고 있다. 잊힌 시간의 향기를 복원해 후각의 시간 여행을 구현하고 있다. 고대 이집트의 미라에서 나오는 향기나 클레오파트라가 로마의 장군 안토니우스를 유혹할 때 뿌렸던 향수가 과학의 힘으로 재현됐다. 5000년 전 사람들이 마셨던 맥주와 하와이에서 멸종한 꽃의 향기도 마찬가지다. 프루스트 현상이 시공간의 장벽을 넘고 있다.
이집트의 香 복원한 생체 분자 고고학
독일 막스플랑크연구소의 바바라 후버 박사는 지난 2022년 국제 학술지 ‘네이처 인간행동’에 옛 향기를 찾는 생체 분자 고고학 기법을 제안했다. 유적지에서 나온 토기나 미라를 감싼 천, 심지어 미라의 치석에서 극미량의 유기화합물을 채취한다. 고대인이 사용한 향신료나 기름의 흔적을 찾는 것이다.
다음은 기체 성분을 분석하는 가스크로마토그래피로 화학적 지문을 찾는 과정이다. 유기화합물을 가열해 기체로 만든 뒤 특수 제작된 긴 관으로 통과시킨다. 화합물을 이루는 성분들은 분자량과 화학적 성질에 따라 이동 속도가 달라 분리된다. 이렇게 분리된 각 분자에 전자빔을 쏴 조각으로 만들고 질량을 측정한다.
질량 패턴은 인간의 지문(指紋)처럼 물질마다 다르다. 이를 당시 인류가 사용한 물질을 목록화한 데이터베이스와 대조해 성분을 분석한다. 예를 들어 특정 시료에서 세드롤이 검출됐다면 삼나무가 사용됐다는 의미이고, 시나믹 알데하이드가 나오면 계피가 포함됐다고 볼 수 있다. 시료를 채취한 유적지에서 나온 꽃가루 분석 결과와 결합하면 단순히 어떤 향이 있다는 것을 넘어 어떤 식물을 어떤 비율로 섞었는지도 알 수 있다.
후버 박사는 이듬해 ‘사이언티픽 리포트’에 생체 분자 고고학으로 기원전 15세기 이집트 미라를 만들 때 사용한 방부제의 향기를 복원했다고 발표했다. 제18왕조의 유모였던 귀족 여성 세네트네이의 장기 보관 단지에서는 예상과 달리 갓 칠한 도로 포장재와 숲의 향이 섞인 듯한 오묘한 향기가 났다. 살균을 위해 타르 성분과 짙은 수지 향이 섞인 것이다.

놀랍게도 이집트 단지에서 나온 수지는 동남아시아나 히말라야 지역에서만 나오는 것이었다. 향기를 통해 고대 이집트의 교역 경로까지 밝힌 것이다. 후버 박사가 복원한 향기는 덴마크 묘스가르드 박물관에 전시된 장기 단지와 함께 제공된다. 관람객은 미라 방부제가 적셔진 종이 카드 향기를 맡으며 고대 이집트로 가는 후각 시간여행을 할 수 있다.
미국 하와이대 연구진도 같은 방법으로 클레오파트라가 썼을 것으로 추정되는 향수를 복원했다. 기원전 300년 이집트 향수 공장 유적지에서 나온 항아리에 남은 물질을 분석했다. 고대 문헌과 대조한 결과 당시 향수는 수지 성분인 몰약을 토대로 해서 계피, 향신료 카다멈, 올리브유를 섞어 만든 것으로 확인됐다. 오늘날 향수는 알코올 기반이라 향이 쉽게 날아가지만, 이집트 향수는 걸쭉한 기름 형태로 강렬하고 매운 향이 오래갔다.
후각 기록도 문화유산으로 인정받아
영국 유니버시티 칼리지 런던(UCL)은 3월 26일부터 대학 설립 200주년 기념 전시회를 열었다. 마티야 스트르리치 교수와 세실리아 벰비브레 박사 연구진은 이 전시회에 런던 세인트 폴 대성당 도서관의 향기를 발표했다. 이 도서관에는 12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고서들이 쌓여 있다. 두 사람은 고서에서 나오는 퀴퀴하면서도 달콤한 향기를 복원했다.

UCL 연구진은 책에서 나오는 향기 성분을 채취하고 가스크로마토그래피로 분석했다. 동시에 향기 감별사 7명을 도서관으로 초대해 형용사 21가지로 향기를 설명하라고 부탁했다. 사람들이 향기를 묘사한 단어는 고서의 종이 상태를 파악하는 데 도움이 된다. 부패로 산도가 높아진 종이는 더 달콤한 향기를 내고, 안정된 종이는 건초 냄새가 더 나기 때문이다. 연구진은 이번 전시회에 고(故) 엘리자베스 여왕이 타던 차량 내부 향기도 복원해 전시했다.
과학자들은 생체 분자 고고학이 박물관의 전시 개념을 바꿀 수 있다고 본다. 시각과 후각이 결합하면 몰입도를 한층 높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 유럽연합(EU)은 유럽의 후각 유산을 집대성하는 ‘오데유로파’ 프로젝트를 2023년까지 3년간 진행했다.
유럽 과학자들은 1600년대부터 1920년대까지 후각 관련 문서 약 22만건과 시각 자료 약 4700건을 수집했다. 인공지능(AI)은 이 정보를 바탕으로 과거의 향기를 복원할 레시피를 제시한다. 그 향기가 상상에만 있었어도 유산으로 인정받았다. 과학자들은 16세기 교회 설교에서 유황불과 개 수백만 마리가 죽은 냄새로 묘사된 지옥의 향기까지 재현했다.
오데유로파 연구는 일본에서 아이디어를 얻었다. 2001년 일본 환경성은 나가사키현의 노모자키 수선화 공원의 꽃향기와 오카야마현의 달콤한 백도부터 오사카의 재일교포 밀집지역인 츠루하시의 한국 음식 향기까지 일본을 대표하는 향기 100가지를 발표했다. 이제 후각 자산이 문화유산으로 대우받는 것이다.
멸종한 꽃향기도 첨단 생물학으로 부활
향기의 기억을 되살리는 데 생명과학도 한몫했다. 미국 보스턴의 바이오 기업인 깅코 바이오웍스는 첨단 생명공학을 이용해 1912년 하와이 마우이에서 멸종한 꽃의 향기를 담은 향수를 개발했다. 이 회사는 2009년 설립된 합성생물학 전문 기업이다. 합성생물학이란 생명체의 유전자를 변형해 특정 물질의 생산에 최적화시키는 연구 분야다.

멸종한 꽃향기를 복원하는 과정은 영화에서 공룡을 되살린 방법과 흡사하다. 영화에서는 호박(琥珀)에 갇힌 공룡시대 모기의 피에서 공룡 DNA를 추출했다. 이 DNA를 개구리 DNA와 합쳐 공룡을 탄생시켰다. 깅코사는 과학관에 남은 멸종 식물의 마른 표본에서 DNA를 추출한 다음, 그 안에서 향기를 만드는 유전자를 찾아냈다. 이를 효모균에 넣어 향기 물질을 대량 생산했다.
효모는 맥주를 발효시키는 미생물이다. 과학자들은 효모로 고대 맥주의 향까지 복원했다. 2019년 이스라엘 과학자들은 5000년 전 유적지에서 발굴한 그릇 조각에서 휴면 상태였던 효모 6종을 분리해 맥주를 만들었다. 과거 술을 빚었던 미생물을 깨워 옛 맥주의 향기를 재현한 것이다. 이전에도 과거 맥주를 재현한 적이 있지만 화학적 모방에 그쳤다.

앞서 미국 펜실베이니아대의 패트릭 맥거번 교수는 기원전 8세기 미다스 왕이 마신 맥주를 재현했다. 미다스 왕은 그리스 신화에서 손만 대면 모두 황금으로 변한다고 기록된 인물이다. 미다스 왕의 맥주는 무덤에서 나온 청동기에 남은 물질을 분석해 당시 맥주에 들어간 성분을 찾았지만, 발효를 한 효모는 현재 것이었다.
이제 우리도 한국의 후각 유산을 박물관에 접목할 때가 되지 않았을까. 최근 국립중앙박물관이 외국인이 반드시 찾아야 할 명소로 떠올랐다. 한국을 배경으로 한 넷플릭스 애니메이션 ‘케이팝 데몬 헌터스’가 선풍적인 인기를 끌면서 박물관의 인기로 이어졌다. 무령왕릉의 1500년 전 사후세계나 대장금의 손길이 담긴 조선 왕실의 잔칫상 향기라면 복원할 가치가 충분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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