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심에 킥복싱 하고 올까? 낮 12시, 직장인이 바빠졌다
‘점심형 인간’의 新풍속
골든 타임 된 런치 타임

점심시간에 밥집 대신 찾은 곳은 킥복싱 도장이었다. 지난달 31일 IT 기업이 밀집한 경기도 분당구 정자동, 회사원 김선주(44)씨는 스트레스를 제압하듯 오전 11시 50분부터 샌드백에 퍽퍽 하이킥을 꽂는 중이었다. “오래 앉아 일하는 직종이다 보니 잠깐이라도 격렬히 땀을 내는 게 오후 활력에 도움이 되더라”며 “밥 먹고 늘어져 있기 싫어 식사는 운동 후 샐러드로 간단히 해결한다”고 말했다.
낮 12시가 되자 인원이 열 명에 달했다. 줄넘기를 하고, 곰걸음으로 바닥을 기고, 쉼 없는 발차기 훈련이 이어졌다. 도중에 “미팅이 잡혔다”며 한 여성이 급히 탈의실로 뛰어갔다. 겨우 30분 지났을 뿐인데 땀범벅이었다. 무에타이 의상까지 챙겨와 분주히 발을 놀리던 회사원 남상욱(40)씨는 “퇴근하면 시간도 늦고 가정을 돌봐야 하는 등의 현실적 과제가 또 있지 않느냐”며 “짧지만 자유가 확실히 보장되는 점심시간을 어떻게든 알차게 쓰고 싶었다”고 말했다. 점심시간에 가장 부지런해지는 ‘점심형 인간’의 시대.
◇아침은 빠듯, 저녁엔 쉴래요

대개 정오부터 오후 1시까지 고정된 자유 시간, 밥 먹고 커피 마시고 잠깐 수다 떨면 사라져버리는 시간, 달라지고 있다. 아깝기 때문이다. 몸은 얼추 풀렸고 에너지도 충분하다. 인근 사무직을 겨냥해 50분짜리 ‘런치 타임 킥복싱’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안준형 분당킥복싱무에타이 관장은 “최근에는 점심 회원이 저녁 회원 숫자와 비슷해졌고 남녀 성비도 6대4 정도로 차이가 크지 않다”며 “시간 효율을 중시하는 분들이 늘다 보니 점심시간이 하루 중 가장 액티브한 시간대가 됐다”고 말했다.
제약은 때로 능률을 낳는다. 1시간이라는 제한 시간이 압축적 생산성을 유도하는 것이다. 운동화로 갈아신고 공원을 도는 ‘산책족’을 넘어 적극적 ‘운동권’이 급증한 배경. 고강도 신체 활동의 특성상 운동을 마친 뒤에도 한동안 체지방 연소가 계속되는 애프터번(After Burn) 효과도 기대할 수 있다. 햄스트링 부상에도 식당 대신 체육관을 택한 직장인 전형진(40)씨는 “가방에 테니스 라켓을 꽂고 와 점심시간마다 공을 치는 동료도 있다”며 “회사마다 다를 수 있지만 ‘혼밥’ 등 자율적인 점심 문화가 정착되면서 12시의 다양한 활용이 가능해진 것 같다”고 말했다.
◇‘쿠킹 클래스’로 끼니 해결

골든 타임이 된 런치 타임. 자기 계발과 식사를 한 번에 해결할 수도 있다. 지난 1일 서울 사직동 쿠킹 클래스 교우당에서 ‘직장인을 위한 브런치’ 수업이 열렸다. 이날의 메뉴는 태국식 쌀국수. “라면처럼 쉽게 끓이는 비법을 알려 드릴게요.” 특이한 건 먼저 먹고 배운다는 점. 시간이 촉박한 데다 모름지기 금강산도 식후경(食後景)이기 때문이다. 강사가 요리를 시연하며 10분 만에 뚝딱 한 그릇씩 나눠줬다. 서둘러 국물을 들이켠 수강생들이 탄성을 터뜨리자 강사는 “이제 다시 천천히 요리하면서 노하우를 공유하겠다”고 말했다.
지난달 정식 오픈해 막국수·떡볶이 등 지금껏 다섯 차례 브런치 수업을 연 교우당 조선영 대표는 “직장인들이 매일 하는 고민이 ‘오늘 뭐 먹지’인 만큼 이런 수업이 있으면 좋겠다는 의견이 많았다”며 “수요가 확인돼 다음 주부터 매일 정규 수업으로 편성했다”고 말했다. 해당 수업 최다 참가자인 회사원 황정원(42)씨는 “아이를 키우다 보니 나만의 시간은 사실상 점심뿐”이라며 “맛집 앞에서 웨이팅하느라 시간 날리는 대신 배도 채우고 꿀팁도 전수받아 일석이조”라고 말했다. 옆에 있던 임보희(36)씨는 “1시간 내에 될까 싶었는데 충분해 놀랐다”고 말했다. 끝나니 12시 45분이었다.
◇회사에서 ‘런치 요가’

백화점 문화센터 등에서도 ‘점심 메뉴’ 개발이 활발하다. 현대백화점 CH 1985에서 오전 11시 50분 진행하는 ‘직장인을 위한 런치 힐링 요가’는 스테디셀러로 자리 잡았고, 이달 초 직장인 대상 필라테스 수업을 개설한 강남구청 등 지자체 문화센터로도 확장하는 추세다. 종목도 넓어지고 있다. 올해부터 인근 수영장 점심 자유 수영에 다니기 시작했다는 한 직장인은 “할까 말까 엄청 고민하다가 용기 내서 30분만 해봤는데 너무 만족스럽다”며 “어지러웠던 오전 업무가 머리에서 정리되고 반차 내고 놀러 온 느낌까지 든다”고 했다.
회사 측이 먼저 판을 깔아주기도 한다. 출강 업체를 통해 사무실에서 ‘오피스 요가’ 등을 진행하는 경우도 늘고 있다. 온라인 중고 거래 회사 번개장터는 직원들에게 점심시간대를 이용해 일대일 신체 교정 테라피를 제공한다. “장시간 모니터 앞에서 일하다 보니 거북목·허리 통증 등에 대한 호소가 있어 회사 내에서 리프레시할 수 있는 환경을 고민했다”고 한다. 기업별 웰니스 서비스 제공 업체 달램 관계자는 “오후 업무 몰입을 위한 전략적 리셋 타임이 조직 운영 효율을 높인다는 공감대가 커지고 있다”며 “도입 신청 건수가 매년 증가세”라고 말했다.
◇미술관이 점심을 준다?

정신적 이완은 예술로도 가능하다. 서울 진관동 사비나미술관은 ‘아트 브런치’ 프로그램을 마련했다. 미술관 내 카페에서 간단히 식사하고 큐레이터와 함께 전시를 감상하는 것이다. 서울시립미술관에서는 아예 작가를 초청해 오전 11시 30분부터 오후 1시까지 관람객과 함께 대화·식사하는 ‘예술가의 런치 박스’를 운영한다. 이를테면 달걀에 안료를 섞은 전통 에그 템페라(Egg Tempera)로 작업하는 화가 이은경과의 최근 행사에서는 계란 흰자로 만든 수플레 팬케이크 등이 제공됐다.
퇴근하면 문 닫는 미술관, 그래서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은 ‘아트 앤 런치’를 준비했다. 12시부터 1시까지 도시락과 함께 하는 미술 강연이다. 오는 8일부터 상반기에만 5회 예정돼 있다. 미술관 관계자는 “바쁜 직장인과 미술관의 심리적 거리를 좁히려는 취지로 기획한 행사”라며 “전회 무료로 진행한다”고 말했다. 정원 50명, 첫회는 일찌감치 마감됐다.
◇채웠으면 비워내야…

점심시간을 완전 연소시키는 ‘K근면’은 그러나 불완전 퇴근의 이면이기도 하다. 최근 직장인 1000명을 대상으로 진행된 한 설문조사 결과 “퇴근 이후 및 휴일에도 업무 연락을 받는다”고 답한 비율이 66%였다. 근무 시간 외에 업무상 연락을 금지하는 일명 ‘퇴근 후 카톡 금지법’의 연내 입법이 추진되고 있다. 갤럽이 발표한 ‘2025 글로벌 업무 환경 현황’ 보고서에 따르면, 한국인이 매일 직장에서 겪는 분노(Daily Anger) 수치는 동아시아 국가 중 1위였다. 한 회사원은 “솔직히 낮잠이라도 자고 싶지만 조금이라도 잘살고 싶어 힘을 쥐어짜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리하여 서울 종로에 있는 사찰 조계사에서는 평일마다 인근 직장인을 대상으로 ‘점심 먹고 명상 어때?’가 열린다. 12시 20분부터 40분까지. 월요일이었던 지난달 30일, 요가 매트가 깔린 작은 방에 직장인 여덟 명이 모였다. 성해 스님이 “최고로 편안한 상태로 누워주세요”라고 말했다. 보일러 덕에 방이 뜨뜻해 금세 노곤해졌다. “누워서 호흡에만 집중해보세요. 분노, 슬픔, 내려놓아야 할 것들을 호흡과 함께 내보내 봅니다. 잠이 와도 괜찮습니다. 잠이 왔었구나, 깨닫고 다시 돌아오면 됩니다.” 회사원 권지운(32)씨는 “직장 동료의 소개로 처음 와봤는데 월요일이라 찌뿌둥한 몸과 마음이 편안해졌다”고 말했다.
집중 회복 뒤, 그들은 다시 업무 전선으로 복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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