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정명 못한 제주4.3에 보내는 위로 ‘내 이름은’
눈부신 봄날, 가슴 깊이 묻어둔 아픔 되찾아가는 여정

흐릿한 잔상으로 남은 기억을 찾기 위해 제주 곳곳을 누비다가 마주한 보리밭. 그곳에 도착한 뒤 기억은 선명해져 아팠다. 78년이 흐른 지금도 보리밭은 그때를 기억하고 있었다.
그곳에서 한풀이 몸짓을 하고 나서야 '내 이름'을 제대로 마주할 수 있게 됐다. 잃어버린 78년, 긴 겨울을 지나 마주한 이름 제주4.3이다.
제78주년 제주4.3희생자추념식이 거행된 3일 오후, 4.3을 다룬 정지영 감독의 상업영화 '내 이름은' 시사회가 CGV제주에서 열렸다. 지난해 4월 3일 크랭크인한 작품이 1년 만에 돌아온 것이다.
이날 제주에서 처음 열린 시사회에는 정지영 감독과 이번 영화에서 주연을 맡은 배우 염혜란, 그리고 이번 영화가 첫 영화라는 배우 신우빈이 함께했다. 염혜란 배우는 이날 수준급 제주어 구사 능력으로 관객들의 뜨거운 칭찬을 받기도 했다.
영화 '내 이름은'은 제주4.3평화재단과 제주국제자유도시개발센터(JDC)가 공동으로 주최한 4.3영화 시나리오 공모전 당선작을 토대로 제작됐다. 정 감독은 시나리오를 1년 6개월간 다듬으며 완성도를 높였고 그사이 펀딩으로 제작비도 모집했다.


영화 포스터에 나타난 것처럼 보리밭 춤사위로 시작되는 영화는 아직 완전히 해결하지 못한 제주4.3의 과제들을 압축적으로 담아냈다. 나아가 국가폭력과 트라우마, 회복과 연대의 힘을 보여준다.
하지만 영화에서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하는 것은 '내 이름은'이다. 주인공은 지워져 있던 어린 시절의 파편들을 하나둘 맞춰나가며 선명해진 '내 이름'을 마주한다.
기억조차 버거운 아픈 과거를 마주하고서야 되찾을 수 있었던 내 이름, 백비(白碑)가 되어 누워있을 수밖에 없는 제주4.3의 온전한 이름을 찾아가는 여정이었다.
영화는 현재 시점에서 1998년 봄, 그리고 1949년의 봄으로 되돌아가는 형식을 갖췄다. 현재에서 과거로 돌아가는 과정을 통해 '내 이름은'이라는 질문을 관객에게 계속해서 던진다. 가장 아픈 비밀에서 가장 찬란한 진실이 된 '내 이름은'이다.
1998년의 봄, 촌스러운 이름이 인생 최대의 콤플렉스인 18세 소년 '영옥'은 어쩌다 서울에서 온 전학생의 눈에 들어 난생처음 완장을 차게 된다. 그러나 결국 꼭두각시로 전락해 교실 안의 폭력을 방관하고 만다.
이런 손자뻘인 아들 영옥을 홀로 억척스레 키워낸 어머니 정순에게는 지독하게 아팠던 1949년의 봄이 다시 찾아온다. 의사의 도움을 받아 까맣게 지워져 있던 어린 시절의 파편들을 하나둘 맞춰 나가며 반세기 넘게 가슴 깊이 묻어둔 그날의 슬픈 약속을 기억해낸다.


영화는 해외에서 먼저 눈도장을 찍었다. 세계 3대 영화제 중 하나인 독일 베를린국제영화제는 제76회 베를린국제영화제 포럼 부문에 '내 이름은'을 공식 초청했다. 이에 지난 2월 중순께 독일 베를린의 한 극장에서는 월드 프리미어 상영으로 영화가 최초 공개, 호평을 받았다.
이날 제주 시사회에서도 영화가 끝난 뒤 박수갈채가 이어지는 등 관객들의 뜨거운 반응이 이어졌다. 영화 중간에는 눈물을 흘리거나 훌쩍이는 모습도 보였다. 특히 엔딩 크레딧에 걸린 후원자들의 이름은 연대의 힘을 다시금 느끼게 했다.
임문철 4.3평화재단 이사장은 "4.3운동하는 분들은 이런 영화를 오랫동안 기다려왔다"고 말했다. 송석언 JDC 이사장 역시 "무겁고 어려웠던 4.3의 이야기가 이제는 더 많이 나와야 한다. 이 영화가 4.3을 중심으로 하는 대중 영화의 시발점이 되길 바란다"고 강조했다.
영화 상영이 끝난 뒤 진행된 관객과의 대화(GV)에서 정 감독은 영화의 메시지에 대해 "어떤 메시지를 전하는 것인지는 감독이 말해서는 안 된다. 관객들이 그것을 찾아 먹어야 한다"라면서 영화 제목인 '내 이름은'에 대한 의미를 설명했다.
정 감독은 "4.3 시나리오 당선작 제목이 '내 이름은'이었다. 나는 여기서 4.3평화재단에 누워있는 백비를 떠올렸다. 아직도 이름을 못 찾은 4.3이다"라며 "이 영화가 4.3의 이름을 찾는 첫걸음이다. 그런 의미"라고 말했다.
작품을 고르게 된 이유를 묻는 질문에 염혜란 배우는 "재미있는 댓글을 봤는데 '염혜란의 퍼스널 컬러는 제주다'라는 것이었다"라고 웃어보인 뒤 "개인적 고민이 많이 됐지만 거부할 수 없었다. 정 감독님이 4.3을 다루는 것이 운명, 숙명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영화 '내 이름은'으로 데뷔 주연을 맡은 신우빈 배우는 4.3에 대해 "촬영에 임하면 임할수록 점점 생각도 무거워지고 가볍게 생각했던 스스로가 조금은 부끄러워졌다"고 소감을 말했다.
그는 "4.3영화를 촬영하게 되면서 4.3에 대해 배우다 보니 아직 많이 부족하다는 것을 많이 느꼈다"며 "또 영화를 찍은 곳은 실제로 4.3을 겪은 분의 집이었는데 그런 곳에서 연기하고 호흡을 맞추고 이야기를 나누며 더 배워야겠다는 생각이 많이 들었다"고 밝혔다.
한 도민 관객은 "4.3을 세계 보편적 의제, 다른 말로 평화와 상생을 위한 콘텐츠로 나아가야 한다고 생각한다"며 "그런 의미에서 이 영화가 바로 세계 보편적 의제인 평화라는 주제로 나아가는 콘텐츠로서 적절하다고 생각한다"고 평가했다.
이어 일본에서 왔다는 관객은 "한강 작가의 책이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이후 일본에서도 4.3에 대한 관심이 많이 높아졌다"며 "이어 이번 영화를 보고 나니 예술의 힘이라는게 얼마나 큰지 다시금 느낀다"고 소감을 말했다.
정 감독은 "이 영화는 제주도민들의 힘을 얻어 만든 것"이라며 "이 영화가 제주도에서 그치지 않고 전국적으로 큰 바람을 일으키길 바란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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