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은퇴' 선언한 87세 거장...브루크너로 경의를 받다
클라리넷 김한 '모차르트 협주곡' 연주
브루크너 교향곡 4번에선 소리 층층이 쌓아
악장 바래니 문, 현악 소리에 생기 더해
마지막 연주 끝엔 10여초간 관객 침묵
누구에게나 마지막은 각별하다. 고집스럽게 자신만의 사운드를 지켜왔던 독일인 지휘자의 마지막 공연은 어떤 모습일까. 31일 한국에선 조금이나마 그 공연의 실루엣을 엿볼 수 있었다. 87세 노장인 마렉 야노프스키가 KBS교향악단과 연주한 브루크너 교향곡 4번을 통해서다.

강렬한 카리스마 빛났던 지휘자의 마지막
야노프스키의 이력엔 ‘독일스러움’이 가득하다. 1973~1975년 프라이부르크 오페라와 1975~1979년 도르트문트 오페라의 음악감독을 맡고 1980~1983년 드레스덴 슈타츠카펠레와 독일 오페라의 정수인 바그너 <니벨룽의 반지>를 공연했다. 1984~2000년엔 라디오 프랑스 필하모닉에서 독일 악단 특유의 절도와 정확성을 구현했다. 2002~2016년 베를린 방송교향악단의 수석지휘자를 맡으며 2005~2012년 스위스 로망드 오케스트라의 음악감독을 겸하기도 했다. “단원에게 잘 보이려는 건 시간 낭비”라고 하거나 단원의 의견을 묵살할 정도로 독불장군 면모를 보이기도 했던 그였지만 결과물엔 이견이 따라오기 어려웠다.
야노프스키는 올해를 끝으로 지휘자로서의 여정을 마무리하기로 했다. 강력한 리더십을 지닌 지휘자들이 줄어들는 요즘 음악계에서 그의 은퇴는 많은 클래식 음악 애호가들에게 아쉬움으로 다가온다. 현재로선 지난달 31일 서울 예술의전당에서 KBS교향악단과 선보인 연주가 그의 마지막 내한 공연이 될 가능성이 높다. 이 공연의 첫 곡은 파리 국립오페라의 클라리넷 수석으로 활약하고 있는 1996년생 김한이 준비한 모차르트 클라리넷 협주곡. 이제 나이 서른을 맞이한 젊은 클라리네티스트와 은퇴를 앞둔 야노프스키가 관객의 박수를 받으며 무대에 올랐다.

1악장이 시작되자 길지 않은 총주가 무대 분위기를 데웠다. 얼마 안 가 김한이 클라리넷을 불었다. 색소폰을 다루는 재즈 연주자처럼 리듬에 살짝 몸을 맡기다가도 그는 양 떼를 몰듯 긴 호흡으로 소리를 몰았다. 호른에 소박함을 섞은 듯한 저음역과 악기 특유의 따뜻한 고음역이 클라리넷 하나에서 나왔다. 1초 남짓한 짧은 시간에 음마다 힘을 조금씩 더하면서 빠르게 음량을 끌어내는 다이내믹엔 섬세함이 있었다. 2·3악장에서도 안정적인 연주를 보여준 김한은 바흐의 첼로 모음곡 1번 중 세 번째 곡인 쿠랑트를 연주하며 솔로 악기로서 클라리넷이 얼마나 맛깔을 낼 수 있는지를 입증했다.
풍부했던 현악기의 트레몰로
2부는 본무대로 할 수 있는 브루크너 교향곡 4번. 이 작품엔 ‘낭만적’이란 부제가 붙어있다. 곡의 분위기는 낭만주의의 ‘로맨틱’보다는 모험을 떠나는 중세 기사들의 ‘로망’에 가깝다. 1악장 시작은 안개 사이에서 아침 햇살처럼 살며시 드러나는 호른이 인상적이다. 그러나 KBS교향악단의 호른은 따뜻하면서도 분명했다. “아침이야!”를 선언하듯, 꽤 활기찬 시작이었다.
야코프스키는 1악장의 빠르기인 ‘활기 있게, 그러나 너무 빠르지 않게’에 충실했다. 1악장 주제를 연주한 플루트는 연주의 전반적인 궤도를 잡아줬다. 주목할 건 이번 공연에서 악장으로 활약한 바래니 문 WDR쾰른방송교향악단 제2바이올린 수석이었다. 브루크너의 교향곡은 바이올린이 트레몰로(한 음을 빠르게 연주하는 주법)로 풍부한 울림을 탄탄히 쌓는 게 핵심이다. 트레몰로에서 에너지를 표현하는 섬세함이 부족해서도, 소리가 서로 벌어져서도 안 된다. 계속 활을 빠르게 움직여야 하는 연주자로선 고역이다.

바래니 문은 열의 넘치는 트레몰로로 현악기 전체가 발산하는 생기의 차원을 높였다. 단원 간 소리의 편차가 컸지만 그 덕분에 현악기에서 날 것 그대로의 생기가 느껴지기도 했다. 지휘자는 목관과 금관에 소리를 더 끄집어낼 것을 요구하면서 현악기가 층층이 쌓아낸 울림을 놓치지 않고 이어가려 했다. 2악장에선 현악기가 여린 소리의 층위를 잘게 나누기보다는 음량의 폭을 넓히는 쪽으로 다이내믹을 풀었다. 객원 수석으로 교향곡 연주에 함께한 김한의 클라리넷이 선율에 명징함을 더했다. 3악장에선 현악기와 금관의 민첩한 정도가 꽤 다르게 느껴져 아쉬운 순간이 있었다. 그럼에도 스케르초 악장 특유의 활력을 유지하면서 소리를 층층이 쌓아가는 브루크너 음악의 매력은 여전했다.
예술의전당, 10여초의 정적
대미인 4악장에선 트레몰로의 양감이 잘 드러났다. 빠르게 음의 강세를 키워가는 현악기들의 연주 양상이 다채로워 귀가 지루할 틈이 없었다. 악장은 속주를 이어가면서도 음마다 강세를 다르게 표현했을 뿐 아니라 거칠게 풀어냈던 소리 질감을 점진적으로 부드럽게 바꾸는 데도 능숙했다. 악장의 에너지는 전염된 것처럼 주변의 다른 바이올린에도 퍼졌다. 전반적인 소리의 밀도가 높진 않았다. 그러나 악단이 발산하는 에너지는 겹겹이 쌓인 소리로 브루크너 특유의 황홀함을 선사하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1시간 넘게 이어온 연주에도 마지막이 다가왔다. 대부분의 악기들이 합세해 꾹꾹 눌러낸 에너지를 유지하다가 터뜨리는 것으로 끝이 났다. 에너지를 터뜨린 87세 노장은 움직일 모든 기력을 소진한 듯 손과 팔을 내려놓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얼어붙었다. 그렇게 10여초가 흘렀다. 야코프스키가 손을 내려놓고서야 박수가 쏟아졌다. 관객 모두가 이렇게 만들어낸 침묵은 이 독일인 지휘자에 대한 일종의 경의였다. 조금은 불편했는지 야코프스키는 한쪽 허벅지에 손을 얹은 채 포디엄에서 내려왔다.

그는 느릿하지만 당당하게 무대를 오가며 커튼콜을 거듭 받았다. 그가 떠난 무대에서 퇴장을 고민하던 악장이 관객에게 인사할 땐 객석의 박수 소리가 다시 커졌다. 야코프스키는 자신을 부르는 박수 소리로 오해했는지 다시 무대로 나가려 했지만 이미 연주자들이 자리에서 일어선 뒤였다. 관객 누군가는 지휘자에게 더 박수하지 못해 아쉬웠을 커튼콜이었다.
이주현 기자 deep@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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