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4·3, 그리고 대전 골령골] 대학살 비극 위에 쓰인 평화






[충청투데이 김세영 기자] "나는 바닷고기를 안 먹어요.…(중략)그 사람들을 갯것들이 다 뜯어먹었을 거 아닙니까?"(한강, '작별하지 않는다')
78년 전 발생한 제주 4·3사건의 희생자는 1만 5218명. 이들의 유가족은 12만 8022명, 대학살로 사라진 마을은 134곳이다. 이 비극의 역사는, 단순히 육지와 먼 섬에서 발생한 옛일이 아니다. 1948년 제주에서 시작된 죽음은 6·25전쟁을 거쳐 전국으로 흩어졌고 최근 대전 동구 산내 골령골에서 4구의 4·3사건 희생자 유골이 발견됐다. '세상에서 가장 긴 무덤'이라 불리는 골령골에서 발견된 유골은 자그마치 1471구. 이 중 겨우 0.3%(5구)만이 신원이 확인됐다. 제주의 비극이 지역으로까지 이어지고 있다는 사실은, 해당 사건이 더 이상 특정 지역의 과거사가 아님을 뜻한다. 이에 충청투데이는 4·3사건과 산내 골령골을 함께 조명하며, 지역과 지역을 잇는 기억의 복원과 남겨진 과제를 짚어봤다.<편집자주>
◆속절없이 흐른 78년… 제주 4·3사건 추념식에 참석하다
'제78주년 4·3사건 희생자 추념식'이 열린 3일 오전 10시경 제주4·3평화공원. 행사 시작을 앞둔 공원은 수많은 인파로 북적였다. 생존희생자와 유족, 정계 인사, 지자체장, 대학, 군·경 관계자 등 참석자만 약 2만 명에 달했다.
식순에 맞춰 묵념, 헌화 및 분향, 경과보고, 추념사 등이 진행됐다. 이어 김미경 배우의 제주 4·3사건 사연 재연이 시작됐고 행사장 곳곳에서 차마 삼키지 못한 울음이 터져 나왔다. 75년이 지나서야 뒤엉킨 가족관계를 바로잡은 고계순 씨의 이야기 때문이었다.
4·3사건으로 친부를 잃은 고 씨는 작은아버지의 딸로 호적에 올라 평생을 살아야 했다. 당시 4·3사건 희생자의 유족은 낙인과 불이익이 뒤따랐기에, 이를 두려워 한 작은아버지가 출생신고 전 고 씨를 거둔 것이다. 모진 세월을 침묵 속에 살아온 고 씨는 그간의 고생을 위로하는 자리에서 아버지의 영정사진을 부둥켜안고 통곡했다.
고 씨의 사연을 들은 참석자들은 붉어진 눈시울을 감추기 위해 고개를 숙이거나 하늘을 바라봤다. 처연하리만치 파란 하늘이었다.
오랜 기다림 끝에 고 씨는 잘못을 바로잡고 가족을 다시 품에 안았지만, 하염없이 희생자를 기다리는 유족들도 여전히 많다.
정부와 지자체가 유해 발굴을 지속하고 있지만 바다에 수장되거나 동굴에서 죽음을 맞이한 이들의 유해를 찾기 어렵고, 발굴된 유해의 유전자 감식에 적잖은 예산이 투입되는 탓이다.
명예회복 절차 또한 유가족이 없는 희생자는 시도조차 할 수 없는 게 현실이다.
78년이 지난 지금까지 4·3사건은 결말을 내리지 못한 채 속절없이 이어지고 있다.
◆어머니는 끝내 침묵했다… 희생자 유족 김춘보 씨의 기억
"어머니는 4·3사건에 대해 듣거나 이야기하는 걸 무척 꺼리셨습니다."
2일 제주시청에서 열린 평화대행진에서 만난 제주4·3희생자 유족 김춘보(79) 씨는 이같이 말했다.
김 씨의 아버지와 할아버지는 제주4·3사건 이후 군법회의에 넘겨져 1949년 7월 5일 목포형무소에 수감됐다. 이후 1950년 6·25전쟁이 발발하며 수감자들에 대한 집단 학살이 이뤄졌다는 증언이 이어지고 있지만, 두 사람이 언제 어디서 숨졌는지에 대한 공식 기록은 지금까지 확인되지 않고 있다. 김 씨에게 아버지와 할아버지는 여전히 행방불명 상태다.
1947년생인 김 씨는 사건 당시 갓난아기였던 탓에 직접적인 기억이 없다. 성장 과정에서도 어머니는 관련 이야기를 꺼내는 것 자체를 피했고, 김 씨가 4·3사건 관련 활동에 나선다고 하면 "안 가면 안 되냐"고 만류하기만 했다.
김 씨는 "그때는 이유를 몰랐지만, 지나고 보니 평생 이어진 트라우마였던 것 같다"고 덤덤히 말했다.
김 씨가 가족의 일을 구체적으로 알게 된 것은 성인이 된 이후였다. 친척들의 증언과 4·3 진상조사보고서, 관련 연구 자료 등을 통해 아버지와 할아버지의 행적을 하나씩 짚어가며 사건의 전모를 이해하게 됐다.
김 씨는 "명절에는 제사를 지내며 마음을 달랠 수 있지만, 벌초철이 되면 갈 곳이 없다"며 "다른 집안은 조상 묘를 찾아 모이는데 우리는 그럴 수 없다는 게 가장 힘들다"고 털어놨다.
이들에 대한 법적 판단은 뒤늦게 바로잡혔다. 김 씨 가족은 2021년 재심을 통해 무죄 판결을 받으며 아버지와 할아버지에 대한 명예를 회복했다. 다만 여전히 잘못을 바로잡지 못한 이들이 많다. 군사재판으로 유죄를 선고받은 피해자 약 2530명 가운데 후손이 없는 80여 명은 직권 재심조차 하지 못한다.
김 씨는 "국가가 나서 후손이 없는 희생자까지 책임지고 명예를 회복시켜야 한다"며 "4·3사건은 특정한 이념 문제가 아니라 국가 폭력의 역사다. 후세대가 이 문제를 바로 보고 다시는 같은 일이 반복되지 않도록 기억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대전 골령골까지 이어진 4·3사건… 확인되지 못한 죽음들
4·3사건은 더 이상 제주만의 역사가 아니다. 대전 골령골에서도 희생자 유해가 발굴되며 흩어진 흔적이 하나의 역사가 됐다.
골령골은 한국전쟁 발발 직후인 1950년 6월 28일~7월 17일 사이 최소 4000명, 최대 7000명이 학살된 곳이다. 제주 4·3을 비롯해 여·순, 보도연맹 관련 등으로 대전형무소에 수감된 이들이 희생됐다. 희생자들이 묻힌 구덩이 8곳을 연결한 길이가 1㎞에 달해 세상에서 가장 긴 무덤이라고도 불린다.
이날 대전산내골령골희생자유족회에 따르면 골령골에서 발굴된 유해는 1471구로 이 중 5구가 신원확인 됐다. 이 가운데 4·3사건 희생자만 4구에 달한다.
전미경 대전산내골령골희생자유족회장은 "1466구에 대한 DNA 검사가 사실상 중단된 상태다. 여전히 유가족들은 유해가 누구인지 알 수 없는 상황이다"며 "왜 제대로 진행되지 않는지 정부와 지자체에 들은 것도 없다"고 한숨을 내쉬었다.
이어 "집단으로 희생된 구간의 발굴은 끝났다고 하지만, 부역 혐의 등으로 끌려와 희생된 이들은 골령골 곳곳에 흩어져 있을 가능성이 크다"며 "아직 찾지 못한 유해가 남아 있다고 본다"고 말했다.
희생자를 기리는 골령골기념관 설립도 진척이 없는 상황이다. 앞서 정부는 2016년 공모를 통해 '한국전쟁민간인 희생자 전국 단일 위령시설' 대상지로 골령골을 선정했다. 2020년까지 시설 공사를 마치겠다는 계획을 밝힌 바 있으나 첫 삽도 뜨지 못했다.
전 회장은 "골령골 기념관 건립이 결정된 지 10년이 넘었지만 아직도 진행된 게 없다"며 "유족들은 대부분 고령이다. 79살인 제가 막내다. 이제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그는 "4·3과 골령골은 개별 사건이 아니라 국가 폭력의 연속선에 놓인 하나의 역사다"며 "정권이 바뀔 때마다 사업이 밀리고 표류하는데, 정부와 지자체가 책임지고 유해 발굴과 유전자 감식, 기념관 설립 등을 추진했으면 좋겠다"고 덧붙였다.
김세영 기자 ksy@cctoda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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