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만의 세상만사] 이제 깨닫는 ‘찬란한 슬픔의 봄’

2026. 4. 3. 10: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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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물며 찬물도 위아래가 있는데 봄꽃이야 더 말해 무엇하겠는가.

이 아름답고 찬란한 봄을 몇 번이나 더 볼 수 있을까, 내년 봄을 기약해도 될까.

찬란하기에 더더욱 슬픈 봄이고 생각이 깊어질수록 눈물 나는 봄이다.

세월의 뒤안길에 와서 보니 '찬란한 슬픔의 봄'은 정말 대단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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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물며 찬물도 위아래가 있는데 봄꽃이야 더 말해 무엇하겠는가. 불과 며칠 사이지만 엄연히 피는 순서가 있었다. 산수유가 노란 꽃망울을 터뜨린 뒤에 매화가 빨간 입술을 내밀면 천지가 봄빛이었다. 질세라 개나리가 긴 담장을 샛노랗게 물들이고 하얀 목련은 파란 하늘에 점점이 박혔다. 다음에 핏빛 진달래와 철쭉이 먼산을 울긋불긋 수놓았다. 가고 오는 길이 겹쳐 잠깐 뒤섞였지만 나름 줄을 섰다.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그 차례가 없어졌다. 봄기운에 취해 정신줄을 놓은 줄 알았더니 그건 아니었다. 지구온난화로 땅이 더워져 모두가 겨우내 참았던 숨을 한꺼번에 와 하며 내뿜고 만 탓이고 ‘덕분’이었다.

자연의 순리가 어그러졌으니 좋을 리 없지만 뜻하지 않게도 그 바람에 이른 봄이 더욱 화려해졌다.

4월이 시작될 즈음이면 대한민국 산하는 굳이 ‘꽃피는 산골’이 아니라도 ‘복숭아꽃 살구꽃 아기 진달래 울긋불긋 꽃 대궐’이 된다. 경희궁 옆 역사박물관 뒤뜰도 그러했다. 샛노란 개나리가 산수유를 더욱 빛나게 하는 가운데 매화, 백목련, 자목련, 진달래에 산당화, 싸리꽃까지 어우렁더우렁이다.

자태도 다르고 맵시도 다 달라 공짜로 즐기는 진짜 눈 호강. 모란은 아직 멀었지만 그야말로 김영랑 시인이 읊었던 찬란한 봄이다. 그런데 영랑은 왜 슬픈 봄이라는 ‘사족’을 달아 굳이 ‘찬란한 슬픔의 봄을’이라고 했을까. 학교 때 배운 바로는 오는 모란은 찬란하지만 ‘뚝뚝 떨어져 가는 모란’은 슬프기에 그렇다고 했다. ‘사랑에 이별이 숨어 있다’거나 ‘소리 없는 아우성’이라든가 ‘4월은 잔인한 달, 겨울은 오히려 따뜻했다’ 등과 같은 맥락이라고 했다.

멋있고 가슴 뭉클한 말이지만 그땐 그저 시적인 표현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살면서 보니 ‘찬란한 슬픔의 봄’은 단순한 시어가 아니었다. 겨울을 이겨내고 찾아오는 봄은 언제나 찬란하고 또 찬란하지만, 마음에 따라 환경에 따라 아픔의 봄, 이별의 봄, 상처투성이의 봄도 되는 것이었다.

인생의 내리막길을 급하게 달려가는 노년의 가슴속엔 이런 생각이 스며든다. 이 아름답고 찬란한 봄을 몇 번이나 더 볼 수 있을까, 내년 봄을 기약해도 될까. 다음 봄도 이 사람과 같이할 수 있을까. 찬란하기에 더더욱 슬픈 봄이고 생각이 깊어질수록 눈물 나는 봄이다.

봄이 와도 봄 같지 않은 춘래불사춘이 그렇듯 처지에 따라 다르기도 하다. 애틋했던 정인과 헤어지는 이에겐 자신의 마음과는 너무 다른 화사한 봄날에 화가 날 수 있다. 오늘도 실낱같은 희망의 끈을 잡지 못한 이들에겐 그나저나 아무런 의미가 없다. 봄이라고 환호작약하는 이들이 미울 정도다. 갑작스러운 전쟁으로 평범한 하루를 잃은 사람들은 오고 가는 봄을 챙길 겨를도 없고 느끼지도 못한다.

세월의 뒤안길에 와서 보니 ‘찬란한 슬픔의 봄’은 정말 대단한 말이다. 반어가 아니라 그 자체가 완벽한 진실이다. 그렇지만 그렇다고 해서 ‘삼백예순날 하냥 섭섭해 우옵내다’는 아닌 듯하다. 일체유심조라고 모든 건 마음먹기가 맞다. 내 마음의 슬픔에 매달리는 것보다는 자연의 아름다움에 빠져드는 게 더 좋지 않겠는가. 마음을 다독이면 봄은 언제나 ‘그 속에서 살던 때가 그리운 나의 고향’이다. 봄은 잔뜩 욕심을 내면서 한없이 빠져들어도 되는 때이다.

이영만 전 대표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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