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리 노력해도 광탈” 취업 막고 있던 수십년 전 비밀
4.3을 처음 묻는 사람들에게 그 아픔과 고통이 굉장히 오랫동안 이어지고 있음을 전달하기 위해서는 무슨 이야기를 해야할까요? 제주4.3 78주년을 맞아 제주의소리 서브브랜드 제리뉴스가 4.3을 처음 접하는 이들을 위한 콘텐츠를 제작했습니다. 영상에 담긴 이야기가 4.3의 진실을 조금 더 가깝게 느낄 수 있는 계기가 되기를 희망합니다. / 편집자 주
만약 여러분의 삶에, 이런 일들이 벌어진다면 어떨까요?
밤낮으로 공부해 성공한 취업인데, 이유없이 갑자기 합격 취소 통보를 받습니다. 가까스로 취업을 해도 내 이름은 항상 승진 명단에서 빠져있습니다. 해외로 여행이나 출장을 다녀오려고 해도 비자 발급이 막혀 꿈도 꿀 수 없습니다. 심지어 누군가 내 일상생활을 매일 감시하고 동향을 보고하고 있습니다.
내가 부족한 사람이어서일까요? 큰 범죄라도 저지른걸까요? 아니면 운이 좋지 않아서?
1948년 수만 명이 희생된 제주4.3.
제주4.3의 비극은 그날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바로 '연좌제' 때문입니다.
1950년 정권은 5만여 명에 달하는 4.3 관련자들을 별도로 관리하기 시작했습니다. 총살,징역,압송된 사람들의 명단과 숙청 일시,장소는 물론, 남겨진 유가족의 상황까지 단 한 명도 빠짐없이 기록했습니다. 거대한 '블랙리스트'였던 셈입니다. 17살의 나이에 4.3 광풍에 휩쓸려 아버지를 잃은 고태명 씨가 그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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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년, 마을 야학에서 사람들에게 글을 가르쳐 주던 고태명 씨는 경찰에 끌려가 일주일 넘게 모진 고문을 받았습니다. 살고 싶은 마음에 경찰이 한 질문에 무조건 "네"라고만 대답했고, 이는 하지도 않은 일에 대한 자백이 되어버렸습니다.
이후 고태명 씨는 피나는 노력 끝에 경찰 시험에 합격했습니다. 하지만 그에게 돌아온 건 '합격 취소' 통보. 폭도의 가족은 경찰이 될 수 없다는 연좌제의 굴레 때문이었습니다. 그 억울한 낙인에 지친 그는 결국 고향 제주를 떠나야 했습니다. 그는 일흔이 넘어서야 다시 고향에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이 지독한 낙인은 세대를 넘어서도 대물림되었습니다. 1947년 3.1총파업 당시 공문을 붓글씨로 써 붙였을 뿐인데 주동자로 몰려 교직에서 파면당하고, 감옥으로 끌려갔던 고 김상연 씨. 그는 서울 마포형무소에서 옥살이 중 한국전쟁 발발로 들이닥친 인민군에 강제 징집되었다가, 탈출해 국군으로 복무를 마쳤습니다. 끝내 고향 제주로 돌아오지 못하고 억울한 기억을 뒤로 타지에서 생활하며 지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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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그 일이 다시 돌아와 자녀들을 괴롭혔습니다. 큰아들은 직장에서 해외 출장을 가려 했지만 연좌제 탓에 여권 발급을 거절당했고, 보증인을 세우고 나서야 겨우 비자를 받을 수 있었습니다. 작은 아들 역시 대학을 졸업하고 어렵게 기관에 합격했지만, 갑작스러운 '합격 취소' 통보를 받아야만 했습니다. 결국 2024년 11월 김씨는 제주4.3희생자로 결정됐지만, 이미 세상을 떠난 뒤였습니다.
한 평생 억울함을 삼켜야했던 청년들은 어느덧 노인이 되었습니다. 오랜 시간이 흐른 지금에야, 제주지방법원 '4.3직권재심' 법정을 통해 이들은 무죄를 선고받으며 조금씩 명예를 회복하고 있습니다.
수십 년이 흘러 받은 종이 한 장의 무죄 판결문이, 이들의 빼앗긴 70년 인생을 온전히 보상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 뒤늦은 판결이 말해주는 명확한 진실은 "당신의 잘못이 아니었다"는 것.
국가의 이름으로 개인의 꿈과 미래를 짓밟는 일이 다시는 반복되지 않도록 기억하는 것. 그것이 4.3이 우리에게 남긴, 아직 끝나지 않은 과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