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성지순례] 단정한 처마 아래 고인 고요의 시간, 아름드리 노거수 따라 걷는 마을 옛길

유승혜 2026. 4. 3.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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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 김포 통진향교
김포 통진향교의 400년 느티나무와 내삼문. 유승혜 여행작가

◇ 봄볕 깃든 통진향교, 군하리 옛길의 출발점

군하리 마을 동쪽 가장자리, 양지바른 경사에 차분하게 자리한 통진향교에도 봄볕이 깃들었다. 담장 주변으로 진달래와 매화가 폈고 말랑하게 녹은 땅 위로는 냉이와 지칭개, 뽀리뱅이가 올라왔다. 눈요깃거리가 많아서인지 봄날의 향교 마실이 퍽 즐겁다. 사실 향교는 행사와 제사가 있는 날을 제외하고는 적요한 공간이다. 그럼에도 통진향교를 찾은 이방인의 발걸음이 무겁지 않은 까닭은 폐쇄적이지 않고 너른 품을 내어주는 향교의 개방적인 인상 덕분일 것이다.

향교의 외삼문 역할을 하는 풍화루는 마을을 내려다보는 작은 전망대나 다름없다. 누각에 서면 정면으로는 조선시대 봉수대가 있었던 군하리 남산이, 뒤로는 향교를 감싼 문수산 소나무 군락이 보인다. 산과 산 사이, 바람이 오가는 이곳에서 한때는 성현의 가르침을 받들어 사람 된 도리를 깨우치려 했던 유생들의 열망이 오갔을 것이다.
통진향교 풍화루에서 바라본 군하리 일대와 남산. 유승혜 여행작가

누각에서 바라보는 월곶면 군하리는 낮은 지붕들이 어깨를 맞댄 소박한 면 소재지의 모습이다. 여느 농촌의 모습과 다를 바 없지만, 문수산 품에 안긴 이 고즈넉한 교궁의 존재는 군하리의 뿌리를 더듬어 나가는 단서가 된다. 향교가 있는 지역은 과거 행정적, 문화적 중심지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향교의 오랜 역사를 증명하듯 풍화루를 드리운 아름드리 느티나무의 나이는 400살이 넘었다. 그런데 향교는 이보다 더 오래전인 900년 전, 1127년(고려 인종 5년)에 세워졌다고 전해진다. 설립기록이 확실하지는 않지만, 군하리의 역사를 함축하고 있는 상징적인 공간이라 할만하다. 해서 김포시 월곶면 군하리 옛길을 걷는 여정은 통진향교에서 시작된다.

◇ 도내 최고(最古) 대성전 아래서 응시하는 고요한 풍경

풍화루를 지나 내삼문 앞으로 가면 400년 된 또 다른 느티나무 한 그루가 수문장처럼 서 있다. 좌측의 250년 된 느티나무까지 총 세 그루의 보호수가 향교를 수호하고 있는 셈인데 여름이면 잎이 무성해져서 명륜당 뒷마당은 숲에 들어온 듯 아늑한 그늘이 된다. 객이 쉬어가기 좋은 그 자리에 경기옛길 강화길의 스탬프박스가 놓여 있다.

조선시대 한양과 지방을 잇는 6대로 중 한 갈래였던 강화로는 한강과 인접해 인적·물적 교통의 거점이자 적군을 막는 방어기지로 중요한 역할을 했다. 풍화루가 일반적인 외삼문 대신 거대한 누각의 형태를 갖춘 까닭 또한 통진향교가 임금이 강화도 피난길에 오를 시 임시 거처로 쓸 수 있는 여지 때문이었다. 이러한 통진향교의 내력은 오늘날까지도 이어져 경기옛길을 걷는 도보 여행자들의 쉼터가 돼주고 있다.
 
통진향교 내삼문에서 바라본 대성전과 동무, 서무. 유승혜 여행작가

통진향교의 건물 배치는 전형적인 전학후묘로 앞쪽에는 교육 공간인 명륜당이, 뒤쪽에는 제사 공간인 대성전이 있다. 계단을 올라 내삼문을 통과해 제향 공간으로 들어서면 공자를 비롯한 5성을 봉안한 대성전과 공문 10철, 송조 6현, 동방 18현의 위패를 모신 동무와 서무가 자리한다. 역시나 일반적으로 볼 수 있는 향교의 제향 공간이지만 대성전은 도내 향교 건축물 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 손꼽힌다. 맞배지붕의 골기와집으로 전면에는 장초석을 사용했고 지붕 처마를 받친 공포는 새부리 모양의 익공 양식이다. 전문가들은 건축 양식상 17세기 말에 지어진 것으로 본다. 다만 온전히 보전된 것은 아니다. 일제강점기 때 1군 1향교 정책에 따라 폐쇄됐던 향교는 광복 이후 기능을 되찾았지만 6·25전쟁 때 건물이 크게 파괴됐다. 이후 1965년 대성전이 중수됐고 1990년 이후 동재와 풍화루 등이 복원됐다.

대성전에서 내려다보는 향교의 전경과 군하리의 모습은 더없이 정갈하다. 대칭의 미학을 보여주는 동무와 서무, 정연하게 놓인 신도와 그 끝의 솟을삼문, 수묵화의 필치처럼 하늘로 뻗은 느티나무 가지와 그 너머 나지막한 남산의 부드러운 능선까지 어느 하나 넘침없이 조화롭다. 일상의 소란함이 닿지 않는 이곳에서 풍경이 내어주는 고요를 가만히 응시하다 보면 마음속 묵은 생각도 바람에 흩어지는 듯하다.

◇ 나루가 통하던 고을, 관청길로 이어지다

통진향교의 '통진'은 '통진현'이었을 적 이름을 그대로 쓴 것이다. 한강 하구와 맞닿은 평야지대에 자리 잡아 '나루가 통하는 곳'이라는 뜻을 지닌 통진(通津)은 예부터 물길과 육로가 교차하는 교통의 요충지였다. 본래 고구려의 평회압현(平淮押縣)이었던 이곳은 신라 때 '분진(分津)'으로 불리다가 고려에 이르러 '통진'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특히 강화도로 향하는 길목인 탓에, 정묘호란 당시에는 인조가 강화도로 피신하는 과정에서 이곳 통진현 관아에 머물며 정세를 논의했다는 기록도 전한다. 명륜당과 풍화루 사이 마당에서 마을 안쪽으로 발걸음을 옮기면 통진현 관아의 일부였던 이청 건물을 만날 수 있다.
 
통진향교에서 통진이청으로 향하는 군하리 관청길. 유승혜 여행작가

향교에서 이청으로 향하는 200m 남짓의 마을길은 밭두렁과 골목을 지나 예스러운 정취가 흠뻑 느껴진다. 그 짧은 길에도 통진이청 방향 팻말이 여러 개 세워졌고, 곳곳에 수선화, 팬지 등의 꽃을 가꾼 화단이 있다. 이 길은 통진향교와 통진이청을 거쳐 월곶생활문화센터, 김포국제조각공원까지 이어지는 '군하리 관청길'의 일부로 지난 2019년 김포시 마을안길 공모전에서 선정된 이후 꾸준하게 정비가 이뤄져 왔다. 통진향교를 출발해 약 2시간 동안 마을안길을 걷는 여정은 주민의 해설을 곁들인 상설 투어로도 운영되고 있다. 네이버에서 월곶쌀롱을 검색하면 온라인으로 예약이 가능하며 가격은 성인 5천 원이다. 월곶쌀롱은 월곶면 주민들의 생활협동조합이다.

◇ 남겨진 관아와 항일의 기억, 군하리의 또 다른 시간

통진이청은 우리나라에 몇 없는 관아 건축물 중 하나다. 경기도 관아 건축의 면모를 살필 수 있는 중요한 유적이자 통진향교와 함께 월곶면 군하리의 역사를 보여주는 소중한 유산이다. 아쉽게도 평소에는 이청을 둘러싼 울타리 출입문이 잠겨 있어 건물에 가까이 갈 수는 없으나 멀찍이서 정면 7칸, 측면 2칸의 넓은 대청이 들어간 외관을 확인할 수 있다. 균형 잡힌 구조와 단단한 짜임새가 인상적인 건물이다.
 
통진이청 전경. 유승혜 여행작가
통진이청은 과거 통진현 관리들이 행정 실무를 담당했던 평범한 관청이었으나, 일제강점기에는 3·1운동에 가담한 독립지사들을 가두고 고문하던 일제 주재소로 쓰인 아픈 역사가 있다. 이청과 이웃한 월곶생활문화센터는 1919년 3월 22일과 29일, 수백명의 주민이 모여 만세 시위가 일어났던 옛 월곶면사무소 자리다. 만세운동을 주도한 임용우, 조남윤, 윤영규 선생 등은 가혹한 옥고를 치렀으며 임용우 선생은 끝내 옥사했다. 월곶생활문화센터 곁을 지키는 수령 250년과 450년의 느티나무, 회화나무 세 그루는 그날의 함성과 눈물을 기억하는 소리 없는 증인으로 여전히 그 자리에 뿌리내리고 있다.
 
월곶생활문화센터 내 2층 통진도호부전시실. 유승혜 여행작가

월곶생활문화센터는 주민들의 배움터이자 사랑방인데 이곳 2층에는 통진도호부 전시관이 마련돼 있다. 통진의 연혁과 관련 유적, 자연을 체계적으로 정리해 소개한 곳이다. 향교, 객사, 관아가 있는 옛 군하리 일대의 모습을 재현한 디오라마와 통진현이 기록된 고지도 등이 통진에 대한 이해를 돕는다.

◇ 숲길에서 평화로, 관청길 여정의 마무리
 
군하숲길과 김포국제조각공원으로 접어드는 길목. 유승혜 사진작가
이제 발길은 마을 뒷산으로 향한다. 문화센터 옆 회화나무에서 시작하는 '군하숲길'은 문수산 등산로로 이어지는 350m의 산책로다. 동시에 문수산 아랫자락에 조성된 김포국제조각공원으로 들어서는 진입로이기도 하다. 자작나무, 수수꽃다리, 산딸나무, 붉은병꽃나무 등이 우거진 숲길을 5분쯤 걷다 보면 불현듯 현대 조각 작품들이 등장한다.
 
문수산 자락의 김포국제조각공원에 자리한 김영원 작가의 '길'. 유승혜 여행작가
김포국제조각공원은 따로 부지에 조성된 공원이 아니라 숲속 곳곳에 조각 작품들을 전시한 독특한 공간이다. 나무들과 어우러진 조형물들은 낯설면서도 흥미로운 모습으로 우연인듯 숲길 산책자와 만난다. 이곳에는 다니엘 뷔렌, 줄리안 오피, 조반니 알셀모 등 세계적인 조각가 14인과 국내 저명 작가 16인의 작품 30점이 나무처럼 바위처럼 자리한다. 접경 지역이라는 김포의 특수성을 살려 '평화와 통일'을 주제로 삼았으나, 작품들은 정형화된 틀을 벗어나 저마다 다채로운 변주를 보여준다. 그 자유로운 형태 앞에서 관람자의 해석과 감상은 경계 없는 자유를 얻는다. 분단 후 군하리 주민의 상당수가 북에서 내려온 실향민이었다는 점을 상기하면 조각들이 건네는 평화의 메시지는 차라리 간절한 기도로 다가온다.
 
김포평화문화관 전경. 유승혜 여행작가

숲속 미술관의 관람을 마쳤다면 마지막으로 들를만한 장소는 김포평화문화관이다. 김포국제조각공원에서 김포시청소년수련원 방향으로 내려가는 길목에 자리한 컨테이너 건축물로 전시실, 도서관, 음악감상실 등을 갖춘 복합문화공간이다. 이곳의 주제 역시 분단과 평화다. 평화를 노래한 밥 딜런의 음악을 감상하고 이호철의 '판문점', 박완서의 '엄마의 말뚝'과 같은 분단 문학을 읽는 것으로 통진향교에서 출발한 '군하리 관청길'의 여정은 마무리된다.

유승혜 여행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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