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콩밭 매는 아낙네'의 마음 품은 산 [느린 등산 칠갑산]

'느린 등산'은 단순히 속도가 낮은 상태가 아니라, 나와 자연 사이의 주파수를 맞추는 과정이다. 빨리 오를 때는 만날 수 없는 장면이 느리게 걷는 이에게만 말을 걸어온다. 우리는 산에서도 효율과 속도를 좇아야만 하는가. 언제까지 타인의 눈을 의식하여 보여지는 것에 나를 맞춰야 하는가.
등산의 완성은 정상 표지석 인증 사진에 있지 않다. 산행 중 마주친 바람의 촉감, 귀여운 새 소리, 균형 잡힌 나무의 굴곡, 고요한 듯하지만 자연의 소음으로 가득한 시간과 내 호흡의 리듬이 하나가 되는 순간에 있다. 치유의 힘은 맑은 공기와 피톤치드에만 있지 않다. 우리의 마음은 늘 '더 빨리, 더 높이'를 추구하는 과부하 상태는 아닌가. 성과를 이루려는 마음을 내려놓고 느리게 자연을 음미할 때, 산은 나 자신과 화해하는 치유의 공간이 된다.

나는 칠갑산입니다
사람들은 나를 두고 어느 가수의 노랫말을 빌려 '콩밭 매는 아낙네의 산'이라 부르기도 하더군요. 하지만 나는 오래전부터 이곳에 뿌리를 내리고, 고단한 숨을 몰아쉬며 찾아오는 이들을 묵묵히 지켜봐 온 커다란 품일 뿐입니다.
내 이름은 원래 '칠악산漆嶽山'이었습니다. 하지만 백제의 왕들이 부여 사비성에서 나를 바라보며 하늘에 제를 올리기 시작하면서, 나는 만물의 근원이 되는 일곱七 가지 기운과 천체 운행의 으뜸인 갑甲을 품은 신성한 존재로 불리게 되었지요. 그때부터 칠갑산이 제 이름이 되었습니다.
내가 품은 일곱 군데의 명당자리 '갑지'를 찾아 어떤 이들은 내 골짜기를 헤매기도 합니다. 하지만 진정한 명당은 지도 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 당신이 지친 마음을 내려놓고 비로소 평온을 되찾은 바로 그 자리가 아닐까요.
나는 충남 청양의 산입니다. 1973년 충남도립공원으로 지정되었고, 블랙야크 '100대 명산'에 오르면서 주말이면 인증을 하려는 사람들이 줄지어 찾아옵니다. 3월이면 고로쇠나무를 찾아오는 이들도 많아요. 내가 키워낸 고로쇠나무의 수액이 "달고 몸에 좋다"고 해요.
나는 무척 많이 변했어요. 과거엔 국보와 보물 여럿을 가진 장곡사가 내 품에 안긴 명소였지만, 지금은 칠갑호수전망대, 천장호수출렁다리, 천문대, 칠갑산자연휴양림 같은 새로운 명소가 생겼어요. 내 살을 깎아낸 자리마다 인공시설과 호수가 생겼지만 괜찮아요. 청양은 가난한 산골이고, 이제는 인구도 적어서 내 이름을 이용해서라도 관광객을 끌어들여야 하는 것도 이해해요.
사람들은 항상 내게 기대어 살았어요. '콩밭 매는 아낙네야, 베적삼이 흠뻑 젖는다, 무슨 설움 그리 많아 포기마다 눈물 심누나'라는 노랫말은 실제 이야기예요. 나는 높이가 낮고, 골이 깊고 많아서, 많은 화전민이 들어와서 살았어요. 산을 갈아엎은 밭이라 논농사를 할 수 없어 콩이나 보리를 많이 심었어요. 화전민들은 자식들이 굶지 않기를 바랐죠. 그래서 홀어머니 밑에서 자란 어린 딸을 논농사 짓는 마을로 시집보내, 밥이라도 먹고 살기를 기대했어요. 세월이 흘러 시집간 딸이 어미의 나이가 되고서야 모질게 떠나보낸 마음을 이해하게 되었다는 가사예요(본지 필자 이남석씨는 칠갑산 기슭이 고향이다. 그는 '칠갑산' 노래 가사는 허구가 아니며 당시 화전민들의 흔한 이야기라고 알려 주었다).
나는 화려한 바위가 없습니다. 압도적인 높이도 아닙니다. 560m에 불과해요. 다만 콩밭 매는 어미의 마음을 가졌습니다. 나의 길은 낮고 완만하여 등산화 끈을 꽉 조이지 않아도, 비싼 장비가 없어도 괜찮습니다. 그저 잃어버렸던 당신의 본모습을 내 안에서 찾아가길 바랍니다. 남들보다 늦어도 괜찮아요. 당신은 당신 계절에 맞게 피어나고 있는 중이니까요.

1 봄꽃만 소중한 것은 아니다
메마른 계절도 소중하다. 2026년 봄이 오기 직전의 시간은 다시 오지 않는다. 앙상하지만 생명을 품은 가로수 임도, 복원할 수 없는 공기와 감촉을 누린다. 칠갑의 초대장을 받아든다.

2 남겨진 겨울
툭 튀어나온 소나무 뿌리 사이, 채 녹지 않은 한 줌의 눈이 남아 있다. 아니란 걸 알면서도, 단념할 수 없는 감정의 찌꺼기 같다. 곧 사라질, 남겨진 겨울.

3 추억에 잠긴 굴참나무
굴참나무 껍질에 돋아난 이끼를 들여다본다. 얼마나 많은 비바람을 지나 초록색 외투를 입은 걸까. 말라서 이끼가 바래가는 나무는 비 오던 어느 날을 추억하는 것만 같다.

4 진달래 꽃눈
아직 차가운 공기로 가득한데 진달래는 뜻을 꺾을 생각이 없다. 꽃샘추위 턱 밑까지 꽃눈을 들이밀며, '봄이 왔다'는 가장 낭만적인 선포를 할 준비를 마쳤다.


5 바스락거리는 산
"바사삭" 소리가 능선에 울린다. 낙엽의 바다를 헤치며 걷는 산길, 삼형제봉 지나도록 사람 한 명 마주치지 않는 고요가 촉감 좋은 순면 100% 옷처럼 마음에 평온을 가져온다.

6 소나무의 사랑법
다른 뿌리에서 난 나무가 부드럽게 서로를 껴안은 모양새다. 싸우더라도 움직일 수 없으니 얼마나 힘들까 싶은데, 한번 맺은 소나무의 사랑은 변하지 않는다.

7 느티나무의 눈으로 본 하늘
400년을 살면 얼마나 현명해지는 걸까. 맨몸으로 앙상히 있어도 초라해 보이지 않는다. 보호수로 지정된 느티나무가 있는 돌담. 곁에 앉아 있으면 호흡이 가라앉도록 어루만져 주는 것 같다.

8 1,000년 사찰 풍경 소리
신라시대부터 이어온 오랜 절이라서일까. 풍경 소리가 바람의 말처럼 신비롭다. 투명한 물고기가 바람의 물살을 따라 유영하듯 울리는 풍경 소리. 산행 끝에 만난 장곡사에서 몸과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음을 느낀다.




산행 주의점
1. 천장호출렁다리 코스와 대치에서 오르는 코스가 가장 인기 있다. 장곡리 코스는 자가용 이용 시 하산 후 콜택시를 부르지 않아도 걸어서 원점회귀 가능한 장점이 있고, 인적이 적어 고즈넉한 산행을 즐길 수 있다.
2. 장곡리 코스는 4월에 가장 인기 있다. 장곡사로 이어진 길의 벚꽃이 만발해 도로 따라 걷는 1.5km가 지루하지 않다.
3. 장곡리의 장점은 주차장이 넓다는 것. 장곡사 주차장 외에도 장승공원 일대에 3개의 대형주차장이 있다.
4. 삼형제봉 지나 정상까지 꾸준히 오르막이 이어진다. 낮다고 얕보면 힘들 수 있다.
5. 이정표와 벤치가 많고 산길 정비가 잘 되어 있어 길찾기 쉽다.
6. 위험한 곳은 없으며, 가파른 곳에는 계단이 설치되어 있다. 지구력만 있다면 초보자도 가능하다.
7. 장곡사를 들머리로 오르면 정상까지 3km이다. 장곡 제3주차장에서 오르는 것보다 2km 정도 짧다.
8. 장곡사는 국보와 보물을 여럿 지닌 신라시대 창건한 고찰이다. 문화재 탐방을 겸할 수 있다.
9. 마재터널에서 삼형제봉까지 1km로 거리가 짧다. 칠갑지맥 코스이며, 정규 등산로는 아니기에 길이 희미하다.
10. 3~4월 산불방지 기간에는 휴양로, 지천로, 칠갑로, 도림로 코스는 입산금지다.
교통
서울 센트럴시티터미널(호남선)에서 청양시외버스터미널로 가는 고속버스가 1일 6회(07:20, 10:30, 12:50, 15:50, 17:50, 19:50) 운행한다.
2시간 걸리며 요금은 1만7,500원. 터미널에서 200m 떨어진 대정의원 앞 버스정류장에서 장곡리행 버스가 1일 4회(09:20, 12:30, 16:10, 18:50) 운행한다. 30분 걸린다. 대중교통 이용 시 하산은 대치리 방면을 택하는 것이 유리하다. 콜택시 호출과 버스 이용이 더 용이하다. 칠갑산 등산로 입구의 대부분의 주차장은 깔끔하게 정비되어 있으며, 주차료가 없다.
칠갑호 전망대 칠갑타워
지난해 11월 14일 칠갑호 전망대인 '칠갑타워'가 개장했다. 칠갑저수지에 조성된 칠갑타워는 지상 6층 규모의 복합 문화 공간이며, 8년간의 준비 끝에 문을 열었다. 특히 타워 5층에서 호수 중앙 전망대까지 연결된 102m 길이의 스카이워크는 방문객들에게 호수 위를 걷는 듯한 짜릿한 경험과 칠갑산 능선을 한눈에 담을 수 있는 조망권을 선사한다.
개장 이후 한 달 만에 방문객 3만 명을 돌파한 칠갑타워는 내부의 미디어 실감 콘텐츠 체험실과 로봇 무인 카페 등 최신 편의시설을 갖췄다. 또한 스카이워크 엘리베이터를 타고 수면으로 내려가 수상보행교를 걷고, 호수 둘레를 이은 '칠갑호 둘레길(8km)'과 연계 가능하다.
월간산 4월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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