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세기 막장드라마…21세기 방구석 대반전 [화폭역정 5]
그림실력 뛰어난 가난한 장남
신분 상승 기회를 낚아챘으나
최고명예 '역사화가' 마다하고
귀족 연애·유희 주문제작 몰두
프랑스혁명에 상류층과 몰락
250년뒤 '책 읽는 철학자' 발견
세속이미지 벗기고 재평가하게


[이윤희 미술평론가] 그네를 타는 장밋빛 드레스의 여인은 신발 한 짝을 벗어서 날리고 있다. 더 자세히 보면 신발을 날리는 척하면서 속옷을 살짝 보여주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아니나 다를까, 덤불에 몸을 숨긴 귀족 청년이 여인을 올려다보며 환호하고 있다. 이 즐거운 연인 뒤에는 그네를 밀고 있는 나이 든 남성이 알 듯 모를 듯한 미소를 짓고 있다. 그네 뒤 이 남성은 여인의 남편이다.
로코코 양식이 절정을 이루던 프랑스 루이 15세 시절. 장 오노레 프라고나르(1732∼1806)는 이 그림 ‘그네’(1767)를 그렸다. 화려하고 평화로우나 부패하고 비도덕적이던 로코코 시대의 대놓고 관능적인 이 작품은 당시 상위 1%인 왕족과 귀족의 삶을 엿보게 한다. 더군다나 젊은 귀족의 구체적인 주문에 따라 충실하게 그려진 그림이니, 주문자의 인생관을 반영한 것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물론 화면에서 보이는 빠른 붓질과 화려한 색채, 극적인 구도는 프라고나르의 전매특허다.
‘그네’는 프랑스혁명 이전 구체제의 몰락을 예견한 가장 상징적인 작품 중 하나로 꼽힌다. 그림 속 여인의 신발이 날아가는 이 순간, 정원 너머에서는 이 시대를 끝내려는 이글이글한 혁명의 기운이 샘솟고 있었다. 순간의 쾌락과 그 뒤에 숨겨진 비밀을 박제한 작품. 과연 이 그림을 주문한 귀족이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진 이후에도 프라고나르는 무사할 수 있었을까.
프랑스 남부 그라스 태생인 프라고나르는, 아버지가 투기로 모든 재산을 잃고 빚더미에 앉아 가족들과 함께 도망치듯 파리로 향했을 때 겨우 여섯 살이었다. 파리에 와서도 아버지는 여러 직업을 전전했고 겨우 입에 풀칠이나 하는 수준으로 삶을 이어 나갔다. 어린 열세 살 프라고나르는 공증인 사무실에 말단 서기로 들어가 문서를 정리하고 필사하는 일을 맡았다. 하지만 프라고나르는 일을 하면서도 서류의 이면이나 여백에 자꾸만 그림을 그렸고, 이를 눈여겨본 상사는 꾸짖는 대신 본격적으로 그림을 그려보라고 권유했다. 프라고나르의 어머니에게 아이를 당대 최고의 화가였던 프랑수아 부셰(1703∼1770)에게 데려가 보라고 권했다는 것이다. 이것이 프라고나르의 첫 번째 행운이었다.
‘순간 쾌락’ 주문 행렬…프랑스 사교계가 열광한 화가
그렇게 부셰의 화실에서 청소를 하고 잡일을 하며 그림을 배우기 시작한 프라고나르는 단 5년 만에 프랑스 왕립 회화·조각 아카데미가 주최하는 최고 권위의 ‘로마상’을 거머쥐며 실력을 공인받았다. 로마상은 당시 가장 영예로운 장학제도로, 로마로 국비 유학을 보내주는 특전과 더불어 프랑스 화단에서 가장 높은 지위인 ‘역사화가’가 되는 초단기 엘리트 코스였다. 가난한 집안의 장남이던 프라고나르에게는 집안을 일으키고 신분을 상승시킬 수 있는 최고의 기회가 생긴 것이다. 그는 두 번째의 기막힌 행운을 얻었다.
로마의 프랑스 유학생으로 살았던 4년여는 거장들의 그림을 실제로 보고 실력을 쌓을 수 있는 기간이었다. 처음에는 미켈란젤로나 라파엘로의 그림을 실제로 보고 압도당해 슬럼프를 겪었으나 “거장의 그림만 보지 말고 로마의 빛나는 햇살과 풍경을 그려보라”는 로마 아카데미 원장의 조언이 프라고나르를 다시 일으켰다. 당시 프랑스의 정원이 자로 잰 듯한 기하학적인 형태였다면, 로마 근교의 정원은 이끼가 끼고 나무가 제멋대로 자라난 야생성을 간직하고 있었다. 파리로 돌아와 그린 ‘그네’에서 보이는 울창하고 무성한 숲은 이때 봤던 풍경을 옮긴 것이다.

프라고나르에게 캔버스는 예술적 고뇌를 담는 그릇이기 이전에 변화하는 시장의 요구에 기민하게 반응해야 하는 생계의 도구였던 것이다. 명예 대신 현실을 선택한 프라고나르는 루이 15세 시대 상류층의 연애와 유희를 가장 우아하고 관능적으로 그려내 파리 사교계가 가장 사랑하는 화가가 됐다. ‘그네’의 그 파격적인 설정조차 그에게는 도덕적 논쟁의 대상이 아니라 큰 손 고객의 주문을 완벽하게 처리해낸 성공적인 사업성과였던 셈이다. 하지만 명백히 구체제에 기대고 있던 프라고나르의 몰락은 필연적이었다.
그럼에도 프라고나르는 죽지 않았다. 잠깐 고향으로 도피해 있다가 다시 파리로 와선 놀랍게도 전혀 다른 직업을 찾았다. 자신이 머무르던 루브르궁전이 공공미술관으로 변모하는 격변기에 그는 국가가 압수한 미술품의 목록을 작성하고 배치를 결정하거나 다른 작가들의 그림을 수선하는 일을 맡은 것이다.
월급은 꼬박꼬박 들어왔으나 화가로서의 명성은 이미 땅에 떨어져 있었다. 한때 귀족의 거실을 화려하게 장식하며 높은 몸값을 자랑하던 프라고나르의 그림들은 이제 철 지난 유행가 취급을 받았다. 그 비참한 가치 하락을 묵묵히 받아들이며 그는 다시 서류가 쌓인 책상 앞에 앉은 것이다. 살아생전 자신의 작품이 쓰레기 취급을 받는 과정을 생생히 목도하면서도 바로 그 자리에서 서류작업을 할 수 있는 그는 생계형 인간이었다.
2021년 발견된 ‘책 읽는 철학자’ 경매서 103억원 낙찰
1806년 곤궁한 생활 끝에 세상을 떠난 이후에도 프라고나르의 작품은 한순간의 덧없는 쾌락을 그린 그림으로 미술사의 뒤안길에 머물러 있었다. 경매장에서 헐값에 팔리고 방치됐던 그의 작품이 재평가를 받은 것은 19세기 후반에 이르러서였다. 그리고 사후 200여년이 지난 2021년 6월, 프랑스의 소도시 상파뉴의 경매장에 프라고나르의 새로운 그림 한 점이 나타나자 미술애호가들을 흥분시켰다. 1779년 경매에 마지막으로 모습을 보인 뒤 이후 행방이 묘연했던 ‘책 읽는 철학자’(1767∼1770)였다. 어느 아파트 방구석에서 먼지를 뒤집어쓴 채 우연히 발견된 작품은 바로 감정에 들어갔고 마침내 프라고나르가 연작으로 그리던 ‘공상의 인물’ 중 한 점으로 드러났다. 경매에서 그림은 768만유로(당시 약 103억원)에 낙찰됐다. 독일 함부르크미술관에 소장돼 있던, 같은 주제와 기법으로 그린 또 다른 ‘책 읽는 철학자’(1767∼1770)도 덩달아 주목을 받았다.


이미 프라고나르는 알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어떤 인생은 덤불 속에서 튀어 오르는 연인의 구두처럼 경쾌하지만, 어떤 인생은 홀로 낡은 책장을 넘기며 진리를 찾는 고독한 여정임을 말이다. ‘그네’가 인생의 덧없는 찰나를 그린 것이라면 ‘책 읽는 철학자’는 유한한 인간이 열망하는 진실을 그린 것이다. ‘그네’가 세속적인 생계형 화가의 목소리라면 ‘책 읽는 철학자’는 그 화려함 뒤에 숨은 화가의 깊은 침묵이었다.
△이윤희 미술평론가는…
1970년생. 대학을 다니던 20대 어느 겨울, 유럽행 비행기에 오른 것이 인생에 미술을 들인 결정적 계기가 됐다. 어느 미술관에서 마주친 렘브란트의 ‘어머니 초상’이란 작품이 발을 붙들었다. 뭔가 꿈틀거리는 게 올라왔다. 세상을 감동시킨 수많은 작품이 품은 이야기를 가지고 싶다는 열망과 함께였다. 이화여대 독문학과를 졸업한 뒤 동대학원 미술사학과에 진학해 본격적으로 미술의 역사, 미술의 말을 공부했다. 이후 ‘공간’ 지 미술기자로 출발해 대전시립미술관 학예실장, 아트센터 화이트블럭 학예실장, 청주시립미술관 학예실장, 수원시립미술관 학예과장 등을 거쳤고, 지금은 이화여대·추계예대 등에서 미술이론을 강의하며 오래전 렘브란트의 감동을 넓혀가고 있다. 번역서로 ‘그림자의 짧은 역사’(2006), ‘포토몽타주’(2003), ‘바디스케이프’(1999)가 있으며 저서로는 ‘불편한 시선: 여성의 눈으로 파헤치는 그림 속 불편한 진실’(2022), ‘꿈꾸는 방: 여성과 공간의 미술사’(2023) 등이 있다.
오현주 (euanoh@edail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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