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무대는 세계여야만 한다…"포니 수출 때부터 음악공장 돌렸죠"

이지현 2026. 4. 3. 07: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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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종석의 파워인터뷰] 김민 코리안 챔버 오케스트라 음악감독(예술원 부회장)
80여년 인생이라는 악보에 바이올린 즉흥 연주 한판
연주자 교육자 기획자 리더 실내악 개척자 등 활약
“해외무대에서 제대로 평가받겠다는 일념으로 연주”
“청중의 수준 높아져야 연주자 수준 더 높아질 수 있어”

우리 사회에 따뜻함을 전해온 예종석 한양대 명예교수가 대한민국 경제, 사회, 문화 등 각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낸 명사들과의 릴레이 인터뷰를 진행합니다. 그들의 경험을 통해 얻은 교훈을 공유함으로써 독자들에게 깊이 있는 통찰과 영감을 제공하겠습니다. <편집자 주>

김민 코리안챔버오케스트라 음악감독이 예종석 명예대기자와 파워인터뷰를 하고 함박웃음을 터뜨리고 있다.(사진=이영훈 기자)
[대담=예종석 명예대기자(한양대 명예교수)·정리=이지현 기자] “나는 늘 음악공장의 공장장처럼 살았어요. 이것저것 정말 많이 했거든요.”

올해 창단 61주년을 맞은 국내 최장수 실내악단인 ‘코리안챔버오케스트라’(KCO)의 리더이자 음악감독인 김민(84) 서울대 명예교수는 자신의 음악 인생을 이렇게 돌아봤다. 반세기가 훌쩍 넘는 세월 동안 무대와 교육, 오케스트라 운영의 최전선을 오가며 쉼 없이 달려온 그의 삶을 한 문장으로 압축한 표현이다.

KCO는 1965년 첼리스트이자 서울대 음대 교수를 지낸 전봉초 명예교수가 ‘서울바로크합주단’이라는 이름으로 창단했다. 클래식 음악이 자리잡기 전부터 실내악이라는 장르를 대중에게 선보인 것이다. 지난 2015년 창단 50주년을 맞아 현재의 명칭으로 바뀌었다.

46년째 이 악단을 이끌어온 김민 서울대 음대 명예교수는 KCO를 세계적인 수준의 챔버 오케스트라로 성장시킨 주역이자 한국 클래식 음악계의 살아 있는 역사로 평가받는다. 김 교수는 “우리가 더 잘할 수 있는 부분이 분명히 있다고 생각했다”며 “한국에서 뿐만 아니라 해외에서도 인정받는 오케스트라가 되자는 목표로 정말 치열하게 연주했다”고 회상했다.

“국내보다 오히려 해외 무대에서 평가받겠다는 각오로 하나하나 쌓아 올린 시간이었다”는 김 교수의 말 속에는 반세기 가까운 세월 동안 악단을 이끌어온 그의 집요함과 자부심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그의 이야기가 궁금해졌다.

-바이올린을 시작한 계기는.

△집안 분위기 자체가 음악과 가까웠다. 어머니는 이화여대 전신인 이화여전에서 선교사에게 피아노를 배웠다. 당시로서는 상당히 앞서간 ‘신여성’이었다. 해방 전에는 피아노를 배우면 교사로 임용되던 시절이라 교사로 재직했고 광복 이후에도 숙명여고와 동덕여고에서 음악교사로 근무하셨다. 아버지도 사범학교를 나온 교사였다. 서양 문화를 일찍 접한 분이라 음악을 무척 좋아했다. 레코드판을 모으고 직접 플루트를 연주하셨다. 내가 태어난 뒤 부모님이 ‘아들에게 음악을 시켜야겠다’는 생각을 하셨다고 했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지만 아기 때부터 라디오에서 음악이 나오면 벌떡 일어나 북을 두드리며 리듬을 맞췄다고 한다. 유치원 때는 피아노를 배웠고 1년쯤 지나 바이올린을 시작하게 됐다. 그때가 1948년에서 1949년 무렵의 일이다.

-당시 남자아이에게 음악을 시키는 건 흔치 않은 일이었다.

△솔직히 말하면 나는 바이올린이 너무 싫었다. 정말 끔찍할 정도였다. 부모님의 권유라기보다는 거의 강요로 배우기 시작했다. 스스로 좋아해서 시작한 게 아니라 그랬는지 매일 정해진 시간에 연습해야 하는 게 어린아이로서는 너무 힘들었다. 아버지는 가부장적인 교육자 스타일로 상당히 엄격했다. 초등학교 3학년 때 한국전쟁이 터지면서 바이올린 연습도 멈췄다. 그 시절은 정말 죽느냐 사느냐의 시간이었다. 1·4 후퇴 때 너무 놀라 제주도까지 피난을 갔는데, 거기까지 가는 데 몇 달이 걸렸는지도 모른다. 당시에 바로 밑 여동생을 폐렴으로 잃었다. 전쟁의 기억은 지금도 깊은 트라우마로 남아 있다.

-그러다 어떻게 다시 바이올린을 잡게 된 건가.

△피난 중에도 아버지는 바이올린을 꼭 챙겼다. 부산으로 옮긴 뒤 친분이 있던 해군 군악대장에게 나의 음악 지도를 부탁했고 그렇게 아버지의 정성에 의해 다시 바이올린을 잡았다. 하지만 여전히 하기는 싫었다. 다행히 선생님이 워낙 바빴다. 집엔 교습에 간다고 나와선 국제시장에서 놀았다. 사실 난 음악보다 미술에 관심이 더 많았다. 아버지 책에 보이는 대로 그림을 그렸다. 초등학교 4학년 때 나간 사생대회에서 1등을 한 뒤로는 나가기만 하면 늘 1등이었다. 중학교에 들어가선 음악반이 아닌 미술반에 들어갔다. 당시 미술 선생님들이 많이 아껴줬다.

-그런데 왜 가출했나.

△자꾸만 부모님은 음악을 하라고 압박했다. 중학교 1학년 여름방학 때였다. 다른 걸로 성공해서 돌아오겠다고 마음먹고 피난 때 머물던 제주의 집으로 내려갔다. 그때 어떻게 거기까지 갔는지 지금은 기억도 잘 나지 않는다. 그런데 그땐 일본으로 밀항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그게 되겠나. 결국 40일만에 거지꼴로 돌아왔다. 그제야 부모님도 두 손 두 발을 다 드셨다. 결국 하고 싶은 걸 하라고 했다. 그래서 한동안 음악을 완전히 중단했다가 한참 뒤인 고등학교 1학년 때 바이올린을 다시 시작했다.

-너무 늦은 건 아닌가.

△1954년에 서울예고가 처음 생겼다. 서울예고 입학원서 두 장을 두고 미술과 음악 중 진로를 고민했다. 아버지께서 미술보다 음악이 낫지 않겠느냐며 다시 음악으로 방향을 바꿨다. 당시 1학년이 65명이었는데, 남학생은 음악 3명, 미술 3명 총 6명뿐이었다. 임충섭 화백, 김경인 화백이 내 동기들이다. 음악으로 합격은 했는데 무지하게 창피했다. 요즘 말로 쫄았다. 그래서 기초부터 정말 열심히 했다. 그리고 2학년 때 전국 콩쿠르에서 1등을 했다.

-재능이 있다.

△한 번도 솔리스트를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수업 중에 합주가 있었는데, 한 학년 후배들인 첼리스트 정명화, 피아니스트 윤미재와 트리오를 만들었다. 열 몇명이서 현악 합주도 했다. 그때가 가장 재밌었다.

-실내악에 재미를 붙였다.

△너무너무 재미를 느꼈다. 빠져들면서 정말 신나게 했다. 서울대에 진학하자마자 학교 최초의 실내악 팀을 만들고 YWCA 강당에서 연주회를 열었다. 이후 서울대 음대 실내악단을 조직했고 그 흐름은 자연스럽게 오케스트라로 확장됐다. 당시 한국 음악계는 전쟁 직후 인재가 절대적으로 부족한 시기였다. 실내악을 잘한다는 소문 덕에 재학 중 KBS교향악단에도 합류했다. 주변의 인정을 받으니 공부를 더 해야겠다고 생각해 미국 유학을 준비했다.

김민 음악감독은 우여곡절 끝에 다시 바이올린을 잡게 된 이유를 설명하고 있다.(사진=이영훈 기자)

-미국으로 유학을 다녀왔나.

△아니다. 아버지의 사업이 부도나며 집안이 한순간에 무너졌다. 고별 독주회까지 마친 뒤였지만 유학도 음악도 모두 멈춰야 했다. 생활이 막막했다. 오케스트라 월급만으로는 버틸 수 없어 2가지 이상의 일을 병행해야했다. 음악을 더는 할 수 없겠다 싶어 깊은 슬럼프에 빠졌다. 젊었으니까 좌절도 컸다. 결국 바이올린을 내려놓고 잠적하듯 음악계를 떠났다. 당시 덕수궁 앞에서 클래식과 팝을 틀어주는 다방이 유명했다. 나도 해보면 잘될 것 같았다. 그래서 서울 청량리 오스카극장 근처에 있는 다방을 인수했다. 다방 이름은 ‘불국사’였다. 하지만 그마저도 1년만에 다 말아먹었다.

-다시 음악으로 돌아온 계기는.

△당시 서울시립교향악단의 김만복 지휘자께서 날 불러 부수석 자리를 주겠다고 제안했다. 어느날 출근하니 기존에 있던 사람들이 악장만 남고 다 나가버리는 것이 아닌가. 난 영문도 모르고 서 있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나 때문에 밀려난 사람이 있다보니 단원들이 단체로 항의 시위를 했던 거다. 결국 양보하라는 말까지 듣고 그 길로 나와버렸다. 당시 KBS교향악단 임원식 지휘자께서 내 소식을 듣고 불렀다. 그리고 파격적으로 부악장에 앉혔다.

-독일 유학은 그 이후인가.

△부악장으로 활동하다가 국비 장학금을 받고 독일로 갈 기회가 생겼다. 그런데 1967년 동백림사건(중앙정보부에서 발표한 동베를린 간첩단 사건)이 터졌다. 작곡가 윤이상 선생님이 주동자처럼 몰려 독일에서 붙잡혀 왔다. 유학생 40여 명이 납치되듯 끌려와 중형을 받았다. 독일 정부에서 유학생들을 풀어주지 않으면 절대로 추가 유학생을 받지 않겠다고 하니 풀어줬다. 대부분 망명 신청을 하고 국적을 바꿨다. 과거의 쓰라린 기억이다. 그때 독일과 한국의 사이가 크게 틀어졌다. 당시 나는 독일정부 장학금을 받아둔 상황이었는데 사건이 마무리되고 2년 뒤인 1969년에나 떠날 수 있었다.

-독일에서의 음악 생활은.

△1969년 스물다섯 살에 건너갔다. 이미 프로 연주자로서 경험이 있어 많은 도움이 되었다. 쾰른 챔버 오케스트라에서 악장을 맡았고 솔리스트와 단원을 오가며 무대에 섰다. 이후 베를린 라디오 오케스트라와 스위스 바젤 오케스트라에서도 연주했다.

-귀국을 결심하게 된 계기는.

△국립교향악단에서 창단 첫 미국 투어에 함께해 달라고 연락이 왔다. 단원 85명이 40일 동안 도는 규모가 있는 일정이었다. 처음엔 당장 돌아올 생각은 없었다. 독일에서 쌓아온 시간과 자리 역시 쉽게 내려놓을 수 없어서다. 하지만 마음은 흔들렸다. 독일 오케스트라 대표에게 상황을 말했더니 ‘다시 돌아올 수 있겠냐’고 묻더라. 그리고 결국 1년 휴가를 받았다. 그게 귀국으로 이어졌다.

-요즘 축구의 손흥민 수준이다.

△미국 투어를 마친 뒤 다시 독일로 돌아갔다. 선택은 끝난 듯 보였지만, 오히려 그때부터 고민이 깊어졌다. 한국에서 연주하며 느낀 감각이 쉽게 지워지지 않았다. ‘조금 더 해보면 좋겠다’는 생각이 마음 한편에 남았다. 그러나 베를린에는 여전히 하고 싶은 음악이 있었고 독일에서 이어가던 삶도 단단했다. 갈등은 길어졌다. 인생의 고비마다 그렇듯 답은 고민의 한가운데가 아니라 현실의 문을 두드리며 찾아왔다. 집안에 일이 생겨 잠시 귀국하게 되었고 그때 마침 서울대 교수 자리가 났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이게 기회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뒤를 돌아볼 틈도 없이 결정은 그렇게 내렸다. 이후의 삶은 한 방향으로만 흐르지 않았다. 연주자이자 교육자, 기획자이자 리더로 쉼 없이 움직였다.

-이후 코리안챔버오케스트라(KCO)를 맡았다.

△KCO의 전신인 서울바로크합주단은 1965년에 만들어졌다. 내가 대학 4학년 때 초대 악장이다. 독일에서 체계적인 실내악 시스템을 경험하고 나서 한국에서도 제대로 해보고 싶었다. 1979년에 전봉초 선생님에게서 악단을 넘겨받아 전면적으로 리뉴얼했고 1980년 11월 재창단 연주회를 했다. 그 이후 한 번도 쉬지 않고 지금까지 왔다.

-KCO의 목표는.

△서양음악은 우리 음악이 아니잖나. 그렇다면 본고장에서 인정받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한국에서만 잘하는 악단 말고 해외에서 평가받는 악단이 되고 싶었다. 그래서 정말 열심히 했다. 한때는 새벽 6시에 모여 연습하고 9시 출근 전에 흩어졌다. 그렇게 2년을 버텼다.

-해외 무대의 반응은 어땠나.

△스미소니언박물관에서 첫 미국 공연을 했다. 당시만 해도 한국 유물 정리가 제대로 안 돼 있던 시기였다. 마침 현대차에서 포니·엑셀을 처음 미국으로 수출할 때였다. 일본은 해외 수출 전 오케스트라나 가부키 공연을 먼저 한다. 현대차도 그런 연유에서 우리에게 스미소니언 한국 유물 정리 기념 연주를 제안했던 것 같다. 공연 후 워싱턴포스트, 뉴욕타임스에서 좋은 평가가 나왔다. ‘아, 우리도 되는구나’는 자신감을 얻었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해외 공연만 140회 넘게 했다. 한 번 나가면 3~4개국을 도니까, 30~40개국은 다닌 셈이다.

-관련 비용도 만만치 않을 거 같다.

△오케스트라나 실내악단의 비용은 항공, 호텔, 지휘자, 연주자 출연료까지 다 포함된다. 솔로 연주는 그 사람만 챙기면 되지만, 단체는 규모가 커지니까 비용이 훨씬 많이 든다. 예를 들어 20명이 움직이면 항공료로 1인당 300만원만 잡아도 6000만원이다. 여기에 호텔, 식사, 체류 기간, 출연료까지 더해지면 금액이 확 커진다. 첼로 같은 악기는 좌석을 하나 더 사야 하니까 비용이 더 든다. 그래서 ‘공동 부담’ 개념이 필요하다. 초청 측이 일부를 부담하고 우리도 일부를 나누는 구조다. 요즘은 큰 오케스트라가 오면 기업 스폰서가 붙는다. 기업이 지원하고 대신 티켓이나 홍보 효과를 가져가는 방식이다. 그게 없으면 대형 오케스트라의 해외 투어는 사실상 어렵다.

김민(오른쪽) 음악감독이 예종석 대기자와 함께 포즈를 취하고 있다.(사진=이영훈 기자)

-KCO가 60년 가까이 이어올 수 있었던 원동력은.

△결국 평판이다. 해외에서 공연하면 리뷰가 나오잖나. 호평이 계속되면서 초청이 이어졌다. 그렇게 쌓여서 지금까지 온 거다. 사실 우리 돈만으로 해외 나가는 건 한두 번이면 끝난다. 지속하려면 실력과 평가 등 두 가지가 같이 있어야 한다.

-해외에서 인정받기 위해 가장 중요한 조건은.

△결국은 수준(퀄리티)다. 예술가든, 음악단이든, 가장 중요한 건 수준이다. 우선 국내에서라도 제대로 인정받을 수 있는 퀄리티가 돼야 한다.

-최근에는 평가 방식도 많이 달라졌다.

△정말 달라졌다. 이제는 공연하면 바로 사회관계망서비스(SNS)로 퍼지고 유튜브에도 다 올라간다. 예전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공개돼 있다. 지금은 거기서 다 갈린다. 연주자든 단체든, 실력이 그대로 드러나 숨길 수가 없다. 자연스럽게 서로 인정하는 기준도 생기고 있다. 결국 경쟁력도 그 안에서 결정된다. 사람들의 관심이 있는 곳은 결국 경쟁력이 있는 곳이다. 거기서 계속 영상이 올라오고 리뷰가 쌓이고 그게 다시 평가로 이어지는 구조다.

-국내 음악계의 수준을 끌어올리기 위해 필요한 것은.

△예술가의 수준도 중요하지만 청중의 수준이 더 높아져야 한다고 본다. 공연장을 찾는 관객이 제대로 보고 제대로 평가해줘야 한다. 장르별로 보는 눈이 생기고 좋은 연주를 정확하게 알아보는 힘이 있어야 한다.

-그것이 음악계 전체에 영향을 준다는 것인가.

△그렇다. 청중이 좋은 연주를 지지하고 인정해주면 그게 자연스럽게 연주자들에게 돌아간다. 그러면 아티스트의 수준도 같이 올라가게 된다. 그런데 요즘은 거꾸로 생각한다.

-어떤 점이 아쉽나.

△관객의 관심이 음악의 본질보다는 다른 데로 흐르는 경우가 많다. 작품이나 해석보다 연주자 외모나 이미지에 초점이 맞춰지기도 한다. 그러다 보면 연주자와 관객 사이에 간극이 생긴다.

-결국 본질을 보는 눈이 중요하다는 건가.

△그렇다. 음악의 본질을 제대로 보고 평가할 수 있는 청중이 많아지면 연주자들도 거기에 맞추기 위해 더 치열하게 노력하게 된다. 좋은 관객이 좋은 연주를 만든다고 생각한다.

-해외 활동과 교육을 병행하는 것도 쉽지 않았을 것 같다.

△몸이 열 개라도 모자랄 정도였다.(웃음) 여름마다 해외에서 국제 음악제에 참여했다. 1977년부터 2008년까지 거의 30년간은 매년 2~3개월씩 해외로 나갔다. 한 해에 1000명 넘는 음악가들이 모인다. 거기서 자연스럽게 교류가 이루어진다. 교수도 있고 연주자도 있고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면서 네트워크가 형성된다. 그 네트워크가 이후의 활동에도 굉장히 큰 도움이 된다. 지휘자나 연주자를 초청할 때도 그렇다. 결국 음악도 사람과 사람이 하는 일이다. 서로 알고 신뢰가 쌓이면 훨씬 깊이 있는 작업이 가능해진다.

-향후 계획은.

△지금 단원이 60명 정도 되는데 앞으로 어떻게 이어갈지 고민이 많다. 내 임기 동안 정리할 건 정리하며 준비할 계획이다.

김민 음악감독은 "본질을 보는 눈이 있어야 한다. 좋은 관객이 좋은 연주를 만든다"고 강조했다. (사진= 이영훈 기자)
■김민 음악감독

△1942년 서울 △서울예술고 △서울대 음대 △독일 함부르크 국립음악원 석사 △쾰른 체임버 오케스트라 △북독일방송교향악단 △베를린 방송교향악단 △KBS교향악단 악장 △국립교향악단 부악장 및 악장 △서울음대 교수 △코리안 심포니 오케스트라 이사장 △서울국제음악제(SIMF) 예술감독 △서울윤이상앙상블 음악감독 △대한민국예술원 부회장 △현 코리안챔버오케스트라 음악감독

이지현 (ljh423@edail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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