숫자는 어떻게 증거가 되는가 [BKL 공정거래리포트]

2026. 4. 3. 0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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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훈 법무법인 태평양 변호사
반사실적 세계를 묻는 질문
공정거래 사건에서 가장 어려운 질문은 의외로 단순하다. ‘이 행위가 없었더라면 시장은 어떻게 달라졌을까.’

담합이든, 시장지배적지위 남용이든, 혹은 경쟁제한적 정보교환이든 문제의 출발점은 같다. 실제로 관측된 시장 결과와, 위법행위가 없었을 경우의 가상적 상황(counterfactual, 비교를 위한 가상의 시장) 사이의 차이를 어떻게 입증할 것인가의 문제다. 이 간극을 메우는 도구가 바로 계량경제분석이다.

과거에는 문서, 진술, 정황증거가 판단의 중심이었다. 그러나 시장 환경이 복잡해지고, 명시적인 합의가 없어도 가격이나 거래조건에 변화가 나타나는 사례가 늘어나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이 과정에서 데이터에 기반한 분석은 보조자료를 넘어 판단의 주요 근거로 자리 잡고 있다.

대표적인 예가 가격 분석이다. 가격이 올랐다는 사실 자체보다 중요한 것은 왜 올랐는가이다. 그 상승이 경쟁제한 행위 때문인지, 아니면 비용 증가나 수요 변화 때문인지를 구분해야 한다.

이를 위해 이중차분(Difference-in-Differences, 두 집단의 전후 변화를 비교하는 방법)이나 회귀분석 같은 기법이 사용된다. 예를 들어, 영향을 받은 시장과 그렇지 않은 시장을 비교해 가격 변화의 차이를 살펴보는 방식이다. 달리 말해 ‘이 행위가 없었다면 가격은 어디에 있었을까’를 추정하는 작업이다.

문제는 이러한 분석이 객관적 사실이 아니라 ‘추정’이라는 점이다. 어떤 데이터를 선택하고, 어떤 기준으로 비교하며, 어떤 기간을 분석할 것인지에 따라 결론은 달라질 수 있다. 같은 데이터를 두고도 전혀 다른 해석이 나오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분석은 충돌 속에서 검증된다
이 때문에 계량경제분석은 강점과 한계를 동시에 가진다. 강점은 명확하다. 직관이 아니라 데이터에 기반하여 경쟁제한 효과를 정량화할 수 있다는 점이다. 이는 특히 손해배상이나 과징금 산정과 같이 영향을 구체적으로 따져야 하는 영역에서 결정적인 의미를 가진다. ‘얼마나 나빴는가’를 숫자로 보여줄 수 있기 때문이다.

반면 한계 역시 분명하다. 이러한 분석은 현실을 단순화한 모델 위에서 이루어지며, 그 전제가 달라지면 결과도 달라질 수밖에 없다. 특히 공정거래 사건에서는 시장 구조, 경쟁 상황, 외부 요인 등 다양한 요소를 완벽하게 반영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어렵기 때문에, 분석의 불확실성이 내재되어 있다.

이 지점에서 법과 분석 사이의 긴장이 발생한다. 법은 명확성과 예측가능성을 요구하지만, 계량경제분석은 확률과 추정의 언어로 말하기 때문이다. 같은 분석 결과라도 법원이 어떤 기준을 적용하느냐, 경쟁당국이 어떻게 평가하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의미를 가질 수 있다.

그래서 중요한 것은 분석 그 자체보다, 그것이 어떤 과정을 거쳐 도출되었는가이다. 어떤 방법론이 채택되었는지, 그 선택이 왜 합리적인지, 다른 설명 가능성은 충분히 검토되었는지가 함께 평가되어야 한다. 계량경제분석의 신뢰성은 서로 다른 분석 간의 충돌 과정에서 형성된다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미국의 경쟁법 실무에서는 이러한 구조가 비교적 분명하게 드러난다. 당사자들은 각각 경제전문가를 선임하여 분석 보고서를 제출하고, 상대방의 방법론과 가정을 정면으로 비판한다. 법원은 이른바 도버트 기준(Daubert standard, 전문가 의견이 과학적으로 신뢰할 수 있는지를 따지는 기준)을 통해 해당 분석이 검증 가능한지, 학계에서 인정되는 방법인지 등을 따져본다.

[제미나이]
절차는 형식이 아니라 실질이다
우리나라 실무에도 의견제출과 반박의 기회는 형식적으로 보장되어 있다. 그러나 계량경제분석이 실질적인 대립적 검증을 거치는지는 별개의 문제다. 전문가 의견이 충분히 활용되지 않거나, 분석 결과가 검증 없이 그대로 판단의 근거로 받아들여진다면, 제도의 취지는 구현되기 어렵다. 그렇다면 절차가 제대로 작동하기 위한 조건은 무엇인가.

그 조건은 제도의 운용에 있다. 행정절차에서 청문과 의견제출의 기회가 보장되는 이유는 단순한 권리 보장을 넘어, 다양한 해석 가능성을 드러내기 위한 장치이다. 하나의 사실도 서로 다른 관점에서 해석될 수 있다는 전제를 제도적으로 반영한 것이다.

법원의 구조는 이 점을 더욱 분명하게 보여준다. 민사소송이든 행정소송이든, 판단은 언제나 양 당사자의 공격과 방어를 전제로 이루어진다. 각 당사자는 자신에게 유리한 사실과 논리를 제시하고, 상대방의 주장과 증거를 비판한다. 법원은 그 충돌의 과정을 거친 뒤에야 비로소 어느 쪽의 주장이 더 설득력 있는지를 판단한다.

계량경제분석도 다르지 않다. 하나의 분석이 제시되었다는 사실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그것은 대안적 가설과 방법론에 의해 시험되어야 하고, 그 과정에서 어떤 전제가 유지되고 어떤 부분이 흔들리는지가 드러나야 한다.

청문권, 의견제출권, 반박의 기회는 단순한 권리 보장의 문제가 아니라, 판단의 정확도를 높이기 위한 핵심적인 절차이다. 특히 계량적·전문적 판단이 개입되는 공정거래법 영역일수록, 이러한 절차적 장치는 더욱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행정과 사법이 오랜 시간에 걸쳐 발전시켜 온 절차의 구조는 바로 이 점을 전제로 한다. 서로 다른 주장들이 충분히 제시되고, 그 주장들이 끝까지 다투어지며, 그 과정 속에서 남는 것이 판단의 기초가 된다.

계량경제분석이 진정으로 설득력을 갖는 것은 분석이 제시되는 순간이 아니라, 그 분석이 반박과 의문을 통과한 이후다. 계량경제분석은 답을 주는 도구라기보다, 어떤 질문을 던질 것인지를 정하는 방식에 가깝다. 그리고 그 질문이 정교할수록, 비로소 숫자는 증거가 된다.

[BKL 공정거래리포트]에서는 변화하는 경쟁법 환경 속에서 기업이 직면하는 주요 규제 이슈, 공정거래 정책 동향, 주요 판례와 조사 사례를 분석하고 기업 경영과 의사결정에 도움이 될 수 있는 시사점을 지속적으로 공유하고자 합니다. 김진훈 변호사는 2009년부터 법무법인 태평양 공정거래그룹 파트너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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