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석재의 돌발史전 2.0] “천황의 명을 받들라”고? 우리가 몰랐던 안중근의 ‘다른 얼굴’

3월 27일 자 조선일보 A17면에, 나는 ‘안중근 의사 새로운 유묵 내용 찾았다’는 제목의 기사를 썼다. 안중근 의사의 순국일인 3월 26일, 안 의사의 유묵 200여 점 중 기존에 알려지지 않았던 유묵의 내용이 발굴됐다는 내용이었다. 안중근의사기념관이 밝힌 내용은, 만주 봉천(지금의 瀋陽)에서 발행된 일본계 중국어 신문 성경시보(盛京時報)의 3월 5일 자 ‘안중근 이하 수감자 근황’이란 제목의 기사에 이런 내용이 있다는 사실이 새로 발굴됐다는 것이다. 관동도독부의 히라이시 우진토(平石氏人) 고등법원장에게 줬다는 그 유묵의 내용은.
‘봉승황명공직신중(奉承皇命公直愼重)’. ‘천황의 명을 받들어 공평 정직하고 신중하라’는 뜻이었다.
이게 무슨 소린가?
자료를 발굴한 김월배 하얼빈대 교수는 이렇게 설명한다. “안 의사는 옥중에서 ‘동양평화론’을 집필하기 위해 ‘공정하고 신중하게 재판하라’는 의미를 전달했던 것이다. 당시 일본 제국주의자들이 메이지(明治) 일왕의 뜻을 제대로 헤아리지 못하고 동양의 평화를 어지럽히고 있음을 지적했다.”
아니, 이건 또 무슨 말인가?
기사엔 이런 댓글도 달렸다. ‘이게 뭔가? 안중근 의사가 일본 천황을 인정하고 존숭하고 있었던 것 아닌가? 아이고 헷갈리네.’
지금에서야 솔직하게 말하자면, 과연 이 기사를 지면에 써야 할지 고민을 했다. 불필요한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온 것은 보도할 필요가 있지 않겠느냐’는 데스크의 의견에 결과적으로 따랐다. 그리고 보충 설명이 필요하다는 판단이 들었다.
이제 그 부분에 대해 설명을 하고자 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대다수의 근현대사학자들과 보훈 관련 업무를 맡은 숱한 사람들이 좀처럼 얘기하지 않는, 어쩌면 우리를 당혹스럽게 할 수 있는, 안중근 의사의 ‘다른 얼굴’이 불가피하게 드러날 것이다. 이 글은 국내 최고 수준의 안중근·김구 전문가라 할 수 있는 도진순 창원대 명예교수에게 일부 자문을 구했다. 결론은 오직 필자의 의견이다. 끝까지 읽어 주시길 부탁드린다.
①안중근은 日王에 우호적인 입장이었나?
위 댓글을 단 독자의 질문에 단답형으로 대답한다면, ‘그렇다’. 안중근은 메이지 일왕을 인정하고 존숭했다. 안중근은 입헌군주론자였고, 메이지 유신과 그 이후의 조치를 통해 일본의 근대화를 성공적으로 이끌었다는 점에서 일왕을 우호적으로 평가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또한 이렇게 생각했다. ‘일왕은 동양 평화를 바라고 있는데, 이토 히로부미 같은 그 밑의 제국주의 정치인들이 임금의 뜻을 저버리고 이웃 나라를 무력으로 침략하고 있다.’
안중근은 공판 3일째 되는 1910년 2월 9일 이렇게 말하며 이토를 비판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존귀한 존재가 황제 폐하라고 한다면, 그분(메이지)을 함부로 범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자기(이토) 마음대로 침범한다는 것은 황제 폐하 이상의 자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이토의 행위는 모름지기 국민 된 자의 행위가 아니며, 또한 그가 양순한 국민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안중근은 심지어 이토 히로부미가 메이지 일왕의 아버지 고메이 일왕을 몰래 시해했다는, 항간에 떠돌던 음모론을 믿고 있었다. 안중근이 미조부치 다카오 검사의 심문을 받을 때 그 유명한 ‘이토의 죄악 15가지’를 써 제출했는데, 황후(왕비) 시해와 을사늑약, 정미 7조약 같은 한국 침략의 죄에 앞서 제1항목으로 나온 것이 ‘태황제 폐하를 시해한 대역부도의 일’이었다. 이 문서를 ‘누가 죄인인가’라는 삽입곡으로 넣은 뮤지컬 ‘영웅’에서는 이 제1항목을 아예 뺐다.
②그렇다면 고종 황제는 어떻게 평가하고 있었나?
독립국가 대한제국의 상징으로서의 황제에 대해서 안중근은 ‘절대 존숭’의 입장을 지녔다. 그러나 그것은 황제 개인의 능력을 높이 평가하는 것과는 거리가 무척 멀었다. 안중근은 1909년 11월 24일 미조부치와의 6회째 심문에서 이렇게 말했다. “박영효와 같은 (유능한) 인물을 제주도로 유배하고, 현재 이완용, 이지용, 송병준, 권중현, 이근택, 신기성, 조중응, 이병무 따위 전혀 쓸모없는 자들을 내각에 두고 정치를 시키고 있다. 그것은 정부의 죄이므로 정부를 근본부터 타파하지 않으면 한국은 자위할 수 없는 것이다.” 다시 읽어보자. 박영효로부터 시작되는 첫 번째 문장의 주어는 과연 누구인가? 고종 황제가 아닌 다른 사람을 상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1909년 12월 11일 제11차 공술에서 안중근은 이런 말도 했다. “한인은 입을 열면 충군애국이라 한다. 나는 산하 삼천리 이천만 동포를 위해 희생하려는 자로 황실을 위해 죽으려는 자가 아니다. 오늘날 한국의 쇠운을 불러온 것은 그 누구의 죄인가. 귀국인이 귀국 황실에 대한 관념으로 한국 사람들을 파고들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 어찌 나 한 사람만의 생각이겠는가.”
애써 돌려 말하고 있지만 ‘오늘날 한국의 쇠운을 불러온 죄를 지닌 사람은 바로 고종 황제’라는 말로 해석하는 사람이 많다. 나도 그렇다.
③러일전쟁 당시 일본이 이기길 바랐나?
‘이기길 바란’ 정도가 아니었다. 미완성 원고인 ‘동양평화론’의 서문을 보자.
“(러시아의) 악이 차고 죄가 넘쳐 신(神)과 사람이 다 같이 성낸 까닭에 하늘이 한 매듭을 내려 동해 가운데 조그마한 섬나라인 일본으로 하여금 이와 같은 강대국인 러시아를 만주 대륙에서 한 주먹으로 때려 눕히게 하였다. 누가 능히 이런 일을 헤아렸겠는가. 이것은 하늘에 순하고 땅의 배려를 얻은 것이며 사람의 정에 응하는 이치다.”
“쾌하도다 장하도다. 수백년래 행악하던 백인종의 선봉을 한 북소리로 크게 부수었다. 가히 천고의 희한한 일이며 만방이 기념할 자취다.”
본문에선 ‘러일전쟁 때 일본군은 한두 달 더 사력을 쏟아 나갔더라면 동으로 블라디보스토크, 북으로 하얼빈을 격파할 수 있었을 텐데 그렇게 하지 못해 애석하다’는 취지의 글을 남겼다.
안중근은 ‘동양평화론’에서 한·중·일 3국이 협력해 제국주의 서구 열강의 침략을 막아야 한다는 것과, 여순(旅順) 항구를 3국이 공동으로 관리하는 군사 항구로 만들어야 한다는 주장을 펼친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아주 훗날의 유럽공동체를 연상케 하는 주장이어서 많은 사람이 찬탄하는 대목이다. 이매뉴얼 칸트의 ‘영구평화론’으로부터 영향을 받았을 것이라는 분석도 있다. 그런데 그 바탕엔 동양 3국이 뭉쳐서 ‘수백 년 이래로 도덕을 까맣게 잊고 날로 무력을 일삼으며 경쟁하는 마음을 양성해서 조금도 기탄하는 바가 없는’ 구주(歐洲·유럽)에 맞서 대항해야 한다는 논리가 깔려 있었던 것이다. 지금의 시각으로 보면 대단히 강도 높은 인종주의라는 비판을 피할 수 없을 지경이다.

<결론> 안중근의 이 ‘얼굴들’을 지금 과연 어떻게 봐야 하는가?
대체로 학자 중에는 그런 사람을 찾아볼 수 없지만, 일반인 중 혹자는 일왕을 평화주의자로서 존숭하고 일본의 앞선 근대화를 예찬했다는 점에서 안중근을 ‘친일파’로 보기도 한다. 그러나 이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우리가 ‘친일파’라며 누군가를 비난할 때, 그 의미는 ‘일제의 침략과 약탈 정책을 지지하거나 협력한 자’를 말한다. 그런데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을 막기 위해 무장 투쟁을 벌였고, 스스로 몸을 던져 그 침략의 수괴를 사살한 사람을 어떻게 친일파라 할 수 있겠는가?
국권이 위태로웠던 19세기 말부터 해방 정국까지, 숱한 사람이 구국(救國)과 광복(光復)을 위해 노력했지만 그 노선을 걷는 모든 사람의 입장이 같은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정반대의 자리에서 맞서기도 했다. 젊은 시절 김구는 안중근의 부친인 안태훈의 집에 의탁한 적이 있었고, 안중근의 사후 줄곧 안중근의 가족들을 돌보려 노력했다. 그러나 1894년 동학 농민운동 당시 김구는 동학 접주였지만 안중근은 반대편인 동학 토벌대의 자리에 있었다.
세상 어느 위인(偉人)이 남긴 저서와 문서도 전체가 모두 금과옥조(金科玉條)로만 이뤄진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게다가 역사상의 인물이 세상에 남기는 것은 ‘해답’이라기보다 ‘문제’인 경우가 많다. 안중근은 불과 만 31세의 나이로 순국했다. 그의 사상은 분명 광채를 발하는 부분이 많았으나 결코 완정(完整)된 것이었다고 볼 수는 없다.
메이지 일왕이 동양평화를 원하고 있다는 것은 분명 잘못된 정보였다. 일제의 침략과 별도로 그들의 성공적인 근대화를 떼어 놓고 우호적인 시선을 보낸 것은 지금 시선으로 보면 비판이 필요한 부분이 있으나, 그때는 많은 한국인도 그 생각에 동의했다는 점을 유념해야 한다. 한·중·일의 ‘황인종’이 연합해 ‘백인종’에 대항해야 한다는 주장은 지금으로선 지나친 인종주의라 평가하지 않을 도리가 없지만 그것은 시대적 한계였을 것이다.
역사에 가정은 없다지만, 만약 그가 더 오래 살았더라면 상당 부분은 스스로 극복하고 고쳤을 부분이라 생각된다. 일본의 근대화가 탈아입구(脫亞入歐) 제국주의적 타국 침략으로 귀결될 수 밖에 없다는 사실도 어느 순간 깨달았을 것이다. 훨씬 훗날에 살고 있으며 더 많은 것을 알고 있는 우리가, 여태껏 몰랐던 안중근의 ‘다른 얼굴’을 알았다고 해서, 지금까지 줄곧 안중근에 대해 평가했던 긍정적인 요소들이 달라질 이유는 없다.
또 한 가지, 안중근의 다른 얼굴을 볼 때 반대로 생각해야 할 점이 있다. 일본이 훌륭한 점은 본받아야 한다는 의견이나, 일본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해야 한다는 주장이나, 필요에 의해 일본 제품을 구매하는 행위조차 ‘친일’로 매도하는 극단적인 태도야말로, 역사의 다면(多面)과 사고(思考)의 스펙트럼을 보지 못하는 낮은 수준의 단견(短見)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역사란 결코 단순하지 않다.

▶‘유석재의 돌발史전’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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