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 기록이 운명…남매가 학살 현장 다랑쉬굴에 바친 책들 [.txt]
“가자의 비극이 날마다…4·3은 계속되는 질문”

그 사태, 그 시절로 불린 4·3… 하지만 이곳에 인간이, 삶이 있었죠.
다랑쉬굴 입구에 다다르자, 두 사람은 이제 막 출간된 자신의 책들을 땅바닥에 내려놓았다. 허 기자는 복잡한 표정으로 “34년 만에 바치는 책”이라고 했고, 허 시인은 “(제주4·3 때 희생된) 여자와 아이들을 위하여 쓴 시”라고 했다. 귤, 물, 과자. 소박한 제물 앞에 조화처럼 피어난 새하얀 들꽃 한 송이가 보였다. “거기 꽃 피었습니까, 여긴 꽃 피젠 헴수다(여긴 꽃 피려 합니다).” 허 시인이 4·3에 바친 시구절 같은 봄의 전령이었다.

1992년 4월, 직접 다랑쉬굴에 들어가 취재했던 허 기자는 이곳에서 발견된 유해 11구의 진실을 기사로 알렸다. 토벌 작전의 희생자들로, 이 중엔 아이와 여성도 있었다. 토벌대는 다랑쉬굴에 숨은 사람들이 수류탄을 던져도 나오지 않자, 짚에 불을 붙여 질식사시켰다. 다랑쉬굴 사건은 4·3의 참상을 전국에 알렸고, 진상규명 운동을 시작하는 기폭제가 됐다. 유족들의 반대에도 주검은 서둘러 화장돼 바다에 뿌려졌다.
다랑쉬굴 앞 표지석에 적힌 글을 허 시인이 낭송했다. “여기에 인간이 있었다. 삶이 있었다./ 우리는 죽은 자들, 죽었으나 죽지 않았다./ 우리는 캄캄한 굴속 연기에 갇혀 연기로 떠도는 자들/ 사라지지 않는 자들이다.” 이 글을 쓴 이가 다름 아닌 허 시인이다.
허영선, 허호준 남매가 4·3을 맞아 각각 2권씩 책을 냈다. 두 사람은 제주에서 나고 자란 ‘4·3의 기록자’다. 1957년 제주에서 태어난 허영선 시인은 1980년 ‘심상’ 신인상으로 등단, 1981년부터 22년 동안 기자로 일했고 제민일보 편집부국장을 지냈으며 제주4·3연구소 소장을 역임했다. 그는 “남자들의 전쟁 틈바구니에서 가장 나약했던 존재인 여성과 어린이의 희생에 마음을 두고” 연대자이자 시인으로서 4·3을 문학적으로 승화시켜 왔다. 연구자로서는 2024년까지 5년 동안 ‘4·3과 여성 생활사 총서’ 5권 시리즈 발간을 주도했다.

동생 허호준 기자는 1963년생으로, 1989년 한겨레신문사에 입사해 36년간 4·3의 진실을 천착해 왔다. 언론인이자 정치학 박사로, 정년퇴직 뒤 현재는 일본 리쓰메이칸대학 코리아연구센터 객원연구원으로 일한다. 이번에 나온 ‘4·3, 기억의 폭풍 속으로’는 지난해 제13회 제주4·3평화문학상 논픽션 부문에 당선된 원고를 매만진 것이다. 다랑쉬굴 사건을 중심으로 남로당 무장대에 납치돼 산으로 끌려간 채진규(가명)와 스스로 산으로 들어간 이명복(가명)이란 두 인물을 주인공 삼아, 알려지지 않은 무장대의 생활과 국가 폭력, 그리고 인간 본성의 문제를 다뤘다.

“제주에서 기자로 일하면서 4·3과 대면할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습니다. 다랑쉬굴 취재를 계기로 4·3을 평생 과제로 삼았죠. 30년 이상의 작업이 될 줄은 몰랐지만요.”
이번에 함께 펴낸 ‘4·3, 아카이브로 본 역사’는 1945년 9월23일부터 1957년 8월9일까지 하루 단위의 역사를 100개의 장면으로 재구성했다. 37년간 한국, 일본, 미국에서 샅샅이 뒤져 발굴한 자료들을 광범위하게 모으고 집요하게 파헤쳤다. 노벨 문학상 수상자 한강의 ‘작별하지 않는다’가 세계적으로 알려지면서 이제 영국과 대만 등 외국 언론도 허 기자를 찾아온다.
“4·3은 최소 2만5천명에서 3만명이 몰살된 사건이었어요. 당시 제주는 매일 매 순간이 ‘장면’이었고, 하루하루가 ‘역사’였습니다. 여전히 밝혀야 할 그날의 진실들이 남아 있어요. 군경 토벌대, 서북청년단의 폭력을 알고 있지만 아직도 집단학살의 가해자와 지휘 체계를 모릅니다.”

허 기자는 이번 책에서 초토화의 중심인물 가운데 한명이었던 제2연대장 함병선이 제주도민들에게 ‘한라산의 호랑이’라는 별명으로 불렸고, 한국전쟁 시기 마지막 무장대에 대한 토벌 작전이 미군의 기획 속에 이뤄졌다는 사실도 밝혀냈다. 살아남은 제주 사람들이 끝없는 굶주림 속에서도 세금보다 더 많은 기부금을 강요받았고, 노동력을 착취당했다는 점도 분명히 했다. 긴박한 동북아 정세에서 제주는 지정학적으로도 위태로웠다.
“1949년 중국 장제스 정부가 제주를 폭격 기지로 제공해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제주는 냉전 초기 동아시아의 새로운 국제질서 재편 과정에서 외부 세력에 의한 전략적 관심의 대상이었습니다.”
허 기자가 제주를 국제사 속에 편입시키는 동안, 허 시인은 살아남은 자의 구술을 청하고 법정에서 진술을 들었다. 2021년 3월16일 제주지방법원 201호 법정에서는 4·3 시기 불법 군사재판으로 행방불명된 333인과 2인의 생존 수형인에 대한 재심청구 소송이 온종일 열렸다. 내란죄와 국가 전복 음모라는 죄명 아래 70여년을 숨죽여 살던 이들이었다. 허 시인은 “피고인 각 무죄!” 이 여섯 글자를 들으려고 70년을 기다린 사람들의 이야기를 두권의 시집으로 펴냈다. ‘법 아닌 법 앞에서’가 희생자들의 명예와 회복을 다룬 법정 일기라면, ‘우린 천둥의 밤을 지나온 자들이어서’는 그들을 애도하는 진혼곡이다.


“아무것도 모르는 할머니들이 재판장 앞에서 진술하는 장면 자체가 하나의 현장이고 문학이자 드라마였어요. 연좌제 걸린다고 ‘속솜허라’(숨죽여라)던 할머니, 할아버지, 어머니 밑에서 자란 70~80대 자식들이 답답해하면서 얼굴을 감싸고 한참 앉았다 갔죠. ‘오늘이 아버지 생일날’이라며 ‘아버지 제사상에 무죄를 올린다’고도 말했어요.”
허 시인은 1978년 발표된 현기영의 소설 ‘순이삼촌’을 통해 4·3을 본격적으로 알게 됐고, 일기장에 “이상한 예감이 든다”고 썼다. “평생 4·3에 얽혀 살 것 같다는 기시감을 느꼈던 거 같아요.” 허 기자는 부산에서 군 생활을 마치고 1987년 복학한 뒤 조금씩 4·3에 빠져들었다. 1989년 기자가 된 뒤 본격적으로 취재와 연구를 거듭했고 4·3을 ‘공식 역사’에 등재하기 시작했다. 2001년엔 연차 휴가를 내고 자비로 미국에 가서 기밀문서를 찾기도 했다. 미 군정기에 일어난 4·3의 진압 과정에서 제주도 경비대에 배치된 미군 고문관들의 흔적을 추적하면서 그들을 결국 직접 만났고, 집요하게 추궁해 증언을 들었다. 2024년 마침내 미국 국무부에 ‘4·3에 대한 미국의 입장’을 물어 76년 만에 공식적인 답변을 받아냈다. 미 국무부는 “비극적인 사건”이며 “잊지 말아야 한다”는 입장을 내놨다.
“4·3엔 제대로 된 이름이 없었습니다. 모두가 ‘그 사태, 그 사건, 그 시절’이라고 말했죠. 이데올로기 문제라고 생각해요. 군사독재 시기를 지나면서 ‘4·3은 공산폭동’이라는 것이 워낙 뿌리 깊게 자리 잡았기 때문입니다. 당시 기자들도 역사의식이 없었어요. 분위기가 바뀐 계기는 1987년 민주화 운동, 5·18 청문회였어요.”(허호준)

남매의 가족 또한 4·3과 연루됐다. 아버지의 형제들이 죽고, 아버지도 1년 남짓 제주 수용소와 육지 형무소에서 수형 생활을 했다. 외할아버지는 징역 1년, 외삼촌은 징역을 7년6개월이나 살았다. 양가 모두 4·3 때 희생되었으나 집안에서 그에 대한 이야기는 거의 나누지 못했다. ‘속솜허라’는 무조건 지켜야 하는 군부독재 시절의 정언명령이었다.
“공동체 자체가 파괴된 사건이었고, 제주섬 전체가 4·3의 피로 얼룩져 있었습니다. 제일 힘들었던 게 침묵이었어요. 집에서도 다들 입을 다물고 ‘속솜허라’고 말했어요. 집집마다 4·3 가족사가 없는 곳이 없었죠.”(허영선)
허 시인은 “단 하나의 조각”으로 진실을 파고들었다. 밭일하다 형무소에 수감됐던 할아버지의 손자, 아이들을 위협하는 경찰에 항의했다가 행방불명된 청년의 동생, 민간인 학살터인 정뜨르 비행장에서 유해가 발견된 남자의 배우자 등의 이야기를 듣고 시를 썼다. 특히 “울어야 할 철에 울지 못했던 그런 아이들” 이야기가 눈에 밟혔다.

“구순 할머니께 4·3 때 이야기를 해달라고 하면 ‘별 하나가 무사 경 반짝반짝한 거라’라고 해요. 어린 시절 피난처에서 바라봤을, 철없이 예쁘게만 보였던 별, 그런 경험이 거의 80년이 지난 지금까지 뇌리에 박혀 있는 것이죠. 4·3에서 10명이 죽었으면 그중 1명은 아이였어요. 이런 통계는 무차별 학살, 특히 아동 학살의 규모를 보여줍니다.”(허영선)
허 시인은 2004년 두번째 시집 ‘뿌리의 노래’부터 본격적으로 여성과 아이들의 희생과 고통을 표현했다. 가장 널리 알려진 대표시 ‘무명천 할머니―월령리 진아영’은 서른다섯이던 1949년 1월, 경찰이 쏜 총탄에 턱을 잃고 평생 무명천으로 턱부위를 감싼 채 고통받다 아흔에 세상을 떠난 할머니의 이야기다.
“저는 ‘무명천 할머니’의 ‘끅끅 막힌 목젖의 음운’, 그 고통, 그 몸의 소리를 들었어요. 이번에도 법정에서 70년 만에 국가의 답을 들은 할머니의 마지막 한마디, ‘헛, 참’, 그 소리를 똑똑히 제 귀로 들었죠. 그런 목소리가 파도치듯 제게 다가왔어요.”
두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며 해 질 녘 제주 4·3평화공원을 찾았다. 2008년 3월28일 문을 연 이곳의 행방불명인 표석에는 주검을 찾지 못한 희생자 표석 4138기가 설치돼 말없이 학살의 규모를 증언하고 있었다. “4·3이 되면 마을마다 사람들이 이곳을 찾아 제수를 놓고 제를 지내며 이름을 닦기도 한다”고 허 시인은 말했다.

이곳을 상징하는 대표적 조형물인 ‘비설’(飛雪) 조각상 쪽으로 발걸음을 옮기자, 조각을 에워싼 현무암의 벽에서 제주 전래 자장가인 ‘웡이자랑’이 구슬프게 흘러나왔다. 이 등신대 조각상의 주인공 변병생(변병옥)은 1949년 1월6일 눈 내리던 날, 봉개리 한라산 중산간 지대에서 젖먹이 딸을 품에 안은 채 총탄에 맞아 쓰러졌다. 토벌대는 앞서 언급한 ‘한라산의 호랑이’, 함병선 부대였다. 허 기자가 찾아낸 이날 신문에서는 ‘함병선의 영웅적 전투’ 기사로 온통 뒤덮여 있었다. 4시간 만에 무려 153명이 학살당했다는 기록이 있으니, 이 중 2명이 변병생 모녀일 터였다.
“지금 가자지구에서는 이 ‘비설’과 같은 일이 매일 일어나잖아요. 4·3은 과거의 사건이 아니라 지금도 우리 안에서 계속되는 질문입니다.”(허호준)
“사라지는, 살아지는 목소리를 사라지지 않게 붙잡아서 기록해야 하는 것 자체가 우리의 일이 아닐까 해요.”(허영선)

제주/이유진 선임기자 fro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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