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존 패션 뒤집은 ‘깃털 재킷’ ‘가죽 줄무늬 셔츠’… “이 시즌 가장 상쾌한 에너지 컬렉션”
신임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듀오
잭 맥콜로&라자로 에르난데스
스페인의 180년 유산
뉴욕의 창의적 엣지를 입다
“10점 만점에 10점!(perfect 10) 모든 필요한 것을 만족시킨 완벽한 쇼다. 모두들 진심에서 터져 나오는 기립 박수를 보내고 있었다.”
마치 올림픽 경기에서 전설의 ‘만점’을 받은 이들을 위한 찬사 같다. 예술성과 기술력을 두루 심사하는 국제 스포츠 경기에서 몇 년 만 아니, 몇십년 만에 한 번쯤 들리는 평가 구절이 이런 식이었다. ’10점 만점’이라는 구호는 ‘노력하는 천재’의 탄생을 기다리며 언제나 비워뒀던 자리 아닌가. 하지만 이곳은 스포츠 경기장도, 중계석도 아닌 패션쇼 현장. 과거 ‘패션 피플의 성지’로 불린 미 바니스 뉴욕의 수석 부사장이자 패션 디렉터 출신으로 현재 패션 컨설팅 회사를 이끄는 줄리 길하트가 로에베 쇼 직후 소셜 미디어에 올린 평이다.
지난해 봄 패션계를 강타한 핵폭탄급 뉴스의 주인공, LVMH 산하 스페인 럭셔리 하우스 로에베의 신임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듀오 잭 맥콜로(Jack McCollough)와 라자로 에르난데스(Lazaro Hernandez)를 향한 찬사였다. 전설적인 11년을 뒤로하고 떠난 조나단 앤더슨의 빈자리. 그 거대한 왕관을 이어받은 이는 ‘뉴욕의 자존심’이라 불리는 이들이었다. 현재 패션계가 가장 뜨겁게 환영하는 듀오 잭&라자로를 최근 단독으로 만났다. 얼마 전 프랑스 파리에서 2026 가을 겨울 쇼를 선보인 뒤, 미 뉴욕 버그도프 굿맨과 런던 행사까지 연일 쉴틈 없이 진행되는 강행군 뒤에 파리로 컴백한 이들을 온라인 화상 플랫폼인 ‘줌’으로 만났다. 어느덧 40대 중년에 접어든 이들이었지만, 경쾌한 에너지 덕분인지 마치 졸업 작품을 발표하던 청춘 그 자체였다.
이들은 “LVMH에서 연락이 왔을 때 바로 ‘예스(yes)’라고 했다”면서 “파리로 이사해 인생의 새로운 챕터를 시작하는 게 정말 재밌을 거라 생각했다”고 말했다. 대형 럭셔리 그룹으로의 이직에 대해 부담감이 없진 않았겠지만, 괜히 드러내지 않았다. 오히려 가볍게 즐기는 모습이었다. 그 홀가분함이야말로 로에베에 가져온 가장 신선한 공기였다. 잭&라자로는 “세계에서 두 번째로 오래된 럭셔리 하우스이자 올해 180주년을 맞은 로에베의 일원이 돼, 이 거대한 역사의 작은 부분이 된다는 것 자체가 영광”이라며 말을 이었다. “무엇보다 ‘자원’이 놀랍습니다. 저희의 아이디어를 실현할 수 있는 장인정신과 실행력이 엄청나죠. 나이가 들수록 삶이 진지해지고 큰 변화를 주는 게 두려워져서 안전한 길만 가려고 하잖아요. 그런데 이 기회가 왔고, 모든 것을 바꿔버리는 위험을 감수하며 새로운 챕터를 찾는 그 에너지를 다시 느끼고 싶었습니다.”
◇스페인의 180년 유산, 뉴욕의 ‘창의적 엣지(edge)’를 입다

줄리 길하트로 이야기를 연 것은, 수많은 잭&라자로 팬덤의 가장 상징적인 부분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잭&라자로 듀오가 미 파슨스 디자인 스쿨을 졸업한 뒤 지난 2022년 자신의 어머니들의 성(姓)을 합쳐 미국 뉴욕에서 선보인 ‘프로엔자 스쿨러’의 첫 컬렉션을 주문했던 이가 바로 줄리 길하트였다. 그녀의 회상을 되짚으면 미 바니스 뉴욕 바이어로 일할 당시 이 둘의 ‘작품’을 보고는 한 눈에 반해 백화점 매입 예산이 초과된 상태였음에도 불구하고 잭&라자로의 창의성에 반해 소량 주문했다고 했다. ‘될 거다’라는 직감은 정확히 맞았고, ‘제2’ ‘제3’의 프로엔자 스쿨러가 되고 싶다는 예비 디자이너들이 이어졌다. 미국적 조형성과 패기가 당대 ‘큰 손’들과 평론가를 사로잡은 23년 뒤, 한층 성숙해진 이 디자이너 듀오는 다시 ‘초심’으로 돌아가 새로운 심사대 위에 섰다. 그리고 결론은 여러분이 보는 대로. 미 버그도프 굿맨의 린다 파고 수석 부사장이 보그 비즈니스에 밝힌 내용이다. “잭과 라자로는 로에베의 코드와 자연스럽게 어우러지는 감각을 지니고 있음을 보여줬다. 하우스를 존중하면서도 완전히 자기다웠다. 늘 혁신적인 실루엣, 재해석된 드레싱 방식, 그리고 예술적인 텍스처와 소재 활용은 로에베와 완벽하게 맞아떨어지는 조합이다. 피날레가 끝나기도 전에 박수가 터져 나온 것도 전혀 놀랍지 않았다.”
지난해 선보인 첫 쇼는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로에베의 시그니처 소재인 가죽을 컬러블록 미니 드레스와 마치 조각작품 같은 조형미를 갖춘 재킷으로 재해석한 룩들이 등장하자마자 분위기는 달아올랐다. 가죽 스트라이프 드레스, 가죽을 마치 면이나 마처럼 주름잡아 스프레이 페인트 처리한 셔츠. 역시 가죽에 세밀한 레이저 커팅을 통해 깃털처럼 표현한 의상, 완벽히 구조화된 테일러링 재킷. 여기에 파스텔 색상의 V넥 스웨터와 양말만 바꾸면 무한한 색상이 탄생 가능한 투명 슈즈까지 관객들의 감탄을 자아냈다. 아카이브를 재해석해 길게 늘어뜨린 드레스나 러플 디테일이 있는 플라멩코 백 디자인 역시 박수받았다.
무엇보다 이들은 한때 사라질뻔했던 단어를 다시 수면 위에 오르게 했다. 바로 ‘잇백’이다. 이들이 재해석한 아마조나 백은 ‘아마조나 180’이란 이름으로 무대를 휘어잡았다. 1975년 첫 출시된 아마조나 백은 기존의 견고한 박스형에서 벗어나 부드럽고 유연한 실루엣, 싱글 핸들, 열려 있는 듯한 디테일을 더해 현대적 감각을 불어넣었다. 이는 로에베의 180주년을 기념하는 상징적 아이템으로 자리 잡았다. 핸들을 양쪽 대신 한쪽에만 달아 의도적으로 ‘어긋난’ 느낌을 준다. 잭&라자로는 인터뷰에서 “핸들 하나를 제거해 자연스럽게 아래로 처지는(슬라우치·Slouchy) 실루엣을 만들어 더 여유롭고 풀어진 듯한 감정을 실었다”고 말했다. 단 하나의 핸들 제거로 탄생한 이 역설적 아름다움은, 두 디자이너의 미학적 감각을 단번에 증명했다. 많은 평론가들이 그 자리에서 ‘잇백’이라 외쳤고, 이는 ‘숫자’로 증명됐다. 국내뿐 아니라 전 세계 여러 나라에서 ‘완판’ 행렬이다.
◇뉴욕의 쿨한 지성과 스페인의 뜨거운 심장, 공예적 하이테크로 미래를 그리다

잭과 라자로가 로에베에 도착한 뒤 가장 먼저 한 일은, 브랜드를 새로 칠하는 것이 아니라 브랜드의 뼈대를 다시 보이게 만드는 일이었다. 이들이 로에베를 맡으며 가장 강조한 것은 장인정신(craft), 스페인적 정체성(Spanishness), 개인적 감각(미국식 스포츠웨어)의 세 기둥이다. “패션에는 너무 많은 노이즈가 있다. 우리는 세 개의 기둥을 정했고, 매 시즌 그것을 반복하고 더 깊이 파고들 것이다. 그게 브랜드 정체성을 만드는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빠른 트렌드의 홍수 속에서 일관성과 깊이를 무기로 삼겠다는 선언이다. 이들은 또 “시즌별로 한가지에 더 묵직한 무게감을 두어 디자인 할 수 있지만, 이 세 가지 정신은 우리를 변함없이 지탱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들은 로에베를 스페인 장인정신의 유산으로 읽으면서도, 여기에 자신들이 오래 다뤄온 뉴욕식 구조감과 스포츠웨어 감각을 자연스럽게 이식했다. 그 결과 로에베는 더 조용한 혁신을 선택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꽤 분명한 방향 전환을 하고 있다.
장인정신은 단지 전통을 보존하는 장치가 아니라 오늘의 기술과 결합해 다시 태어나야 하고, 스페인성은 관념적인 수사가 아니라 컬러와 감정, 몸의 움직임으로 구현되어야 하며, 개인적 정체성은 브랜드 안에서 지워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선명해져야 한다는 것이다. 이 세 축은 로에베를 추상적인 럭셔리에서 감각적으로 체험되는 럭셔리로 바꾸고 있다.
이들이 로에베의 미래를 위해 던진 출사표 중 거대한 축은 ‘테크노 크래프트’라는 단어로 압축된다. 손으로 한 땀 한 땀 꿰매는 과거의 노스탤지어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최첨단 기술을 공예의 영역으로 끌어들인 것이다. 이번 2026봄여름 시즌에서 미국 신추상주의(하드 엣지· Hard-Edge)의 거장 엘스워스 켈리에 영감을 받은 이들은 엘스워스 켈리 작품에서 맛보는 원색의 색감뿐만 아니라 더 이상 더할 것도 덜어낼 것도 없이 완벽한 지점의 형태적 완성도를 끌어냈다. 이들이 평소에 존중한다고 밝힌 미 추상주의 미술가 도널드 저드의 작품에서도 엿볼 수 있는 부분이다.
“그들의 작품은 손으로 그려졌지만, 너무나 완벽해서 인간의 손길이 사라진 것처럼 보이죠. 우리가 지향하는 공예도 그렇습니다. 기술의 정점에서 손맛과 합일을 이루는, 극도로 현대적인 정교함이죠.” 로에베의 의상은 마치 3D 렌더링을 현실로 옮겨놓은 듯 에지 있으면서도 날렵하고, 때론 볼륨감이 살아나면서도 단정하다. “공예가 자칫 ‘할머니의 뜨개질’처럼 느껴지는 것은 경계하고 싶어요. 누군가 저희를 ‘테크노크래프트’라고 하더군요. 최신 기술을 사용해 ‘어제는 만들 수 없었지만 오늘은 만들 수 있는 것’을 창조하고자 합니다.”
수많은 브랜드가 ‘장인정신’을 외칠 때, 로에베는 ‘미래적 공예’의 큰 그림을 그려나가며 ‘우리는 가장 앞선 기술로 공예의 정의를 새로 쓴다’는 차별화된 메시지를 던진다. 글로벌 패션전문지 비즈니스오브패션(BoF)은 “잭과 라자로는 로에베를 ‘입을 수 없는 예술’에서 ‘소유하고 싶은 하이테크 기어’로 탈바꿈시켰다”면서 “그들의 테크노크래프트는 럭셔리 산업이 나아가야 할 지속 가능한 미래, 즉 기술을 통한 공정의 정교화를 보여준다”고 평했다. 기술에 익숙하고 혁신에 열광하는 젠지 세대 럭셔리 소비층에게 로에베를 ‘가장 쿨한 브랜드’로 각인시키고 있다.
◇자신을 드러내는 것, 가장 로에베적인 방식
“스페인에 처음 갔을 때 느낀 그 가족적인 따뜻함, 서로 껴안고 음식을 나누는 즐거움을 옷에 담고 싶었습니다. 지금 세상에는 이런 기쁨이 필요하니까요.”
스페인적 정체성(스페인성)은 우선 특유의 컬러감으로도 구현된다. 파리 패션 위크가 블랙과 화이트의 엄숙함에 잠겨 있을 때, 잭과 라자로의 로에베는 노랑, 빨강, 초록의 강렬한 원색으로 런웨이를 물들였다. 이는 스페인 문화 특유의 활기와 낙관주의(Optimism)를 주입하고 있다. 로에베의 컬러는 단순한 시각적 장치를 넘어 불확실한 시대를 살아가는 이들에게 전하는 위로와도 같다.
그런데 단순한 원색을 런웨이에 등장시킨 게 아니다. 균형감있게 계산된 행보다. 예를 들어 로에베에서 선보인 첫 시즌인 이번 봄여름 컬렉션의 경우 미국 화가 엘스워스 켈리의 강렬한 원색 페인팅’Yellow Panel with Red Curve’를 쇼장 입구에 걸어 스페인의 태양 아래 피어나는 색채를 표현했다. 이는 스페인 국기 속 정렬적 빨강과 노랑 등을 연결된다. 예술작품이 두 국가를 이어주는 각각의 정체성의 상징이면서도 이를 복합적인 기술을 이용해 하이패션으로 승화했다. 최근 선보인 가을 겨울 쇼에선 스페인의 또 다른 위대한 상징인 초현실주의를 의상으로 독해했다. 독일 조각가 코지마 폰 보닌(Cosima von Bonin)의 거대한 바다 생물 조각들 사이를 모델들이 거닌 런웨이는, 마치 살바도르 달리의 꿈처럼 낯설고도 매혹적이었다.
“스페인 특유의 색감과 그들이 인생을 즐기는 낙관적인 태도를 알리고 싶었습니다. 동시에 우리가 누구인지 부정할 수 없기에 ‘미국적 감성’을 넣었습니다. 몇 년 전 파리에서 컬렉션을 선보였을 때 프렌치 코드를 따라가려 했던 적이 있는데, 이번에는 그냥 저희 자신이 되자고 했어요. 그게 가장 솔직하고 올바른 방향이라고 생각했거든요.”
두 미국인 디자이너가 로에베에 가져온 가장 개인적인 선물은 스포츠 웨어 감각이다. 윈드브레이커(바람막이), 레이어드 셔츠, 루즈한 니트 같은 것들이 로에베의 조형적 언어와 결합해 소재와 기술 혁신을 통해 완전히 다른 차원으로 승화됐다. 즉 세세한 레이저 커팅으로 고급스러움과 소프티함을 또 다른 차원으로 결합한 깃털 재킷, 합판처럼 여러 겹의 가죽을 겹쳐 그라데이션 효과를 낸 줄무늬를 만든 셔츠, 그리고 3D 프린팅과 핸드페인팅으로 제작되어 수면 위 햇빛처럼 반짝이는 테리클로스 타월 소재 같은 원피스들이 무대를 장식했다. 투명 PVC 젤리 펌프스는 스타일링에 따라 ‘마음껏 신을 바꿔 신는다’는 개념을 뒤집은 유쾌한 ‘한 방’이었다. 미 뉴욕타임스는 “이 미국인 디자인 듀오는 ‘지금 미국은 도대체 무엇인가’라는 무거운 질문을 던지는 방식이 아니라, 미국을 상징하던 자유로움, 편안함, 거침없는 활기를 옷으로 강렬하게 환기시키는 방식으로. 자신을 드러낸다”고 평하면서 “이 시즌 가장 상쾌한 에너지를 선사한 컬렉션”이라고 규정했다. 또 “기술과 자신감으로 변모한 스포츠웨어를 통해 억지로 무언가를 증명하려 들지 않는 자신감. 그것이 바로 하나의 아메리칸 드림이 실현됐다”고 극찬했다.
이 듀오 디자이너는 ‘자신의 목소리를 낸다는 점’에서 K-컬처에도 깊은 애정을 드러냈다. 이들은 “한국이 문화를 수입하는 곳이 아니라, 스스로 생산해 전 세계로 수출하는 ‘자생적 창의성’의 중심지라는 점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고 밝혔다. “한국 스타들이 우리 쇼에 올 때마다 소셜 미디어가 폭발하는 걸 보며 그 에너지를 실감합니다. 한국은 자신들의 목소리를 낼 줄 아는 문화적 주권 국가죠. 그 점이 우리와 매우 닮아있습니다.”
잭&라자로가 로에베에서 시간을 보낸 지 이제 갓 1년. 그런데도 업계 전체가 이미 이 새로운 챕터에 기립박수를 보내고 있다. “패션은 살아남을 것”이라는 글로벌 패션지 보그의 문구처럼 잭과 라자로, 또 로에베 이 세 가지 축은 패션계를 넘어 현대 미학을 재구성하는 원동력으로 ‘영원히 살아남을’ 것 같다.
Copyright © 조선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