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병권의 묵묵]연극의 현실
일본의 연극인 사쿠라이 다이조는 자신이 ‘현장’이라고 느끼는 곳이면 어디든 텐트를 치고 연극을 하는 사람이다. 그는 자신의 텐트극장을 ‘상상력의 긴급피난처’라고 부른다. 그에 따르면 자본주의 도시는 전체가 극장이다. 여기서 우리는 모두 특정한 방식의 삶을, 다시 말해 특정한 퍼포먼스를 요구받는다. 텐트극장은 이런 현실에 맞서는 저항의 거점이자 일종의 대항극장이다. 아니, 이보다 더 절박한 것이다. 그에 따르면 텐트극장은 저항의 거점조차 만들 수 없을 때, 현실의 압도적 힘으로부터 상상력을 긴급히 피난시키는 곳이다.
그런데 나는 이것이 예술의 사명이 아닐까 생각한다. 현실로부터 상상력을 지켜내는 것 말이다. 인류학자 데이비드 그레이버에 따르면 ‘현실’을 뜻하는 ‘리얼(real)’이라는 단어의 용례 중에는 ‘왕’을 뜻하는 에스파냐어 ‘레알(real)’(영어로는 ‘royal’)에서 온 것들이 있다. 이를테면 부동산을 영어로 ‘real estate’라고 부르는 것은 애초에 그것이 ‘왕에게 귀속된 재산’이기 때문이다. 누군가 ‘현실적이 되었다’고 말할 때도 그렇다. 그것은 힘에 근거한 기존 질서를 수용한다는 뜻이다. 그래서 급진주의의 중요한 전통에는 ‘현실적이 되어라’를 거부하고 ‘상상력에 힘을!’이라고 외쳐온 사람들이 존재해왔다.
장애인들에게 있어 연극은
상상력의 피난처여야 한다
그러나 현실은 폭정의 무대
이제 새 공간이 필요하다
예술창작집단 ‘미친존재감 프로젝트’의 손성연이 연극을 하는 이유도 이와 다르지 않은 것 같다. 그는 <우리는 미쳤다!>(2021), <미친 집으로 초대합니다>(2022), <미친 식당>(2023), <매드 어사일럼>(2025) 등 작품을 기획하고 연출했다. 그에게도 연극은 피난처를 만드는 일이다. 비장애중심주의의 압도적 현실 때문에 말살 위험에 처한, 지금과는 다른 삶에 대한 상상력의 피난처 말이다.
작년에 펴낸 책 <미친존재감-사라졌던 미친공간이 돌아왔다>(화이트리버)에서 그는 “정말 연극을 하고 싶었다”고 말한다. “연극은 공간을 만드는 일”인데, 공간이야말로 미친존재에게 꼭 필요하다는 것이다. 미친존재에게는 자신을 솔직하게 드러낼 수 있는 무대도 없고, 편히 지낼 수 있는 집도 없으며, 일할 수 있는 회사도 없다. 그런데 연극에서는 현실과는 다른 공간들을 만들 수 있다. 연극을 통해 정신장애인은 무대에서 자신을 표현하고, 집으로 사람들을 초대하고, 식당에서 함께 일을 한다. 그의 연극들에서는 그가 그리는 세상이 이미 도래해 있다.
물론 연극은 사라지는 예술이다. 공연이 끝나면 공간도 사라진다. 그러나 배우들은 물론이고 나처럼 우연히 들렀던 사람들에게도 흔적이 남는다. 참석자들은 모두 이 흔적을 나눠 가진 채 공연장을 빠져나간다. 이것은 우리가 짧은 시간이나마 지금의 현실을 벗어난 적이 있다는 과거의 흔적이고, 우리에게 다른 현실은 가능하다는 미래의 흔적이다. 이 점에서 연극은 참으로 대단한 예술이다(상상력에 힘을!).
그러나 이것이 지금 연극의 현실은 아니다. 현실의 극장들은 장애인에게 공간을 허락하지 않는다. 대부분의 공연장에는 휠체어 이용 관객이 혼자서 들어갈 수 없고, 관객이 아닌 창작자로서 장애인이 공연할 수 있는 곳은 거의 없다. 물리적 공간만 그런 게 아니다. 창작 방법도, 연출 기법도, 배우의 발성과 몸짓도 모두가 ‘장애인 출입금지’다(연극협회에서는 이것을 ‘전문가 외 출입금지’라고 읽는다). 최소한 한국의 장애인들에게 연극은 상상력의 피난처이기는커녕 현실의 폭정이 상연되는 곳이다. 장애인들이 출입금지된 공간에서 ‘전문연극인들’은 다리를 끌기도 하고 눈을 희번덕거리기도 하면서, 틀에 박힌 관념에 따라 장애를 연출하고 연기한다. 장애인들에게는 현실 이상으로 참혹한 현실이 극장에 있다.
지난 3월19일 장애예술인들이 국가인권위원회에 차별진정을 제기했다. 지난해 9월 서울연극협회의 정회원 가입을 위한 면접심사 과정에서 벌어진 일 때문이다. 장애인들과 다수의 작품을 만들어온 극단 ‘무적의 무지개’ 진준엽 대표에게 한 심사위원이 회원가입을 거부하며 모욕적인 발언을 했다. 그는 작품에 참여한 장애인 배우들을 가리켜 “연극인이 아닌 것 같다”고 했고, 작품 활동을 본격 연극이라기보다는 장애인들을 대상으로 벌인 ‘좋은 일’ 정도로 취급했다. 논란이 커지자 그는 한 신문과의 인터뷰에서 회원 “승인 확률을 높일 방법을 안내”한 것이라고 했다(현실적이 되어라!). 더욱 경악할 일은 작년 12월 공식 사과문까지 올린 서울연극협회가 올해 이 논란의 당사자를 회장으로 선출했다는 사실이다.
장애인 차별의 현실은 이토록 압도적이다. 도무지 피난 갈 곳이 없다. 서울의 연극에는 상상력은 고사하고 “수치심도 반성도 없다”.

고병권 노들장애학궁리소 연구원
Copyright © 경향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특수부대 수백명 투입·이란군과 이틀간 ‘격렬 교전’···긴박했던 실종 미군 구출작전
- [단독]캄보디아 교도소에 ‘제2 박왕열’ 있다···“대량 마약 국내 유통, 송환 여러 번 좌절”
- [단독]‘이재명 망했다’던 유튜버 성제준, 음주운전 송치···면허정지 처분도
- 손흥민, 생애 첫 한 경기 4도움 폭발…에이징커브 논란 소속팀서 단번에 잠재웠다
- 대기권서 소멸했나···아르테미스 2호 탑재 국산 초소형 위성, 끝내 교신 실패
- [단독]서울시, 공무원 ‘자기돌봄 특별휴가’ 연 1일 추진···“번아웃·공직 이탈 막는다”
- [속보] 트럼프 “이란과 협상중···6일까지 합의 가능성”
- ‘세계 3대 디자인상’ 구두수선대·가로판매대 온다···서울시, 16년 만에 전면 개편
- [영상]걷는 빨래 건조대인 줄…세상에 없던 ‘이상한 로봇’ 등장
- ‘안젤리나 졸리 딸’ 샤일로가 K-팝 댄서로?···다영 뮤직비디오 티저 깜짝 등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