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읽기]왕은 없다?
세 번째로 열린 ‘노 킹스(No kings)’ 시위 참가자가 800만명을 넘어서며 최대 규모를 경신했다. 언론에 보도된 사진 가운데 가장 눈에 띈 장면은 미합중국 헌법 전문을 거대한 두루마리로 만들어 행진하는 뉴욕 시위대의 모습이었다. 그 첫머리에는 ‘우리 인민(we the people)’이라는 문구가 선명하게 새겨져 있다. 240년 동안 효력을 유지해온 헌법은 바로 이 문구의 주인공을 자신의 저자로 삼는다. 두루마리를 들고 행진하는 이들은 인민과 왕을 대비시키며, 미국의 건국정신에 ‘왕은 없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손바닥에 ‘왕’자를 쓴 사람을 대통령으로 모셔본 국가의 국민으로서도, 민주공화국에 왕의 자리는 없다는 사실은 진부한 진리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불확실성이 지배하는 시대에 더 많은 국가들이 권위주의의 유혹에 기울고 있다는 현실 또한 부정할 수 없다. 이는 ‘노 킹스’ 시위가 일어나고 있는 미국 정치가 드러내는 또 다른 진실이기도 하다. ‘우리 인민’의 정체성을 명확히 하려는 요청은 때로 권위주의적 통치자의 등장으로 이어진다. 더 많은 사람이 광장에 모일수록 스스로 통치하기가 오히려 더 어려워지기 때문이다. ‘우리 인민’은 언제나 대표자를 필요로 한다. 분열된 우리는 진정한 왕을 필요로 하는지도 모른다. 왕이 없다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
왕정을 이상으로 삼아온 오랜 전통에서 왕은 자신의 이익과 국가의 이익을 일치시킬 수 있는 유일한 존재로 그려졌다. 다른 대표자들은 각자의 이해관계에서 자유롭지 않지만 왕이야말로 분파를 넘어 하나의 질서를 보증할 수 있다는 논리다. 정치학자 에릭 넬슨의 해석에 따르면, 미국 건국 역시 이러한 이상과 무관하지 않았다. 건국을 주도한 이른바 ‘애국자’들은 왕당파였으며, 그들이 반대한 것은 영국의 국왕이 아니라 의회였다. 그들이 경계한 것은 단일한 권위가 아니라 타락한 다수였으며, 이 정신은 미국 대통령제에 담겼다.
황금을 사랑하고 모든 공식기구에 자신의 이름을 새겨넣기 좋아하는 트럼프는, 다시 위대해질 미국의 영광과 자신의 영광을 분리하지 않는 데에 진심인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임기제 대통령인 그는 영영 왕정의 이상을 구현할 수 없다. 미국 헌법은 왕정의 이상을 수용했지만 대통령의 임기를 제한하면서 그 이상을 불가능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대통령은 왕이지만 진정 왕일 수 없다. 이 기묘한 이중구조에서 부각되는 것은 권한보다는 책임이다. 국가와 국민 전체를 아우르라는 사실상 불가능한 요구다. 그리하여 끝끝내 부재하는 왕의 자리를 사유하는 일은 분열을 넘어서면서도 권위주의를 경계하는 시도가 된다.
왕이 될 수 없지만 왕이 되려고 하는 사람들과, 왕을 거부하면서도 진정한 왕을 기다리는 사람들의 모순 속에서 오늘날의 정치가 작동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어쩌면 왕을 기대하는 사람들의 열망과 그것이 불가능한 현실 사이에서, 어떤 대표자들은 공공의 이익과 사적인 이익을 혼동하게 만드는 빌미를 얻고 있는지 모른다. 현대 정치의 이 같은 맹점 속에서 누군가는 권위의 텅 빈 의자를 노리고 있다.
‘왕이 없다’는 구호가 권위주의로 경도되는 정치에 대한 경종이라면, 왕이 없는 시대에 왕을 사유하는 것은 권위의 경계를 세우는 일이다. 권위의 자리가 결코 비어 있을 수 없다는 사실을 직시하는 것이다. 폴란드 헌정에 대해 조언할 때 루소는 이러한 경고를 덧붙인 바 있다. “여러분! 법치를 확립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곳 어디에서나 실제 통치를 하는 것은 사람이라는 사실을 잊지 마세요.” 숭고해 보이는 헌법조차 ‘우리 인민’이라는 글자가 새겨진 텅 빈 권위의 의자가 될 수 있다. 그 의자에는 반드시 누군가 앉게 될 것이다. 왕은 사라졌지만 왕의 자리는 끝내 사라지지 않는다. 왕이 없는 공화국에서 왕을 사유해야 하는 이유다.

조무원 정치학 연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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