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적, 국가 바깥 ‘대안적 삶’의 설계자들[책과 삶]

배문규 기자 2026. 4. 2.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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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국의 악당
마커스 레디커 지음 | 박지순 옮김
갈무리 | 336쪽 | 2만2000원
18세기 서인도 제도와 미주 동부 해안에서 활동한 악명 높은 해적 ‘블랙비어드’ 에드워드 티치. <만국의 악당>은 대서양 해적의 ‘황금시대’인 1716~1726년을 중심으로 당시 활동한 해적을 기존 질서를 거부하고 다른 삶을 실험한 집단으로 조명한다. 갈무리 제공

300년 전 해적의 ‘황금시대’ 조명
전쟁 동원 뒤 일자리 잃은 선원들
저임금·구타·체벌 피해 해적으로
“범죄의 선택” 아닌 노동·생존전략
선장 직접 뽑고, 전체 의사 반영
여성 해적은 전투에도 적극 참여
젠더·계급 제약 넘어서는 공간

최근 아시아 곳곳의 반정부 시위 현장에선 낯익은 해적기가 자주 목격됐다. 밀짚모자를 쓴 해골, 만화 <원피스>의 주인공 루피가 이끄는 해적단의 깃발이다. 만화 속 세계정부라는 불의한 권력에 맞서는 밀짚모자 해적단이 고난 속에서도 웃음을 잃지 않는 저항의 상징으로 현실 세계와도 공명하고 있는 셈이다.

해적이 저항과 연대의 상징으로 호출되는 이들 장면은 <만국의 악당>이 던지는 질문과도 닿아 있다. “300년도 더 전에 활동했던 범죄자 집단이 왜 여전히 이렇게 인기가 많은가?” 마커스 레디커 피츠버그대 대서양사 석좌교수는 대서양 해적의 ‘황금시대’를 중심으로 해적을 범죄자나 낭만적 모험가로 바라보는 통념을 넘어 제국과 자본의 폭력에 밀려난 하층 계급의 대안적 사회 실험으로 조명한다.

책은 1726년 7월12일 해적 윌리엄 플라이가 보스턴의 교수대에 올라가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그의 몸놀림은 돛대에 오르는 선원처럼 경쾌했고, 손에는 작은 꽃다발이 들려 있었다. 풍파를 겪은 얼굴이었지만, “유쾌한 웃음”이 서려 있는 그에게서 죄책감이나 뉘우침 같은 것은 찾아볼 수 없었다. “별것 없는 부모”를 둔 가난한 사람이었던 갑판장 플라이는 선원들을 잔인하게 다룬 선장과 항해사들을 죽이고, 선상 질서를 새롭게 세웠다. 검은 깃발에 해골과 교차하는 뼈를 수놓은 ‘졸리 로저’를 내건 이들은, 배 이름을 ‘명예의 복수호’로 바꾼 후 일확천금의 꿈을 찾아 항해하다 붙잡혔다. 그는 선원들에 대한 “부당대우”를 항의하고, 선주들의 만행을 비판하다 최후를 맞았다.

이렇게 책에서 만나는 수십 명의 해적들은 그 시대의 근본적 문제와 닿아 있다. 황금시대(1650~1730년)에서도 이 책이 주목하는 시기는 해적 행위가 폭발적으로 늘어난 1716~1726년 약 10년이다. ‘블랙비어드’ 에드워드 티치, 바살러뮤 로버츠, 에드워드 로 등 <원피스>의 모티프가 된 해적들이 활개 친 당시, 4000명 안팎의 선원들이 검은 깃발 아래 집결했다 흩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스페인 왕위계승전쟁이 끝난 뒤 대서양에는 전시에 동원됐다가 일자리를 잃은 선원들이 넘쳐났다. 그런 잉여 노동력이 해적으로 재편됐던 당시 잉글랜드 등 유럽 주요국은 대서양 식민지 무역을 본격적으로 확대했다. 해적은 이 거대한 교역망, 특히 노예무역과 수송로를 교란하며 제국의 이익에 직접적인 위협으로 부상했다. 해적의 황금시대는 단순한 모험담의 배경이 아니라 노동과 자본, 권력과 주변부가 격렬하게 교차한 역사적 순간이었던 셈이다.

저자는 ‘아래로부터의 역사’의 관점으로 해적을 제국의 경계를 거스르는 다인종·다국적·다문화의 ‘잡색 부대’이자 착취당한 노동자 집단으로 조명한다. 당시 상선과 군함의 선원들은 매우 낮은 임금, 잔혹한 구타와 체벌, 임금 체불, 질병과 굶주림, 무제한적 선장의 권력 아래 놓여 있었다. 이런 삶이 너무나 견디기 어려웠기 때문에 많은 선원은 차라리 해적이 됐다. 단순히 “범죄의 선택”이 아니라, 다른 형태의 바다 위 노동과 생존 전략이었던 셈이다.

책에서 가장 인상적인 부분은 해적이 만들어낸 대안적 삶이다. 해적은 국가의 법을 거부했지만, 무법 상태가 아니라 분명한 규칙과 절차를 가진 공동체였다. 대표적인 것이 선장 선출 방식이다. 해적선에선 선원들이 직접 선장을 뽑고, 평의회나 전체 선원들의 의사에 따라 운영됐다. 다친 동료에게 일정한 보상을 지급하는 규칙은 오늘날 사회보장제도와 비슷한 측면이 있었다. 이들은 맹세를 통해 하나로 뭉쳤고, “정당하게 대우받는” 세계를 구축하려고 시도했다. “이 바다 약탈자들은 결코 ‘졸리 로저의 기치를 불명예로 내려 접히게 두지 않겠다’는 태도”를 보였는데, “그들의 자부심 넘치는 자기 인식”을 드러낸다.

이 시기 해적을 더욱 특별하게 만드는 것은 여성 해적 앤 보니와 메리 리드의 존재다. 두 사람은 남장을 한 채 배에 올랐고, 전투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남성의 영역인 바다에서 낯선 존재인 이들의 삶을 저자는 하층 계급 여성의 역사 속에 위치시킨다. 경제적 생존, 계급적 제약을 넘어서려 한 이들을 통해 해적선이 기존 젠더 질서에 균열을 내는 공간이었음을 보여준다.

책은 해적을 마냥 미화하지 않는다. 해적은 폭력을 썼고, 잔혹 행위를 저질렀다. 그럼에도 저자는 해적이 “인류 모두의 적”으로 호명된 진짜 이유를 묻는다. 책에 따르면 해적은 실제로 모든 사람의 적이라기보다, 상인, 노예무역 자본, 식민지 정부, 왕권의 적이었다. 수많은 사람을 노예로 만들고 강제노동으로 부를 축적한 지배 권력은 더 근본적인 폭력을 행사했다. 하지만 지배 권력에 대항하는 프롤레타리아 무법자 집단을 국가는 ‘만국의 악당’으로 선포했고, 대서양 자본주의 질서를 지키기 위한 절멸 캠페인으로 이어졌다.

‘졸리 로저’는 그저 해적기가 아니다. 해골과 교차한 뼈, 모래시계 같은 도상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메시지를 전했다. 이 상징이 오늘날에도 살아 있는 이유는, 그것이 단순한 문양이 아니라 기존 질서를 거부하고 다른 규칙을 상상하는 깃발이기 때문이다. 권력의 정당성을 의심하는 태도, 억압적 질서 바깥에 다른 공동체를 상상하는 태도를 담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해적을 사랑하는 가장 큰 이유는 그들이 반역자였기 때문이다. … 이 무법자들은 대담하고 반항적인 삶을 살았으며, 우리가 맞서 싸워야 할 강력한 권력자들과 억압적인 조건이 존재하는 한 우리는 그들을 기억해야 한다.”

배문규 기자 sobbell@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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