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국 온 듯한 착각"…백건우 손 끝에서 환생한 슈베르트
백건우 데뷔 70주년
슈베르트 음악은 완벽
인간 영역 아닌 것 같아
곡 제대로 해석하려면
적어도 3번 되돌아와야
그렇게 30년이 걸렸고
죽을 때까지 반복될 것

"80세가 되니까 이제 남은 건 음악을 즐기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이제부터는 정말 자유롭게 음악을 즐길 수 있으면 좋겠어요."
피아니스트 백건우가 지난달 30일 서울 여의도 신영체임버홀에서 연 데뷔 70주년 기자간담회에서 남긴 말이다. 음반사 유니버설뮤직을 통해 새 앨범 ‘슈베르트’를 발매한 지 닷새 만이었다. 여든의 현역 피아니스트는 긴 세월 마음에 담아둔 슈베르트 소나타를 녹음했다. “슈베르트 음악은 인간이 구사할 수 있는 것이 아닌 것 같아요. 천국에서 온 건가 하는 착각이 듭니다.”
슈베르트가 다시 말을 걸었다

백건우의 음악 인생은 올해가 70주년이다. 1946년 서울에서 태어나 10세에 해군교향악단(오늘날 서울시립교향악단)과 그리그 피아노협주곡을 협연하며 데뷔했다. 스스로 “레퍼토리가 굉장히 많다”고 할 만큼 쌓아온 연주곡도 한가득이다. 2024년과 지난해 모차르트를 탐구한 백건우는 이번엔 슈베르트의 소나타에 심취했다. “모차르트는 구상 면에서 음이 복잡한데 슈베르트는 더 자연스럽게 (소리가) 흘러나옵니다.”
그가 새 앨범에 담은 슈베르트의 소나타는 모두 4곡. 13·14·18·20번이다. 이 중 13번은 백건우가 자신의 음악 인생 초기에 배워 늘 마음 한편에 간직한 곡이다.
“이 곡을 선택한 건 제 마음이 통했기 때문이라고 할까요. 곡을 선정할 때는 그 곡이 나에게 뭔가 말하는 게 있을 때 선택하게 되죠. 그걸 말로 표현하긴 어려워요. 다른 예술가나 작가, 철학가들이 음악을 풀이하는 걸 보면 참 놀라워요. 그분들은 글로 음악을 표현하니 상상 못 할 이야기들을 하는데 전 곡을 설명하라고 하면 피하는 편이에요. 소리로서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게끔 하는 게 제 의무고, 그걸로 설명된다고 생각합니다.”
백건우는 젊었을 적 자신의 인생 세 번째 녹음으로 슈베르트 소나타를 연주한 적이 있다. 슈베르트의 마지막 소나타인 21번 내림나장조였다. 당시엔 눈앞에 그 마지막 소나타밖에 안 보여서 그 곡과 살다시피 했다고. 젊은 시절 연주한 슈베르트와의 비교에 대해선 이렇게 말했다. “제대로 해석하려면 적어도 세 번은 되돌아와야 한다고 얘기들 하거든요. 그렇게 하다 보면 20년, 30년이 걸려요. 이렇게 계속하는 건 불만스러운 점이 남아있기 때문인데, 그 곡을 제대로 하고 싶은 욕망이 있기에 계속 돌아오는 거죠. 아마 죽을 때까지 계속될 겁니다.”
“음악에 정해진 답 없어, 스스로 찾아야”
철학자 니체는 외부 조건에 기대지 않고 스스로가 세운 목표에 따라 자기 삶을 창조적으로 살아가는 사람을 ‘위버멘쉬(Übermensch)’라 불렀다. 여든에 이른 지금의 백건우는 “피아니스트에게 은퇴란 의미가 없다”며 “음악에 대한 열정이 살아있다면 연주할 가능성은 여러 가지가 있다”고 했다. 그 형태가 독주, 협연, 반주 등 무엇으로든 바뀔 수 있단 얘기다. 나이라는 굴레에서 벗어나 끊임없이 자신의 내적 에너지를 창조적인 힘으로 바꾼다는 점에서 백건우는 위버멘쉬와 닮아 있었다.
공식 간담회가 끝난 뒤 그에게 다가가 음악이 무엇인지를 물었다. 백건우는 “끊임없이 스스로 알아서 답을 찾아가야 하는 것”이라고 답했다. 외부에서 주어진 정보에 휘둘리지 말고 자기 감각과 인지로 음악을 해석하고 이를 구현해야 한다는 얘기다. ‘건반 위의 구도자’란 그의 별명이 떠오르는 말이었다. 정작 그는 “누구나 자기의 일에 충실하고 노력하는 분이라면 구도자”라며 “(이 별명이 내게는) 조금 무겁다”고 했다.
백건우는 올 하반기에 자서전도 낸다. 그는 “(데뷔 이후) 70년간 세상이 많이 변했고 그사이 겪은 이야기가 많다”며 “이걸 알리는 게 내 의무인 것 같다”고 설명했다. 직접 쓴 글로 그는 세상에 무엇을 더 남기고 싶은 걸까.
“우리가 음악을 대한 태도가 지금과는 좀 많이 달랐던 것 같아요. 음악을 하는 사람이면 무엇보다도 음악을 생각하고, 음악에서 거리가 멀어지면 안 된다는 걸 이야기하고 싶어요. 얼마 전 어느 콩쿠르에서 젊은 피아니스트가 연주를 끝내고 나서 제게 ‘조언해달라’고 하더라고요. 재주 있는 친구인데 전 한마디로 ‘넌 음악에서 멀리 떨어져 있다’고 냉정하게 얘기했어요. 이게 무슨 뜻인가 고개를 갸우뚱하더니 ‘그렇다’고 인정하더라고요. 콩쿠르에서 이기는 게 중요했고, 이름이 빨리 나는 게 중요했고, 사회에서 자기 위치를 찾는 게 중요해 음악을 이해하고 진짜 음악이 되려 하는 것에서 멀어져 있었다는 걸요.”
“일생이 너무 짧아요”
백건우는 후대 연주자들이 현대 작품을 많이 연주했으면 한다는 바람도 드러냈다. “제가 줄리아드 음대에서 공부할 땐 현대음악을 많이 가르치던 때가 아니었어요. 유럽도 특별히 현대음악을 중시하진 않았는데 제가 보기엔 참 중요해요. 저도 현대곡을 작곡가와 같이 작업하고 세계 초연으로 연주도 해봤지만 우리(피아니스트)는 쓰인 곡을 청중에게 알리는 역할이잖아요. 200~300년 전 작품에 머물러 있어야 하나 생각해보죠. 내 손으로 처음 울리는 울림을 우리가 책임지고 좋은 연주로 보이게 되면 그 이상 흥분되는 일이 없죠.”
그는 전국 12개 도시를 돌며 관객을 만나는 리사이틀 투어를 계획하고 있다. 오는 5월 10일엔 서울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연주한다. 이 무대에선 앨범에 담은 슈베르트 소나타 13·20번과 함께 브람스 4개의 발라드(작품번호 10)도 연주한다. 브람스 발라드는 “전부터 연주하고 싶은 곡이었다”고. “워낙 좋은 곡이 많고, 하고 싶은 곡이 많은데 다 못한다. 일생이 너무 짧다”는 그의 말에선 건반 위에 손을 처음 얹었을 때와 같은 열정이 묻어났다. “제가 이 프로그램에서 뭐를 보여주고 싶다는 건 그렇게 중요하지 않아요. 훌륭한 연주는, 플라톤이 얘기했듯 우리에게 환상의 날개를 달아줍니다. 그게 음악의 힘인 것 같아요.”
이주현 기자 deep@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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