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워진 목소리, 파편의 언어로 다시 잇다... 맨디 엘-사예 展

유선준 2026. 4. 2. 1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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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마곡에서 열리는 맨디 엘-사예 개인전 '테레사 이후' 전시 전경. 스페이스K 서울 제공

맨디 엘-사예 '넷-그리드(축복)'. 스페이스K 서울 제공

맨디 엘-사예 '세계의 명화(발화)'. 스페이스k 서울 제공

맨디 엘-사예 '화이트 그라운드(배신당한)'. 스페이스k 서울 제공

[파이낸셜뉴스] 역사는 늘 완전한 기록으로 남지 않는다. 어떤 목소리는 누락되고 어떤 기억은 제도와 분류 체계 밖으로 밀려난다. 작가 맨디 엘-사예(Mandy El-Sayegh)는 그 지워진 흔적들을 다시 불러낸다. 파편화된 언어와 이미지, 사물의 흔적을 겹치고 봉합해 개인의 기억과 억압된 서사를 복원한다.

밀려난 파편들을 다시 불러 모아 다문화와 이주민이라는 비주류 위치에서 형성된 시선으로 또 다른 이야기의 가능성을 펼쳐 보이는 전시가 서울 마곡에서 열린다. 코오롱의 문화예술 나눔공간 '스페이스K 서울'은 오는 6월 21일까지 영국 런던을 기반으로 활동하는 맨디 엘-사예 개인전 '테레사, 이후'를 개최한다고 2일 밝혔다.

말레이시아에서 태어나 중국계 말레이시아인 어머니와 팔레스타인계 아버지 사이에서 성장한 작가는 어린 시절 영국으로 이주한 뒤 다층적 정체성과 비주류적 감각을 바탕으로 아카이브 기반의 회화·설치 작업을 지속해왔다. 이번 전시에서는 신작 9점을 포함한 30여점을 선보인다.

전시 제목은 한국계 미국인 예술가 차학경(Theresa Hak Kyung Cha, 1951~1982)에게서 가져왔다. 특히 차학경의 저서 '딕테(Dictee)'는 이번 전시의 핵심 참조점이다.

차학경이 파편화된 언어와 기억으로 역사 속 여성들의 서사를 끌어올렸듯, 작가 역시 수집한 자료를 겹치고 덧대는 방식으로 기록에서 간과된 개인의 이야기를 시각화한 것이다. 특히 이번 전시는 완결된 서사를 제시하기보다 누가 말할 수 있었고 누가 침묵을 강요받았는지를 다시 묻는다.

작가는 전시를 위해 한국의 박물관과 고서점, 벼룩시장 등을 오가며 고지도, 서예 자료, 지폐, 책, 각종 인쇄물을 수집했다. 이렇게 모인 자료들은 개인의 기억과 역사적 맥락, 제도적 질서에 대한 문제의식과 교차하며 새로운 이미지로 재구성했다. 전시장 곳곳의 지도와 책, 텍스트의 파편은 거대한 역사 뒤에 가려졌던 개인의 흔적을 호출하는 매개이기도 하다.

전시를 대표하는 연작은 지난 2010년부터 이어온 '넷-그리드(Net-Grid)' 시리즈다. 작가는 지도, 잡지 이미지, 화폐, 텍스트 등을 콜라주한 뒤 그 위에 격자를 그려 넣는다. 여기서 '넷'은 흩어진 파편을 붙잡는 장치고, '그리드'는 근대 추상회화의 질서를 상징하는 형식이다. 하지만 이 격자는 정보를 조직하는 틀이면서 동시에 실체를 가리고 해석을 유예하는 베일로 작동한다.

대표작 '넷-그리드(아틀라스)'는 추상 회화처럼 보이지만 내부에는 팔레스타인 땅의 실루엣이 숨어 있다. 추상은 순수 형식이 아닌, 역사와 상처, 이미지의 충돌과 봉합을 감각하게 하는 장으로 확장된다.

이번 전시의 또 다른 축은 아카이브를 공간으로 확장한 '서재 공간'이다. 한국 전통 민화 '책가도'를 참조한 이 공간에는 지도와 의학서, 예술 서적 등이 놓이며 지식과 정보가 어떻게 선택되고 배열되는지를 보여준다.

유리 진열장 작업 '체화작용(Metabolism)'에는 전시 준비 과정에서 사용된 사적 기록과 오브제가 담겨 일상의 사물이 예술의 문맥 안에서 새로운 의미를 얻는 과정을 드러낸다.

설치 작업 '심리적 자기방어(Psychic Self-Defence)'는 이번 전시의 문제의식을 가장 직접적으로 보여주는 작품이다. 회화와 영상, 의복, 텍스트가 결합된 이 작업은 푸에르토리코와 팔레스타인 해방운동 사이의 연대라는 역사적 맥락 위에 무예와 관련한 작가 아버지의 사적 기억을 겹쳐놓는다.

1970년대 팔레스타인 사회에서 태권도를 비롯한 무예가 공동체의 연대와 자기 보호의 상징으로 받아들여졌던 맥락은 전시장 안 무술 도복 형상의 마네킹과 텍스트를 통해 다시 불러온다. 자기방어가 단지 물리적 행위가 아닌 정신적·문화적 실천임을 환기하는 대목이다.

이번 전시에서 처음 선보이는 '세계의 명화(Grand Collection of World Art)' 시리즈도 눈에 띈다. 작가는 한국의 한 고서점에서 발견한 '세계의 명화' 표지에서 장 오귀스트 도미니크 앵그르의 '그랑드 오달리스크' 이미지를 포착해 이를 실크스크린으로 화면에 옮겼다.

서구 명화 이미지가 한국의 헌책방까지 흘러들어온 경로를 따라가며 서구 중심 미술사에 내재한 위계와 이미지 유통의 권력을 드러내는 방식이다. 동시에 응시의 대상이던 여성을 응시의 주체로 전환하며 새로운 시각 언어를 만든다.

이 가운데 '세계의 명화(음성학)'은 언어와 신체, 규범의 관계를 정면으로 건드린다. 화면에 실크스크린된 1947년 한글 발음 교육용 카드는 해방 이후 '올바른 발음'의 규범을 떠올리게 한다. 여기에 입국신고서 양식이 병치되면서 언어의 규율이 국경을 넘어 이주자의 몸과 정체성에도 반복적으로 요구된다는 점을 드러낸다. 언어가 단순한 의사소통 수단을 넘어 몸을 규정하는 질서로 기능해왔음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버닝 스퀘어(Burning Square)' 시리즈도 인상적이다. 자본과 폭력, 애도와 소비가 공존하는 세계의 모순을 날카롭게 포착한다. 중국의 의례용 지폐인 지전에서 출발한 금색 사각형은 신문 지면 위에 붙으며 폭력적 사건의 희생자를 애도하는 동시에 기록과 역사를 붙들어두는 장치가 된다. 특히 '버닝 스퀘어(티파니 #5)'에서는 전쟁과 분쟁의 뉴스가 실린 파이낸셜 타임스 지면과 티파니앤코 광고가 한 화면에 병치된다. 참혹한 현실과 화려한 소비가 동시에 존재하는 세계의 이중성을 압축적으로 드러내는 장면이다.

'스페이스K 서울' 측은 "맨디 엘-사예는 기록과 이미지, 언어와 사물의 흔적을 봉합하듯 연결하며 단절된 존재와 관계를 다시 이어 붙인다"며 "이는 모든 것을 하나의 의미로 규정하려는 태도라기보다 상처입은 역사와 지워진 서사를 끝까지 붙들어두려는 실천에 가깝다"고 평했다.

한편 맨디 엘-사예는 지난 2007년 런던 웨스트민스터대에서 학사 학위, 2009년 런던 왕립예술학교에서 석사 학위를 받았다. 작품은 영국 테이트미술관, LA카운티미술관, 샤르자미술재단 등에 소장돼 있다.

rsunjun@fnnews.com 유선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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