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교 꼴찌, 아시아인 최초 佛젊은건축가상·대박 소설가로…“쓰는 습관이 날 키워” [손효림의 베스트셀러 레시피]
[손효림의 베스트셀러 레시피]
많은 사람들에게 뜨거운 사랑을 받는 베스트셀러. 창작자들은 자신이 만든 콘텐츠가 베스트셀러가 되길 꿈꾸지만, 실제로 실현될 가능성은 극히 낮다. 이 희귀한 확률을 뚫고 베스트셀러가 된 콘텐츠가 탄생한 과정을 들여다본다. 창작자의 노하우를 비롯해 이 시대 사람들의 욕망, 사회 트렌드 등을 확인할 수 있다.
#1. 중학교 입학식날. 몇 반인지 아무리 찾아도 이름이 없었다. 교무실에 갔다. 한 선생님이 자료를 확인하며 말했다. “꼴찌니까 380명(1학년 학생수)을 12(학급 수)로 나누면 되네.” 반 배치고사에서 전교 꼴찌를 했는데 행정 착오로 누락된 것. 그렇게 반이 배정됐다. 어머니는 얼굴이 빨개졌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2. 고교 3학년 때 담임 선생님이 말했다. “넌 글이 안 되니까 논술 시험 없는 대학에 지원하자.” 명지대 건축공학과에 다니던 시절 교수님들이 말했다. “건축하지 마라. 자질이 없다.” 저명한 교수님은 일갈했다. “네가 건축하는 건 건축계의 악몽 같은 일이다.”
그는 아시아인 최초로 프랑스 젊은건축가상 폴 메이몽을 수상했다. 프랑스를 대표하는 세계적인 건축가 장 누벨 건축사무소에서 일했다. 그가 쓴 장편 소설은 10만 권 넘게 판매됐다. 백희성 KEAB(킵) 건축 대표(48)다. 프랑스에서 10여 년간 일한 후 현재 한국과 프랑스를 오가며 일한다. 그는 “평균 이하였던 나를 바꾼 건 기록하는 습관 덕분”이라고 말한다.
그가 기록을 통해 삶을 바꿔나간 과정을 담은 ‘쓰는 사람’(교보문고)은 올해 1월 출간된 후 두 달 만에 1만 권 넘게 판매됐다.(국내 출판계의 베스트셀러 기준은 책 판매량 1만 권이다.) 백 대표와 책을 만든 한지은 교보문고 지식출판팀 편집자(43)를 지난달 19일 서울 송파구의 한 카페에서 만났다.

백 대표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 정약용의 기록을 떠올리며 감히 따라갈 순 없지만 흉내라도 내고 싶어 2002년부터 노트에 생각과 감정을 썼다”고 했다. 지금까지 그가 쓴 노트는 300권이 넘는다.
백 대표는 드라마틱한 성취에 대해 비결을 묻는 사람이 많아 책을 내기로 결심했다. 10곳이 넘는 출판사에서도 제안을 해 왔다. 그가 한 편집자와 손잡은 이유는 뭘까.
“저의 쓰레기 같은 생각이 기록을 통해 어떻게 발효돼 피어나는지 그 여정을 보여주고 싶었어요. 대부분의 편집자들은 기록하는 노하우를 정리하길 바랐어요. 그런데 한 편집자님은 기록하는 과정을 보여주는 게 더 좋다는 거예요. 제 생각과 일치했죠.”
한 편집자가 출간을 제안한 건 지난해 6월이었다. 한 편집자는 “초고는 10월에 나왔고 최종 원고를 11월에 완성됐다”고 했다. 백 대표가 기록하는 습관에 대해 10년 전부터 글을 쓰고 있어 가능했다.
“딸(8)과 아들(7)이 10대 중반이 되면 책을 주고 싶었어요. 기록을 통해 하고 싶은 걸 맘껏 하길 바라는 마음을 담았습니다.”
부제는 ‘평범을 비범으로 바꾼 건축가의 기록법’. 백 대표가 실제 노트에 쓴 글과 그림을 실었다. 한 편집자는 “여백을 넉넉하게 둬 메모할 수 있게 했다”고 말했다.

백 대표는 기록의 효과가 5년 후부터 서서히 나타났다고 말한다. 대학원에서 전통 건축을 전공하던 그는 2003년 경주 남산을 답사한 경험을 썼다. 탁 트인 곳에 홀로 선 ‘용장사지삼층석탑’을 만났다. 석탑 전문가는 탑의 비밀을 알려줬다. 지면보다 높게 건축물을 받치는 하부기단이 없고, 대신 커다란 바위가 있다는 것. 바위가 있는 산 전체가 기단인 셈이었다. 세상에서 가장 거대한 탑을 만든 솜씨에 탄복했다. 그는 이렇게 썼다. ‘부족함으로 완벽함에 이르는 지혜’.
이 메모는 2023년 교회 설계 공모 아이디어의 실마리가 됐다. 울림이 있는 기도실을 고민하다 노트를 뒤졌다. 그는 문제에 부딪히면 늘 노트를 찾는다. 그리고 이 기록을 발견했다. 해당 글 아래 덧붙여 썼다. ‘부족하지만 완벽한 기도실을 만드는 것이 해답일지도 모른다??’ 천장이 뚫려 눈과 비가 들어오는 불편한 기도실을 제안했다.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을 느끼게 한 것. 설계는 당선됐고 기도실은 큰 호응을 얻었다.

교육공무원이었던 아버지는 장난감을 조립한 뒤엔 갖고 놀지 않는 아들을 보며 진로를 고민했다. 아버지가 지인에게 얘기하니 건축가를 권했다. “건물을 다 지은 뒤 열쇠를 건네고 떠나는 게 건축가”라며. 말로 하면 잔소리가 될 것 같아 건축 책 세 권을 사서 아들의 책상에 뒀다. 한참 지나 방문을 살짝 열어봤다. 아들은 책을 베고 자고 있었다. 속이 터졌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백 대표는 부모님의 ‘방치’ 덕분에 자유롭게 자랐다며 웃었다.
“동생에게 장애가 있어서 부모님의 관심은 늘 동생에게 있었어요. 제게 강요하는 게 없었죠. 하고 싶은 걸 맘껏 할 수 있어서 좋았어요.”
그는 중학교 1학년 때 체육 담당인 담임 선생님 덕분에 공부하게 됐다.
“선생님이 ‘나도 공부 엄청 못했어. 희성이도 하면 돼. 선생님이 보기에 충분히 할 수 있어’라고 하셨어요. 저를 응원해주신 선생님은 처음이었어요.”
그는 ‘찌질했던’ 시간이 적지 않았다고 말한다.
“지금 경력을 보면 제가 되게 재수 없어 보일 거예요.(웃음) 그런데 학생 시절엔 발표 때 늘 버벅댔어요. 대학 3학년 수업 시간에 앞서 발표한 친구들이 교수님에게 죄다 박살났어요. 제 차례가 다가오자 어머니에게 전화해 ‘너무 무섭다’며 울었어요. 어머니가 스피커폰으로 받는 바람에 옆에서 아버지가 듣곤 기가 막혀 호통치셨습니다.(웃음)”
수업을 따라갈 수 없어 자퇴하려 했다. 친구가 “어렵기로 유명한 수업 딱 하나만 들어보고 결정하라”며 말렸다. 수업을 다 들은 후 마음을 다잡았다. 전통 건축을 공부하기 위해 대학원에 진학했다.
이후 프랑스 유학을 결심했다. 전통을 녹인 유럽 건축을 통해 한국 전통의 현대화에 대한 힌트를 얻고 싶었다. 프랑스로 가서 프랑스어부터 배웠다. 프랑스 발드센건축학교를 졸업하고 말라케건축학교에서 건축사 과정을 마쳤다. 장 누벨 사무소를 두드렸고, 일할 기회를 얻었다. 전통 건축에 매료된 이유는 뭘까.
“어릴 때 외할머니집이 초가였어요. 손닿는 곳에 제비집도 있었고요. 진짜 좋았어요.”

그가 많은 걸 해낸 건 무시무시한(?) 집요함도 맞물린 결과로 보였다. 대학원 시절 전통 사찰 마당의 모양과 크기가 다 다른 이유를 교수님에게 물었다. 돌아온 답변. “문화재로 지정된 사찰 마당이라도 다 보고 와라.” 몇 달간 거지꼴로 전국을 다니며 122개 사찰 마당 크기를 모두 쟀다. 이걸로 논문도 쓰게 됐다.
소설 ‘빛이 이끄는 곳으로’(2024년)를 쓰게 된 과정도 그렇다. 면역 질환으로 일을 잠시 쉬게 된 그는 파리 센 강변을 걷다 시테 섬의 한 고택에서 나오는 노신사를 봤다. 그와 고택이 궁금했다. 고택 방문을 요청하는 편지를 각 집마다 썼다. 200통이 넘었다. 포기해야 하나 생각할 무렵 답장 한 통이 왔다. 이를 시작으로 고택 방문이 이어졌다. 오랜 시간만큼 숱한 사연이 있었다.
알랭 교수님에게 얘기하니 논문을 써보라고 권했다. 일하며 8년 간 틈틈이 고택을 찾았다. 논문 발표 전 감사 편지를 보냈는데 이들은 논문을 쓰지 말아달라고 했다. 집과 사연이 알려져 관광객이 몰려드는 걸 원치 않았기 때문이다.
익명성을 보장할 길을 찾다 소설로 써보라는 교수님의 제안에 한국어로 쓰기 시작했다. 초고를 본 친구는 돌직구를 날렸다. “이런 쓰레기 같은 글을 다 읽은 나를 칭찬하고 싶다.” 유명 소설가들의 책을 샅샅이 보며 작법을 익혔다. 10번 고쳐 썼다. 그렇게 나온 책이 대박났다.
오래된 건물에 설치된 기묘한 장치에 대한 미스터리를 풀어가는 과정이 속도감 있게 펼쳐지며 공간에 담긴 사람의 이야기를 따스하게 조명한다.
그는 “호기심이 많은데 풀릴 때까지 해야 한다”며 웃었다. 책은 뜻밖의 역할도 하고 있다.
“공모나 프로젝트 입찰에 당선된 게 7~8% 밖에 안 돼요. 승률이 20~30%가 안 되면 건축사무소를 운영할 수 없어요. 그런데 책을 읽고 건축 의뢰를 하는 분들이 많습니다.(웃음)”
가구 디자인, 글쓰기, 그림까지 여러 분야에 뛰어드는 이유를 물었다.
“해서 안 된 건 후회되지 않는데 안 한 건 계속 후회되더라고요.”

그는 손으로 노트에 직접 쓰라고 당부했다.
“날 것 그대로 끄집어내려면 뇌와 손 사이에 키보드나 마우스가 끼면 안 돼요. 사용법에 신경쓰게 돼 자유롭게 사고하기 어렵거든요.”
그림도 그리고 각종 부호를 편하게 쓰려면 손으로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쓰고 생각하는 과정을 통해 자신과 만날 수 있어요. 원하는 걸 찾고 중심을 잡을 수 있죠. 성공하지 못해도 그 과정에서 만족을 느꼈다면 스스로에게 박수 보낼 수 있잖아요. 그러면 충분히 행복하더라고요.”
■‘쓰는 사람’(2026년·교보문고)은….
건축가이자 소설가, 디자이너 등으로 활동하는 백희성 KEAB(킵) 건축 대표(48)가 기록을 통해 생각을 발전시키고 성장한 과정을 정리했다. 2002년부터 기록하기 시작해 그동안 쓴 노트는 300권이 넘는다. 아이디어가 필요할 땐 예전 노트를 찾아보고 추가로 메모하며 생각을 숙성시킨다.
기록은 뜻밖의 길도 안내했다. 프랑스 파리 시떼 섬의 고택에 호기심이 생겨 그 곳에 사는 이들을 설득해 집에 얽힌 이야기를 들었다. 논문을 쓰려 했지만 이들이 사연과 집이 알려지는 걸 원치 않아 소설로 쓰게 됐다.
고택 거주자들을 설득하기 위해 편지를 200통 넘게 쓰고, 소설 쓰기에 나섰다가 친구에게 ‘뼈 때리는’ 지적을 받으며 10번이나 고쳐 쓰는 등 일을 저지른 뒤 수습하려 안간힘을 쓴 과정과 그 심정을 고스란히 담은 글에 웃음이 나온다.
은퇴한 소방관이 카페 설계를 의뢰했을 때도 노트를 살폈다. 기억이 있는 공간을 중요하게 여기는 그는 소방관의 이야기를 들었다. 광고계에서 일하고 싶었지만 취업에 계속 실패해 우연히 지원한 소방공무원 시험에 붙었다고 한다. 1년만 하기로 했지만 사람을 구하는 일은 그의 인생을 바꿨다. 평생 물로 사람을 구한 그는 은퇴 후에도 물로 사람을 이롭게 하고 싶어 카페를 떠올렸다.
전통 사찰의 대웅전으로 향하는 계단에 대해 쓴 2005년 기록을 찾았다. 높고 울퉁불퉁해 넘어지지 않으려면 계단만 보고 올라야 한다. 다 오르면 갑작스레 확 트인 넓은 대웅전 마당에 들어서며 압도된다. 그는 썼다. ‘불편한 계단과 시선의 변화를 어떻게 현대설계에 적용해 볼 수 있을까???’
이탈리아 건축가 주세페 테라니가 대문호 알리기에리 단테를 생각하며 지은 신전 ‘단테움’에 설계한 ‘오를 수 없는 계단’ 도면을 보고 2007년 쓴 메모도 찾았다. 중간이 끊겨, 올라가다 주저앉아야 하는 계단이다. 또 적었다. ‘바라보며 올라갈 수 있는 것처럼 느껴지지만 갈 수 없는 계단의 의미는??’ 은퇴한 소방관은 말했다. “바라는 길과 운명의 길이 엇갈릴 때도 있지만 그래도 운명의 길은 의미가 있다.” 이에 바라보는 방향으로 건물을 만들었지만 실제 그 방향으론 갈 수 없게 길을 살짝 비틀어 ‘바라는 길’과 ‘운명의 길’ 차이를 구현했다.
여러 단상을 쓰고 시간이 흐른 뒤 기록을 더해 생각이 곰삭아 확장되는 과정이 흥미롭다. 기록을 현실화시키는 힘은 행동으로 옮기는 집요함이라는 것도 확인하게 된다.
손효림 기자 arysso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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