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은 쓸모없어졌나, 지금 다시 묻는다

미국의 이란 침공은 ‘전쟁의 목적성’ 자체가 오리무중이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말은 매일 극과 극을 오간다. 카를 폰 클라우제비츠가 무덤에서 나와 ‘전쟁론’(1832년)을 다시 써야 할 지경이다. 이 전쟁이 아니더라도 대의제 정당정치 등 전통적 민주주의가 크게 흔들리는 오늘의 현상은 고전적인 정치철학의 논의 범주를 훌쩍 넘어선 듯 보인다. 고전의 쓸모는 의심받고 있다.
‘자유와 평등’(대니얼 챈들러 지음, 홍기빈 옮김, 교양인 펴냄)은 제목에서부터 고전의 느낌이 물씬 풍긴다. 심지어 정치철학의 20세기 고전인 존 롤스의 ‘정의론’을 대놓고 사숙한다. 그러나 이 책을 고전이라 부를 수 없는 건 원서(‘Free and Equal’)의 출간 시기(2023년) 때문만은 아니다. 바로 여기, 인류사회가 겪고 있는 생생한 민주주의의 위기를 실시간으로 붙들고 씨름하기 때문이다.
정의에 관해서라면 록스타급 정치철학자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2009년)가 먼저 떠오른다. 그에 비하면 롤스는 아득한 이름이다. 철학자 새뮤얼 프리먼에 따르면, 학계 바깥에서 롤스의 영향력은 ‘제로’에 가깝다. 둘의 차이는 어디에서 올까. 샌델에게는 ‘정의’를 교양 수준에서 문답으로 풀어가는 지적 쾌미가 있다. 반면 롤스의 저작은 대단히 “추상적”(챈들러)이다. 비대중적일뿐더러 반대중적이기까지 하다. 학계 내부로 시선을 돌리면 사정은 달라진다. 롤스의 당대 비판자였던 로버트 노직조차 “이제 정치철학자는 롤스의 이론적 틀 안에서 작업해야 하며, 그러지 않으려면 그 이유를 설명해야만 한다”고 평했다.
‘자유와 평등’도 노직의 이런 평가를 따른다. 저자는 책의 1부를 롤스의 ‘기본적 자유의 원칙’ ‘공정한 기회균등의 원칙’ ‘차등의 원칙’ ‘정의로운 저축의 원칙’을 충실히 해제하는 데 할애한다. 롤스는 이 원칙들을 통해 민주주의사회가 도달할 수 있는 최상의 모습, 즉 ‘현실주의적 유토피아’를 그려내려 했다. 또한 후학들에 의해 자유주의와 평등주의를 상호의존적으로 최대화하는 ‘평등주의적 자유주의’ 정치철학으로 자리 잡길 바랐다.
2부는 롤스의 논의가 멈춘 자리에서 시작한다. 저자는 “사실 롤스가 우리에게 제시한 것은 정의의 이론이지 변화에 대한 이론은 아니다”라고 짚는다. 이 책이 롤스의 실용서 판본 성격을 띠는 것도 여기서부터다. 현실주의적 유토피아의 기획이 현실화하기는커녕 경제적 불평등과 정치적 포퓰리즘, 기후붕괴 위기 등으로 극단화하는 원인을 추적한다. 그러고는 보편적 기본소득제, 비례대표제, 시민 교육, 노동자 협동조합, 민주주의 바우처, 참여예산제, 시민 의회 등 다양한 제도적 대안을 제시한다. 어느덧 책은 ‘새로운 세계’에 대한 큰 모자이크 그림이 된다.
물론 이 모든 것의 원천은 롤스의 사유이자 롤스의 태도다. “롤스의 정치학은 원칙에 입각해 있으며, 실용적이며, 다원주의적이며, 통일적이며, 희망적이다.” 인류사회의 현실이 절망적이라고 느낀다면 일독을 권한다. 544쪽, 2만9천원.
안영춘 기자 jona@hani.co.kr
■ 21이 찜한 새 책

남성 판타지
클라우스 테벨라이트 지음, 김정은 옮김, 글항아리 펴냄, 6만8천원
제1차 세계대전 패전 직후 독일 우익 민병대 조직 ‘자유군단’의 젊은 군인 남성을 분석했다. 자서전, 당시 유행했던 소설, 편지글 등 그들에게서 유래한 텍스트를 빠짐없이 검토했다. 강철 같은 신념으로 기꺼이 살해와 폭력에 가담한 파시스트적 ‘가해자’ 욕망이 어디서 자라나 발현됐는지 텍스트로 “겪어낸” 책. 1978년 출간 뒤 10개국에서 번역됐고, 최근 극우 남성성의 부상으로 다시 주목받고 있다.

역사 속 여자, ○○하다(전 4권)
장지연 외 6명 지음, 푸른역사 펴냄, 4만2900원
한국사의 대부분 시기 동안 절대다수 여성이 문맹이었기에 사료로 확인할 수 없는 여성의 역사를 신진 여성사학자 7명이 기록했다. 문자를 쓰지 못해 남성 지식인과 공모해 자신을 기록한 조선 기생 가련의 욕망, 악공 가영과 통정한 고려 공주가 ‘간통’한 이유, 차별의 장벽을 넘어 일해온 20세기 대표 커리어우먼 ‘식모’의 사회사까지 가부장적 역사서가 담지 않은 여성을 ‘발굴’했다.

사랑의 힘
박서련 지음, 문학동네 펴냄, 1만9800원
한겨레문학상과 젊은작가상을 받은 박서련의 첫 연작 소설집. 사랑할 때 분비되는 호르몬에 감응해 새로운 능력을 생기게 하거나 기존 능력을 강화해주는, 사랑의 미생물 ‘로로마’가 공기처럼 당연해진 시대를 배경으로 여덟 가지 사랑 이야기를 녹였다. ‘그래, 사랑은 잠들거나 지치지 않으며, 그 무엇보다 위대해!’


4·3, 기억의 폭풍 속으로+4·3, 아카이브로 본 역사
허호준 지음, 혜화1117 펴냄, 각 2만3천원·3만2천원
‘4·3, 기억의 폭풍 속으로’는 4·3을 입체적으로 조망한 전작 ‘4·3, 19470301-19540921: 기나긴 침묵 밖으로’와 달리, 채진규와 이명복의 삶을 중심으로 국가폭력과 사회구조가 개인의 삶을 어떻게 뒤흔드는지 보여준다. ‘4·3, 아카이브로 본 역사’에는 지은이가 30년 넘게 4·3을 취재하면서 수집한 문서와 사진 100개의 장면이 녹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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