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호이의 북적북적] “침묵의 땅에서 생명의 언어로: DMZ 세계문학페스타, 문학이 평화를 부르다”

[한국독서교육신문 김호이 기자]
올해로 첫선을 보인 'DMZ 세계문학페스타'는 분단과 군사적 긴장의 상징인 DMZ를 문학적 사유와 국제 연대의 무대로 바꾸자는 취지로 지난3월27일에서 29일까지 DMZ캠프그리브스와 파주출판도시 일대에서 마련됐다. 국내외 150여 명의 작가, 전국 70여 곳의 동네책방·출판사가 참여한 대규모 프로젝트다.
이번 행사 주제는 '침묵의 땅에서 생명의 언어로'. 전쟁, 분쟁, 혐오, 차별 등으로 갈라진 세계에서 문학이 어떤 방식으로 폭력에 저항하고 인간의 존엄을 회복할 수 있는지를 모색하는 데 초점을 맞췄다.
"(2020년 이후) 현재까지 약 2천 명이 벨라루스에서 정치적 이유로 체포돼 수감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체포는 지금도 이어지고 있습니다. 나는 목소리를 찾고 있습니다. 목소리를 내는 것은 두려운 일입니다. 하지만 침묵 역시 나를 두렵게 하는 무서운 존재입니다."
27일, 기조 강연자로 나선 2015년 노벨문학상 수상자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는 벨라루스 대선 이후 벌어진 대규모 민주화 시위를 기록했던 경험을 생생히 들려주며, '목소리 소설'이라는 자신의 문학적 방법론이 태어난 순간들을 증언했다. 시위대의 목소리를 수집하며 "국민들을 사랑하게 되었고, 동료 시민들의 저항을 책으로 써야 한다"고 결심했다는 고백은 문학이 역사와 사회를 기록하는 방식에 대한 깊은 울림을 남겼다.
황석영 "마지막 계단 앞에 서 있다… 문만 열면 빛이 보일 것"
건강 악화로 행사장을 찾지 못한 작가 황석영은 송경동 시인(한국작가회의 사무총장)이 대독한 기조 강연에서 자신의 생애와 분단의 역사를 겹쳐 보았다. 그는 다섯 살 무렵 아버지 등에 업혀 삼팔선을 넘던 기억을 소환하며, 이후 민족문학작가회의의 남북 작가회담 제안(1988), 1989년 북한 방문, 베를린 장벽 붕괴 현장 체류, 그리고 2005년 평양에서 열린 남북 작가회담까지의 과정을 되짚었다.
황석영은 한반도 핵 위기의 기원을 "1991년 남북한의 유엔 동시 가입 이후 주변 4대 강국의 교차 승인 불발"에서 찾으며, "비핵화와 북·미 수교를 맞바꾸면 되는 단순한 문제"가 미국과 일본의 지연 전략으로 '해법 없는 긴장'이 되었음을 지적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평화로 가는 계단을 우리는 이미 대부분 쌓았다. 이제 마지막 계단만 남았다. 저 문을 열면 밝은 빛이 보일 것"이라며 희망을 전했다.
"DMZ를 세계 문학의 장으로"… 개막식에서 울려 퍼진 다짐
김동연 경기도지사는 개회사(김대순 부지사 대독)에서 "DMZ를 평화·문화·생명의 상징 공간으로 확장하겠다"며 "총성이 멈춘 자리에 문학과 예술의 담론이 이어지도록 구조적 기반을 강화하겠다"고 밝혔다.
공동조직위원장 도종환 시인은 "올해를 시작으로 세계 작가 네트워크를 구축해 매년 평화의 목소리를 내겠다"고 강조했다. 독일·인도계 영국 작가 프리야 바실도 공동조직위원장 자격으로 무대에 올라 국제 문학 교류의 의미를 강조했다.
분단, 전쟁, 디아스포라… 전 세계 작가의 '현재 진행형 기록들'
오전 개막식 후 작가들은 캠프그리브스 일대를 둘러봤고, 오후에는 '분단'과 '평화'를 주제로 세션이 이어졌다. 특히 전쟁의 한복판에서 이곳까지 도착한 팔레스타인 작가 아흘람 브샤라트의 참가 소식은 현장에 큰 반향을 일으켰다. 시에라리온 내전 당시 소년병이었던 경험을 기록한 이스마엘 베아 역시 발표자로 나서, 전쟁이 개인에게 남긴 상흔을 증언했다.
둘째 날인 28일에는 장소를 파주출판도시 지혜의숲으로 옮겨 논의가 이어졌다. 오전 세션에서는 '민주주의'를 주제로 필리핀의 사르지 라케스타, 남아공의 주킬레 자마, 소설가 김홍이 발표 진행했다. 오후에는 '디아스포라'와 '마이너리티' 두 세션이 동시에 진행됐다. 마리아 로사 로호(아르헨티나), 제인 정 트렌카(북미·한국), 김수우, 박금산은 디아스포라를, 프리야 바실(독일·영국), 호시노 도모유키(일본), 최진영 등은 소수성과 주변화된 삶을 다뤘다.
문재인 전 대통령도 1일 책방지기로 참여
문재인 전 대통령은 28일 평산책방 '1일 책방지기'로 참여해 국내외 작가와 독자를 만났다. 이어 오후에는 알렉시예비치, 소설가 정지아와 함께 '침묵의 땅에서 생명의 언어로'를 주제로 평화 대담에 나섰다. DMZ에서 벌어지는 세계 작가들의 문학·평화 담론에 전직 대통령이 참여하는 이례적인 장면이다.
문학을 통해 DMZ를 다시 바라보고, 문학적 상상력으로 분단의 땅에 새로운 이야기를 불어넣으려는 시도는 행사 전반에서 두드러졌다. 문 전 대통령의 참여 역시 이러한 상징성을 강화하는 계기가 됐다는 평가가 나온다.
DMZ에서 시작된 문학적 연대, 29일 폐막
행사는 마지막 날인 29일 DMZ 평화 투어, 북페어 관람 등을 거쳐 폐막식과 환송 리셉션으로 마무리됐다. 전쟁, 분단, 독재, 난민, 조용한 폭력 속에서 목소리를 잃지 않으려는 전 세계 작가들의 기록과 연대가 DMZ에서 시작됐다는 점에서 올해 행사에 대한 기대도 커졌다. 침묵과 목소리 사이의 경계에서, 문학이 다시 한 번 '말해야 한다'는 이유를 보여준 자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