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단풍 안 부럽다…봄 연한 초록빛 ‘유록’ 내장산
4월 왕벚꽃으로 물드는 내장산
봄에만 볼 수 있는 유록색 나무
전망대 오르면 서해까지 한눈에
싸고 푸짐한 맛집들도 수두룩

전북 정읍은 국내 대표적인 가을 여행지다. 화려한 단풍으로 수놓은 내장산은 가을을 상징한다. 하지만 기실 정읍의 진짜 여행은 봄이다. 봄철 만개한 벚꽃이 지천인 데가 정읍이다. 여기에 다른 지역에선 볼 수 없는 봄 풍경도 있다. 봄을 맞으려는 내장산의 초록색 광경이 일품이다. 명산이 드러내는 짙은 초록색은 장관이다. 봄은 꽃으로만 오는 게 아니다. 추운 겨울 움츠렸던 나무들에서 초록색 새순이 돋기 시작한다.
지난 21일 봄을 준비하는 정읍을 찾았다. 제일 먼저 찾은 곳은 내장산국립공원. 단풍철도 아닌데 볼 게 무에 있다고 내장산을 가냐는 타박을 들은 터다.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소리에 웃고 말았다. 봄철 내장산 초입엔 왕벚꽃이 핀다. 대도시 천변에서 피는 벚꽃과는 비교가 안 된다. 산자락의 초록색과 한데 어우러진 벚꽃 풍경이 남다르기 때문이다. 이날은 아쉽게도 왕벚꽃을 맞을 순 없었지만 1~2주 뒤면 필 왕벚꽃 상상에 즐거워졌다. 내장산국립공원 직원들은 입 모아 말했다. 벚꽃보다 더 좋은 게 있다고 했다. “이제 곧 나무마다 초록색이 돌기 시작합니다. 초록초록, 초록색이 돌죠. 추워 보이는 가지에서요. 한여름 내장산은 짙은 녹색인 심록이 우거진다면, 봄 내장산은 유록색이 펼쳐집니다. 이때만 볼 수 있는 색이랍니다.” 직원 말에 ‘유록색’이 궁금해졌다. 사전에 유록은 ‘봄날의 버들잎의 빛깔과 같이 노란빛을 띤 연한 초록색’이라고 정리돼 있다. 연한 초록색은 등산객에게 어떤 감흥을 줄까. 4월 중순께 내장산을 찾아야 할 이유다.


이날 케이블카 이용 고객은 3~4명이 고작이었다. 소요 시간은 겨우 5분. 번잡하지 않았다. 직원 대부분이 강조했다. “진짜 내장산은 지금 올라야 합니다.” 다들 ‘유록 내장산’의 아름다움을 강조했다. “자세히 보면 나무마다 초록색이 돌기 시작하는데, 이만한 절경도 없다”고 했다. 지금 나뭇가지의 주인은 겨우살이다. 겨우살이는 늦가을에 싹을 틔워내는 기생식물이다. 나무의 수액을 뽑아 먹는다. 차나 약재로 쓰인다. 완연한 봄이 되면 겨우살이는 짙은 초록 잎에 덮여 보이지 않는다. 이제 자취를 감출 때가 얼마 남지 않았다.
케이블카에서 내리자 전망대로 난 오솔길이 보였다. 전망대까지는 약 300m. 누구나 오르기 쉬운 길이다. 단풍철엔 줄 서서 오르는 번잡한 데다. 봄만이 제공하는 한적함이다. 따스한 햇볕을 받은 앙상한 나뭇가지를 응원하게 된다. 이제 곧 활개를 칠 계절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버티라고 격려하고 싶어진다. 자연의 순환이야말로 인간이 배워야 할 순리다. 인생도 그와 같다.


전망대에선 내장산의 자락 일부가 한눈에 보인다. 청명한 날엔 서해도 보인다고 해서 이름 붙여진 망해봉, 고려 선종 3년에 적암대사가 창건한 원적암, 농기구 ‘써레’와 비슷한 모양의 서래봉, 백제 의자왕 때 생긴 벽련암 등이 한눈에 들어왔다. 내장산 기암괴석 아래 숲, 그 아래 있는 벽련암. 겸재 정선이 그린 듯 아름답기가 이를 데 없는, 산 중턱 절이다. 내장산이 명산인 데는 아름다운 풍광 때문만은 아니다.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서울 춘추관, 충주사고, 성주사고에 보관하던 조선왕조실록이 불타고 약탈당했다. 전주사고에만 사본이 남아 있었다. 사고 담당 관리 손홍록과 정읍의 유학자 안의는 급하게 마을 사람들과 함께 조선왕조실록을 내장산 용굴암, 은적암(은봉암), 비래암으로 옮겼다. 정읍 사람들과 내장산이 아니었다면 역사는 단절되었을 것이다.
내장산과 짝인 내장사의 봄맞이는 요란하지 않았다. 백제 무왕 때 창건 당시 이름은 영은사였다. 내장사로 불리게 된 때는 정확하게 알려진 바가 없다. 한국전쟁 당시 불탔던 내장사는 1958년 대웅전을 중건하고 1971년 국립공원에 편입되면서 지금의 꼴을 갖추게 됐다. 내장사 일주문에서 대웅전까지 난 길은 본래 ‘단풍길’로 유명하다. 이날 이 길은 앙상한 가지를 드러내며 봄을 기다리는 풍광이 마치 구루(마음 챙김 스승) 같았다. 고개 들어 쳐다볼수록 인생 한쪽이 보인다. 경내는 초록이 조금씩 ‘진동’하고 있었다. 4월 중순이면 만개하리라.
내장산에서 내려오는 길에 들른 ‘내장산 단풍생태공원’도 ‘단풍’이란 글자가 무색하게 초록색 봄이 올라오고 있었다. 까르륵 아이들 웃음이 공원을 점령했다. 고즈넉한 공원 봄날은 평온함을 선사했다.



정읍 사람들이 최근 이구동성으로 자랑하는 데가 이곳이다. ‘용산호 미르샘 분수’다. 용산호 안에 설치된 분수다. 분수엔 조형물이 있다. 단풍, 구절초, 라벤더를 상징화한 둥근 구와 세마리 황룡으로 구성돼 있다. 야간에는 불을 밝혀 여행객을 초청한다. 정읍은 곧 봄꽃 축제가 열린다. ‘2026 정읍 벚꽃축제’가 오는 4일부터 사흘간 정읍천 어린이축구장 일대에서 펼쳐진다. 올해 35돌을 맞은 꽃 축제다.
정읍은 월영습지, 동학농민혁명기념관 등 자연과 역사를 품은 여행지도 있지만 ‘내장산 유록 여행’ 못지않게 근사한 맛 투어 여행지다. 그동안 정읍은 목포, 여수, 광주 등 이름난 전라도 도시에 밀려 제대로 대접받지 못했다. 하지만 뒤돌아서면 생각나게 하는 ‘가격 착한 맛집’이 수두룩하다.


정읍에서 전국권으로 가장 유명한 식당은 백학정(정읍시 태인면 태인로 29-3)이다. 1978년 문 열어 4대째 영업하는 떡갈비 전문점이다. 주인 최이호씨의 딸 37살 미정씨가 잇고 있다. 1963년 개업한 담양의 떡갈비 전문점 덕인관과 쌍벽을 이룬다. 국내 한우 암소로 만드는 이 집 떡갈비는 고기 밀도가 빡빡하지 않아 씹기 편하다. 떡갈비백반(3만3천원)을 주문하면 20여가지 반찬과 함께 떡갈비가 나온다. 참게장백반(2만7천원)도 찾는 이가 많은 메뉴다.
정읍엔 독특한 김밥집이 있다. 옛날김밥(정읍시 새암길 7)은 1977년 문 연 분식집이다. 주인 김이순씨가 딸이 툭 던진 말에 아이디어를 얻어 개발한 부침개김밥이 유명하다. 밀가루에 콩가루를 넣어 부친 전 위에 김밥 김을 얹어 만다. 마요네즈가 들어가는 게 특징이다. 과거엔 벽 가득 낙서가 있었다. 분식점답게 구구절절한 사연이 적힌 낙서였다. 최근 벽지를 새로 발라 깨끗해졌다. 예전에 견줘 쾌적해졌지만 아쉬워하는 단골이 많다.





남도밥상처럼 반찬 여러개가 한상에 나오는 가격 착한 식당도 있다. 국화회관(정읍시 서부로 22)은 30여년 전 외식업에 뛰어든 김재식씨가 20여년 전 지금 자리에 연 쌈밥 전문점이다. 익산이 고향이지만 정읍에 정착한 지 40년이 넘었다. 그가 개발한 우렁이쌈장이 일품이다. 큰 우렁이가 넉넉하게 들어간다. 그는 “국산 왕돌우렁을 쓴다”고 말했다. 버섯과 곡물가루도 들어간다. 우렁이쌈밥, 청국장, 우렁이초무침과 여러 가지 반찬이 한상에 나오는 메뉴의 가격은 1만5천원이다. 채소, 우렁이쌈장 등도 계속 리필된다. 건강한 맛이 상에 차려진다. 정읍엔 줄 서는 맛집이 또 있다. 보안식당(정읍시 중앙로 95)은 1979년에 문 열었다. 은은하게 단 팥칼국수와 비빔쫄면을 파는 식당이다. 인천 쫄면에 견줘 상대적으로 부드러운 편이다. 정읍 쌍화차 거리를 그냥 지나치면 섭섭하다. 10곳 넘은 쌍화차 전문점이 늘어서 있다. 골목의 시작은 30년 넘는 역사를 자랑하는 모두랑쌍화탕이 시작했다. 속을 데워주는 한방약 같은 쌍화탕이 인기를 끌면서 여러 집이 생겨났다. 2013년에 문 연 궁쌍화차 주인 김귀녀씨는 “이 골목은 과거 관공서가 모여 있던 데”라고 말했다. 떡이나 과일 등이 같이 나와 더 인기다. 넉넉한 한끼 조식이 된다.
정읍/글·사진 박미향 기자 mh@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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