쿵후의 나라에 태권도 알리다 [서원식 태권도 박사]

남준식 기자 2026. 4. 2. 07: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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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이 저더러 이해를 못 하겠대요. 비즈니스가 안 보인다고요. 돈을 벌어야 하는데 돈을 못 버니까요. 저는 태권도로 돈을 벌려는 게 아닙니다. 가치를 찾는 일이니까요. 힘들어도 행복하니까 계속 하는 거예요."

"코로나 이후로 학생 모집이 어려워져, 중국뿐 아니라 다른 나라 학생들로 확대했어요. 30명 중에 16명이 모였죠. 진정으로 태권도를 배우고 싶어서 온 친구들이에요."

무술의 나라 중국에서 태권도 전공을 설립한다는 건 의미 있는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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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이징 거용관 만리장성에 선 서원식 박사.

"사람들이 저더러 이해를 못 하겠대요. 비즈니스가 안 보인다고요. 돈을 벌어야 하는데 돈을 못 버니까요. 저는 태권도로 돈을 벌려는 게 아닙니다. 가치를 찾는 일이니까요. 힘들어도 행복하니까 계속 하는 거예요."

홀로 중국 건너가 박사 학위 취득

태권도 경력 45년에 공인 8단인 서원식 박사(59)는 '쿵후'의 나라 중국에서 태권도를 알리고 있다. 중국 땅을 처음 밟은 것은 2008년. 당시 서울에서 태권도장 6곳을 운영할 정도로 잘 나갔으나, 가족까지 남겨둔 채 혈혈단신으로 중국으로 떠났다. 그때 나이 41세였다.

"미국 워싱턴에서 태권도를 통해 민간 외교에 크게 기여한 이준구씨를 보며 큰 자극을 받았어요. 그 순간 다른 나라에 가서 태권도로 국위선양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후 미국을 오가며 시장을 살피던 중 2008년 베이징올림픽 이후 중국이 경제적으로 크게 부상할 거라는 뉴스를 봤다. 미국 대신 중국에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중국에 아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무엇보다 중국어를 전혀 할 줄 몰랐다. '니하오(안녕)'조차 쓰지 못했다. 일단 중국어부터 공부해야겠다고 생각해 대학교 어학 속성반을 등록했다. 당연히 학생 중 나이가 가장 많았다. 밥 먹고 자는 시간 빼고 공부만 했다. 어느 정도 소통이 가능해지자 사업에 대해 고민했다.

"중국에서는 '꽌시'라는 관계 문화가 중요했습니다. 인맥을 쌓기 위해 대학 진학을 결심했죠."

중국을 떠나야 하나 고민이 들 만큼 학위 취득 과정은 쉽지 않았다. 그러나 7년간의 노력 끝에 칭화대 체육학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외국인으로서는 최초였다. 이후 칭화대와 베이징대에서 초빙교수로 임용돼 3년간 태권도를 가르쳤다.

시범단 운영과 중국 최초 태권도 학위 설립

시범단 창설은 오랜 꿈이었다. 한중 문화교류 행사에서 태권도를 널리 알릴 수 있어서다. 그러나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운영비용이 컸다. 그래서 '꽌시'를 이용해 2023년 중국 수도체육대학에 중국 최초로 태권도 학위 과정을 설립했다. 조건은 학생들에게 학비와 어학, 기숙사를 지원하는 대신 본인은 월급을 받지 않는 것이었다.

"코로나 이후로 학생 모집이 어려워져, 중국뿐 아니라 다른 나라 학생들로 확대했어요. 30명 중에 16명이 모였죠. 진정으로 태권도를 배우고 싶어서 온 친구들이에요."

무술의 나라 중국에서 태권도 전공을 설립한다는 건 의미 있는 일이었다. 이는 태권도가 가진 교육적 가치와 무도 정신이 중국 사회에서 확고한 신뢰를 얻었음을 증명하는 결과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언젠가는 한국 태권도 관계 기관과 정부도 그 의미를 알아 주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도 가지게 됐다.

그는 "태권도는 내 인생 자체"라고 말했다. 자신을 성장하게 만든 스승이자, 낯선 환경에서도 사람들과 마음을 나누게 해준 언어라고 했다. "앞으로도 태권도를 통해 한중 양국을 잇는 가교 역할을 하는 것이 평생의 사명"이라고 덧붙였다.

"어렸을 때 서울 북아현동 달동네에서 살았어요. 밤마다 안산을 뛰어오르며 훈련을 했고, 산 정상에서 혼자 품새와 발차기를 연습했습니다. 훈련을 마치고 자정이 넘은 시간에 약수터에서 차가운 물로 샤워하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해요. 그 시절의 간절함과 절실함이 지금의 저를 지탱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월간산 4월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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