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이한 균열의 감각… 기존의 ‘나’를 깨뜨리고, 기어코 빚어낸 새로운 세계

이지윤 기자 2026. 4. 2. 04: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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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렬한 색이 쓰인 도형이 어지럽게 교차하는 영상.

영상과 회화, 설치 작업을 아우른 출품작들은 마치 외계를 마주한 듯한 감각으로 관람객에게 일격을 가한다.

이탈리아 출신 작가 아그네스 퀘스천마크의 '의료(수)술'은 거친 화질과 강한 색 대비로 수술 장면을 연출한 영상물.

녹색 수술복을 입은 의사는 피가 뿜어져 나오는 주사기를 쥔 채 환자의 촉수 돋은 몸에 날카로운 메스를 갖다 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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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민미술관 기획전 ‘기.기.기(奇.己.氣): 동시대와 시행착오
’촉수 돋은 신체-회색빛 마네킹 등 외계 마주한 듯한 감각 느끼게 해
“완성도 높은 기존 예술서 벗어나… 시행착오적 시도 통해 현실 각성”
아그네스 퀘스천마크의 ‘하지 해부’(2024년). 끊임없이 변하는 자아와 흔들리는 상태가 촉수 달린 신체로 표현됐다. 이지윤 기자 leemail@donga.com
강렬한 색이 쓰인 도형이 어지럽게 교차하는 영상. ‘정지(STOP)’와 ‘영토(TERRITORY)’, ‘점거하라(OCCUPY)’, ‘바꾸라(CHANGE)’ 등 정보와 경고를 오가는 메시지가 차례로 쏟아진다. 화살표와 삼각형, 십자가가 점차 빠르게 비틀리고, 익숙했던 기호들은 공포스럽게 혹은 우스꽝스럽게 느껴진다. 100초 동안 이어진 영상 끝에 남은 건, 어딘가 찝찝한 혼란스러움.

이 작품은 아일랜드 출신 작가 오웬 라이언의 새 실험적 영상작품 ‘지독한 단순화들’이다. 서울 종로구 일민미술관에서 1일 개막한 기획전 ‘기.기.기(奇.己.氣): 동시대와 시행착오’에서 만날 수 있다.

작품은 공공장소의 표지판과 현수막 등에서 자주 표현되는 시각 기호를 다뤘다. 동아미디어센터 외벽에 설치된 미디어 사이니지 ‘룩스(LUUX)’에도 오전 11시부터 오후 5시까지 매시간 15분에 송출돼 광화문이란 상징적인 공론장에서 작동하는 기호의 의미를 묻는다.

‘기.기.기’전은 이처럼 ‘기이하고 으스스한 감각’을 권태와 허무가 만연한 현대사회에 균열을 낼 도끼로 제시한다. 때로는 포르말린 용액에 박제된 상어를 마주해도 시들하게 여겨지는 현실을 깨부술.

윤율리 미술관 학예실장은 “오늘날은 무엇도 완전히 사라지거나 시작되지 않는 ‘닫힌 세계’로 보인다”며 “매끈하고 완성도 높은 기존의 예술적 실험들과 다른 ‘시행착오’적 시도를 통해 현실을 각성시킬 삐걱거림을 만들려 했다”고 기획 의도를 밝혔다.

전시 제목인 3개의 ‘기’는 기이함(奇)과 자기(己), 분위기(氣)를 가리킨다. 미술관 측은 각각이 “사회가 규정한 정상성의 범위를 벗어난 일, 고정되지 않은 ‘자신’을 받아들이고 혼란을 키우는 일, 정확히 관측하기 어려운 기류나 진동을 다루는 일과 관련돼 있다”고 설명했다.

영상과 회화, 설치 작업을 아우른 출품작들은 마치 외계를 마주한 듯한 감각으로 관람객에게 일격을 가한다. 이탈리아 출신 작가 아그네스 퀘스천마크의 ‘의료(수)술’은 거친 화질과 강한 색 대비로 수술 장면을 연출한 영상물. 녹색 수술복을 입은 의사는 피가 뿜어져 나오는 주사기를 쥔 채 환자의 촉수 돋은 몸에 날카로운 메스를 갖다 댄다. 작품은 “정상성의 범주에 따라 결핍되거나 초과한 신체 일부를 수선하는 행위로 ‘권위와 통제의 개입’을 상징한다”는 부연설명이 붙어 있다.

생성형 인공지능(AI)에 반영된 인간의 편향을 표현한 작품 ‘망가진 트로피’는 묵직한 생각거리를 남긴다. 석양이 비추는 사바나를 배경으로 서구의 남성이 야생동물을 사냥하는 장면은 오랫동안 낭만적으로 통용돼 왔다.

이 같은 ‘트로피 헌팅’이 AI에서도 시각적 문법처럼 작동하는 걸 확인한 작가 최빛나와 송수연은 형태를 바꿔 보려다 시행착오를 거쳤다. ‘아기’, ‘식물 심기’처럼 결과물의 성격을 바꿀 법한 프롬프트를 입력했지만 “기계 모델에 정착한 기억은 유령처럼 사라지지 않았다”고 한다.

홍은주의 ‘플레이어들’. 이질감이 느껴지는 자세와 표정으로 표현된 마네킹이 섬뜩한 분위기를 풍긴다. 이지윤 기자 leemail@donga.com
홍은주의 ‘플레이어들’은 매우 직관적으로 기괴한 느낌을 준다. 가면을 정수리에 뒤집어쓴 채 주저앉은 마네킹은 분명 사람이 아닌 줄 알면서도 다가가기 어렵다. 어색하게 꺾인 팔다리와 비뚜름한 회색빛 얼굴, 텅 빈 눈빛이 으스스하다. 인간의 생명력을 꿈꿀지도 모르는 이 인형에서 ‘인형 같은 외모’를 꿈꾸는 사람들의 욕망이 겹쳐 보이기도 했다.

이 밖에도 유지오의 ‘스테잉(staying)’, 송민정의 ‘오렌지 카푸치노 구멍난 양말’, 제니퍼 칼바료의 ‘건축과 풍경 속 수태고지’ 등 제도와 역사, 기술에 의문을 던지는 작품을 다수 선보인다. 5월 31일까지.

이지윤 기자 leemail@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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