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서 작두 탄 ‘전쟁의 신’ 맥아더… 북진 땐 헛발질 거듭 나락으로 [명장]

이영창 2026. 4. 2. 04: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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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장: 한국전쟁의 장군 열전]
더글러스 맥아더 下: 거인의 퇴장 ①
편집자주
6.25 기획 ‘명장’이 다루는 마지막 장군은 더글러스 맥아더입니다. 맥아더에 대해선 할 말이 참 많습니다. 관련 기록도 방대하고, 평가도 극단적으로 갈립니다. 그래서 한국일보는 맥아더만큼은 한 번에 끝내지 않고, 세 달에 걸쳐 세 번(상·중·하)으로 나눠 최대한 상세한 이야기를 다루고자 합니다. 4월 출고되는 마지막 세 번째 파트(하편)는 맥아더 군사 경력의 최대 오점인 1950년 겨울 중공군 개입을 다룹니다. △중공군의 1·2차 공세 △중공군 공세에 밀린 맥아더의 대응 등 두 차례로 나눠 연재합니다. 이 글은 그중 첫 번째입니다.
더글러스 맥아더 미 육군 원수

※'인천, 그리고 서울'에서 이어집니다.

“인천 상륙 성공 이후 더글러스 맥아더는 고대 그리스 영웅처럼 거침없는 운명을 향해 전진했다.”

6·25 전쟁 당시 미 육군참모총장 로턴 콜린스의 평가다. 맥아더가 한국에서 맞이한 영광-오욕의 전환점을 이 문장만큼 적확하게 표현한 글은 없었다. 마치 그리스 비극의 주인공처럼, 맥아더의 운명도 격렬하고 극적인 속도로 파국을 향하여 치달았다. 목동에서 왕이 된 후 신탁의 굴레(부친 살해+모친 결혼)를 벗지 못하고 운명의 절벽으로 떨어진 오이디푸스처럼, 12개 과업 해결 후 질투에 사로잡힌 아내 때문에 죽음을 맞이한 헤라클레스 같이, ‘미국 역사상 최고의 전쟁 영웅’ 대접을 받던 맥아더는 인천 상륙 2개월 만에 ‘미국 역사상 최악의 패배’를 당하며 나락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인천에서 맥아더는 그야말로 ‘전쟁의 신’이었다. 적은 그가 예측한 그대로 움직였고, 전황은 그의 예언과 똑같이 전개됐다. 그러나 정말 신기하게도 1950년 9월 28일(서울 수복)부터 갑자기 맥아더의 신기(神氣)가 어디론가 사라지고 말았다. 신들린 것 같았던 맥아더의 선택은 다 빗나가기 시작했다. 그가 “별일 아닐 것”이라고 예측한 일들은 모두 ‘큰 사건’으로 이어졌고, 그가 “그럴 일 없다”고 했던 것들은 결국 전부 실제 사건으로 일어났다. 맥아더의 인천 상륙 성공이 ‘신기’나 ‘실력’이 아니라 그저 ‘행운’과 ‘우연’의 연속이 아니었을까, 사람들은 의심을 품기 시작했다.

흔들림 없던 맥아더 신화에 금이 가기 시작한 건 ‘원산 상륙’ 실패부터다. 서해안의 인천에서 대성공을 거둔 맥아더는 동해안에서도 같은 식의 상륙작전을 성공시켜 북한군을 뒤흔들고 적의 수도 평양을 양면 공략(서울에서 북진+원산에서 서진)하고자 했다. 차분한 육상 진격보다는 화려한 상륙을 통해 여론의 관심을 끌고자 했던 맥아더다운 쇼맨십이었다.

1950년 10월 국군과 유엔군의 북진 상황. 강준구 기자

당시 상황을 자세히 살펴보면 2차 상륙작전이 적절치 않았음을 알 수 있다. 미 10군단의 인천 상륙과 미 8군의 낙동강선 돌파 이후 북한군은 아무 저항도 못하고 지리멸렬 북쪽으로 쫓기고 있었다. 해서 유엔군은 충분히 육상을 통해서도 진격할 수 있었다. 그런데 맥아더의 고집 때문에 동부전선 10군단은 굳이 해상 경로를 따라 북진을 시도하게 됐다. 상륙군을 일단 서울에서 부산항으로 빼내 배에 태운 뒤, 다시 원산으로 싣고 가는 복잡한 과정을 거쳐야 했다. 병력 운송보다 어려웠던 게 무기·장비·보급품 수송이다.

원산까지 배를 타고 가는 것보다는 그냥 서울에서 원산까지 추가령구조곡(서울~원산 골짜기)을 통해 곧바로 이동하는 게 훨씬 간편했다. 결국 육상 경로를 택한 국군 1군단은 10월 10일 원산에 입성했는데, 이때는 아직 미 10군단이 배에도 오르지 못한 상태였다. 그럼에도 맥아더는 계속 상륙작전을 강행했고, 미 10군단은 원산항 기뢰 제거 작업에 열흘 가까이 시간을 허비하다 10월 26일에야 국군이 이미 점령한 원산항에 전투도 없이 들어갔다(행정상륙). 당시 원산에 걸어 들어갔던 미해병1사단장 올리버 스미스 소장은 “해병대 역사상 가장 긴장감 떨어지는 상륙이었다”고 겸연쩍어 했다. 이렇게 유엔군 주력이 바다 위를 떠다니며 결정적인 시간을 허비하느라 북한군 잔당을 궤멸시키지 못했고, 나중에 있을 중공군 개입에 제대로 대비하지도 못했다.

이승만 대통령이 1948년 8월 15일 정부 수립 기념식에서 더글러스 맥아더 미 육군 원수와 대화를 나누고 있다. 위키미디어 커먼스
“서울 환도식(1950년 9월 29일)에서 맥아더가 관례상 어쩔 수 없이 모자를 벗었는데, 그때 비로소 맥아더가 신기하게도 인간적으로 보였다. 모자를 벗으니 너무 늙어 불쌍해 보일 정도였다.”

(서울 수복 기념식 현장에 있던 영국 기자 레지널드 톰슨)

①평양 10월 19일: 압록강을 향한 질주

하지만 원산 상륙은 당시로선 작전 실패라기보단, 이기는 과정에서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해프닝’ 정도로 받아들여졌다. 전황은 여전히 유엔군에 유리했고, 맥아더의 군사적 권위에 감히 도전할 만한 사람은 아직 없었다. 서부전선에선 월튼 워커의 미8군(미군·국군·영연방군 등 연합)이 평양을 향해 순조롭게 북진 중이었고, 동쪽 에드워드 알몬드의 미 10군단도 원산에 늦게 가긴 했지만 압록강과 두만강을 향해 북진을 준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원산의 좌절’은 ‘평양의 성공’으로 완벽하게 가려졌다. 10월 19일 백선엽의 국군 1사단이 기동력 뛰어난 미군 사단들과의 속도 경쟁에서 승리하며 평양 시내에 최초 입성하는 영예를 안았다. 이것은 유엔군이나 미국 입장에선 ‘냉전 이후 최초로 공산주의 국가 수도를 점령’한 쾌거였다. 냉전 시작 이후 서방 국가들은 소련군이 수백만 병력과 수만 대의 전차로 파상 공세를 가해올까 항상 불안에 떨고 있었는데, 냉전 이후 공산-자유진영 간 첫 대규모 전쟁인 한국전에서 적국 수도를 차지하는 군사적 대성공을 거둔 것이었다. 이 승리의 영광 또한 인천 상륙전과 서울 수복전을 승리로 이끈 맥아더의 공으로 돌아갔다. 대통령 해리 트루먼은 맥아더의 끝도 없는 건방이 내심 못마땅했지만, 마지못해 칭찬 전문을 보냈다. “장군의 지휘 아래 이뤄진 한반도에서의 군사 작전은 세계 평화에 가장 심대한 영향을 줬습니다”는 찬사를 해야 했다.

1950년 10월 19일 미군 장교들이 평양에서 가장 먼저 평양 진입에 성공한 백선엽(가운데) 국군1사단장을 축하하고 있다. 해리 트루먼 도서관

전쟁은 끝이 보였다. 북한의 주요 도시 평양과 원산을 모두 점령했고 궤멸 직전 북한군은 산악지대에 숨어 있었기 때문에, 유엔군이 몇 차례만 진격을 거듭하면 머지않아 한반도 통일을 어렵지 않게 달성할 수 있을 것 같았다. 10월 15일 남태평양 웨이크섬에서 트루먼을 만나 “추수감사절(11월 넷째 목요일인데 그해는 11월 23일)까지 전쟁을 끝내겠다”고 큰소리친 맥아더의 약속이 실현되는 것처럼 보였다.

워싱턴 합동참모본부에선 속전속결보다 안전한 진격이 필요하다는 신중론도 있었다. 한반도에서 가장 동서 간격이 좁은 평양-원산선을 안전하게 확보하면서, 북한군 재편성이나 중국 개입 가능성을 지켜보자는 목소리였다.

그러나 맥아더는 워싱턴의 신중론을 일축하고 공세를 서둘렀다. 원래 전쟁의 최종 목표와 진행 속도는 최고사령관인 대통령과 대통령 위임을 받은 합참이 결정할 문제였음에도, 당시 맥아더는 전쟁의 본질에 해당하는 이런 내용까지 도맡아 결정하고 있었다. 심호섭 육군사관학교 교수는 논문에서 “워싱턴(NSC와 합참)이 제대로 상황 파악을 못한 채 결정을 유보하는 동안, 합참 승인을 받아 작전 계획을 수립해야 했던 맥아더가 역으로 전략 수립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상황이 벌어진 것”이라고 당시 상황을 설명했다. 특정 지역만을 담당해야 할 일개 전구사령관(theater commander)이 나라 전체 운명이 걸린 전쟁의 성격 규정에까지 관여하고 있었던 것이다.

미1기병사단 장병들이 1950년 10월 19일 태극기를 꽂고 평양 시내로 입성하고 있다. 대한민국 국군
“평양을 점령한 미 1기병사단과 한국군 1사단은 곧바로 평양을 벗어나 다음 작전을 준비했다. 10월 23일 평양에 있던 미군 부대는 각종 문서를 수집하는 200명 규모의 부대(인디언헤드 TF)뿐이었다.”

(앨런 밀레 ‘The War for Korea 1950-1951’ 중에서)

결국 맥아더는 평양 점령 후 5일 만인 10월 24일 워커 8군(서부전선)과 알몬드 10군단(동부전선)에 “최대한의 수단을 동원해 가장 빠른 속도로 북진하라”는 명령을 하달했다. 압록강을 향한 유엔군의 총공세가 시작된 것이다.

평양 북쪽에서 유엔군은 어떤 적을 맞이할 것인가. 지리멸렬하는 북한군? 아니면 혹시… 당시에도 미국 정부가 중공군 참전을 걱정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었다. 중국공산당이 한반도에 군대를 보낼 수 있다는 경고는 인천상륙작전 이후 미국 정부로 계속 들어오고 있었다. 그때는 미국 정부와 중국 공산당 간 직접 외교 채널이 없었기 때문에, 주로 제3국을 통해 메시지가 도착했다. 국군과 유엔군이 서울을 공략하고 있던 9월 25일, 인민해방군 총참모장 대리 녜룽전(섭영진)은 주중 인도대사 K. M. 파니카르를 만나 “미군이 북위 38도선을 넘으면 중국이 개입할 것”이라는 경고를 전달했다.

며칠 후 이보다 더 확실할 수 없는 최고위 정보원으로부터 두 번째 경고가 나왔다. 중국 2인자인 총리 겸 외교장관 저우언라이(주은래)가 10월 2일 파니카르를 소환해 “한국군이 38선을 넘는 것은 몰라도 미국이 선을 넘으면 분명히 중국의 저항에 직면할 것”이라는 매우 구체적인 경고를 전달했다. 영연방인 인도를 통해 메시지를 보내면 런던을 거쳐 워싱턴에 진의가 전달될 거라 생각했던 것이다.

북한 내각수상 김일성(왼쪽)과 중국 총리 저우언라이가 1958년 만나 함께 식사를 하고 있다. 11월 김일성의 중국 방문 때로 추정된다. 위키미디어 커먼스

경고가 워싱턴에 도착하긴 했다. 그러나 미국 정부는 “통일(1949년) 이후 내부적 문제가 많은 중국 공산당이 미국과 전쟁할 여력이 없을 것”이라며 저우언라이의 경고를 ‘블러핑’에 불과한 것으로 판단했다. 영국 해외정보국(MI6)으로도 비슷한 첩보가 들어갔다. 중국공산당 내부 인사로부터 “중국공산당 지도부가 한국에 40만 명의 병력을 투입하기로 결정했다”는 정보가 확인됐지만, 미국 정부는 이 첩보의 신빙성을 낮게 봤다. MI6의 ‘40만 명 투입’ 정보는 지금 보면 매우 정확한 내용이었지만, 당시는 터무니없는 과장으로 받아들여졌다. 결국 미국 정부는 유엔군의 북진이 시작된 10월 24일까지도 중공군 개입 가능성에는 아무런 준비도 하지 않고 있었다.

맥아더도 손을 완전히 놓고 있었다. 맥아더 사령부는 자체 정보 분석을 통해 중공군 개입 가능성이 없다고 판단했다. 이들은 1950년 여름 내내 중국 남부와 중부 지역에 있던 인민해방군이 계속 북부 지방으로 올라가는 것을 확인했음에도 단순히 “국공내전 때 남하했던 부대가 원래 자리로 돌아가는 것”이라며 안일한 판단을 내렸다. 1950년 9월 맥아더 사령부는 만주에 있던 중공군 병력이 45만 명에 달하는 것으로 파악했지만, 베이징 정부가 이 대병력을 압록강 너머 한반도로 보내리라고는 결코 생각하지 않았다.

결국 10월 24일 워커의 8군은 북한 패잔병만 소탕하면 통일을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하며 거침없이 북진을 시작(추수감사절 공세)했다. 그러나 한반도 북부 적유령 산맥과 청천강 사이 산악지대엔 이미 20만 명 이상의 중공군이 몸을 숨긴 채, 똬리를 틀고 유엔군을 삼킬 준비를 하고 있었다.

워커와 맥아더가 1950년 10월 20일 평양에서 만나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해리 트루먼 도서관
“재앙이 터졌다. 거대한 중공군 병력이 눈 덮인 산속에서 갑자기 튀어나온 것이다. 중공군은 마치 유령 군대(phantom force)와도 같았다.”

(한국전쟁 종군 전사가 로이 애플먼의 ‘Disaster in Korea’ 중에서)

②운산·온정 10월 25일: 이상한 군대의 출현

추수감사절 공세는 순조롭게 시작됐다. 첫날인 10월 24일 8군 좌익인 미1군단(국군1사단+미24사단+영연방27여단)은 압록강 하류 방면으로 거침없는 진격을 거듭했다. 그러나 청천강(살수)을 넘어서면서부터 뭔가 분위기가 달라지기 시작했다. 당시 국군1사단을 지휘하던 백선엽은 “청천강을 넘자 왠지 불안한 적막감이 들었다”면서 “(청천강 이남에선) 패잔병과 피란민으로 북적이던 도로가 텅 비어 있고, 기온이 뚝 떨어져 하복을 입은 장병들이 한기를 느끼기 시작했다”고 회고했다.

가장 앞서 달려가던 백선엽 부대가 역시나 가장 먼저 적과 교전을 치렀다. 수풍댐을 목표로 북서진하던 국군1사단은 ‘동양 최대의 금광’으로 유명한 운산에서 ‘정체 불명의 대군’(백선엽의 표현)을 만났다. 산악지대에 포진하던 적의 매복에 걸려든 것인데, 당시엔 이게 중공군인지도 몰랐다. 교전 과정에서 국군 15연대가 붙잡은 ‘이상한 포로’를 심문하고서야, 유엔군을 막아선 적병은 북한군이 아닐 수 있다는 점을 뒤늦게 눈치챘다. 일본군 복무 시절 중국 군대와 접촉 경험이 많았던 백선엽은 포로를 직접 심문한 뒤 단박에 중공군임을 간파하고 직속상관인 미1군단장 프랭크 밀번 소장에게 중공군 참전 사실을 보고했다. 밀번도 이를 8군사령관 워커와 맥아더 사령부에 보고했지만, 맥아더는 별일이 아닐 것이라고 판단했다. 맥아더 사령부 정보참모들은 객관적 사실을 외면하고 소수의 중공군 병력이 ‘지원병’ 형식으로 한반도에 들어왔을 뿐이라고 결론 냈다.

압록강 중류 초산 방면으로 정북진하던 8군 우익 국군2군단(국군 6·7·8사단)도 이 이상한 군대와 마주쳤다. 국군 1사단이 중공군과 조우한 10월 25일, 김종오의 국군 6사단은 운산 동쪽 온정에서 중공군과 대규모 교전을 치렀다. 백두대간 건너 미10군단 관할인 동부전선에선 10월 29일 중공군 포로가 16명이나 무더기로 잡히기도 했다.

이처럼 모든 전선에서 중공군이 모습을 드러냈음에도 맥아더 사령부는 현실을 외면하고 ‘중공군 개입 사실’을 인정하지 않았다. 왜 그랬을까? 만약 당시 맥아더가 중공군 개입 사실을 받아들이고 8군과 10군단의 방어를 평산-원산선에서 단단히 한 뒤 신중한 진격을 했더라면, 유엔군은 중공군 1차 공세(10월 말~11월 초)와 2차 공세(11월 말~12월 말)에서 큰 피해를 입지 않고 북한에서 반격 기회를 잡았을 가능성이 높다.

미 해병1사단이 1950년 11월 장진호 전투에서 붙잡은 중공군 124사단 소속 포로들의 모습. 미 해병대
“우린 10월 17일부터 한국군을 덮치기 위해 산속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1950년 10월 25일 붙잡힌 중공군 포로의 증언)

당시 미군 지휘부가 꿩처럼 머리를 처박고 “우린 안전하다”고만 외쳤던 이유는 ‘맥아더가 바로 그것을 원했기 때문’이다. 도쿄 시절(1945~1951년) 맥아더는 참모진을 모조리 자신의 추종자들로만 채우고 그들이 형성한 ‘인의 장막’ 안에서 달콤한 보고와 아첨만 들으며 살았다. 맥아더의 성향을 가장 잘 알았던 정보참모 찰스 윌로비 소장은 수집된 정보를 객관적으로 분석해 보고하기보다는, 맥아더가 좋아할 만한 내용만 취사선택해 첩보 보고서를 올렸다. 당시 맥아더가 중공군 개입 가능성을 머리에서 지웠기 때문에, 정보참모들 또한 맥아더 판단에 따라 “안 들어올 것”이라는 보고서만 계속 썼던 것이다.

맥아더가 내린 결론에 짜 맞추기 위해 윌로비의 정보부는 이상한 논리로 중공군 개입 불가 이유를 설명했다. 윌로비는 “중공군이 개입하려면 전세가 결판나기 전에 먼저 했어야 했다”며 “이미 북한군이 소멸하고 있는 지금 중공군이 전쟁에 개입할 이유가 없다”고 분석했다. 제대로 된 정보장교라면 적의 입장에서 적의 논리에 따라 적의 미래 행동을 유연하게 예측해야 했음에도, 윌로비는 자국의 논리와 상관의 가치관에 따라 적의 의도를 오판하고 말았다. 이를 두고 당시 도쿄사령부 상황을 잘 알던 10군단 작전참모 잭 칠스 대령(지평리 전투 폴 프리먼 후임 23연대장)은 “맥아더 장군이 중공군의 한반도 진입을 원치 않았기 때문에, 윌로비 또한 맥아더가 ‘원하는’ 정보만 생산했다”며 “윌로비는 당시에 분명 감옥에 갔어야 했다”고 말했다.

미군의 중공군 병력 추정치 변화. 박종범 기자

중공군은 한반도에 들어오기 전 이미 유엔군과 어떻게 싸울지 다 생각해 놓고 있었다. 중국 지도부는 한국군과 미군의 △숙련도 △기동력 △무장 △장교 수준 등 종합적 전력 차이를 이미 잘 파악하고 있었다. 그래서 ‘약한 고리’인 국군을 향해 초반 공격을 집중해 국군 쪽 전선을 무너뜨린 다음, 그 무너진 틈으로 병력을 집중 투입해 미군 퇴로까지 단숨에 끊고 유엔군 군단 전체(나중엔 8군 전체)를 포위 섬멸하겠다는 구상이었다. 국군 위주 공략이 제대로 먹혀 들어간 것이 바로 10월 25일부터 11월 7일까지 이어진 중공군 1차 공세다. 중공군의 첫 공격을 받은 아군 부대가 바로 국군 1사단(운산)과 국군 6사단(온정)이라는 점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비극은 국군을 구하러 들어온 미군 부대로도 이어졌다. 중공군의 급습을 받고 멈춰 선 국군 1사단을 구하러 온 미1기병사단은 도리어 운산에서 1개 대대 전체(8기병연대 3대대)를 잃는 치명적인 패배를 당했다. 적에게 포위당한 대대 병력을 도저히 구할 길이 없어 군단장이 사단장에게 ‘구출 포기 명령’(11월 3일)을 내렸을 정도로, 미군 역사에 길이 남을 치욕적인 패배였다. 적중에 고립된 3대대 장병들은 개별적으로 포위망을 뚫고 탈출할 수밖에 없었는데, 그러다가 대대 병력 800여 명 중 600여 명이 죽거나 포로로 잡혔다. 태평양전쟁 당시 맥아더를 따라 뉴기니, 레이테, 루손에서 혁혁한 공을 세웠던 미육군 정예 1기병사단은 궤멸적 타격을 입고 청천강 이남으로 물러나 유엔군 전력에서 일시적으로 이탈하고 말았다.

미 1기병사단 군종장교 에밀 카폰 대위가 부상당한 병사를 부축해 후송하고 있다. 카폰 대위는 1950년 11월 초 중공군 1차 공세 때 북한 지역에서 고립돼 포로로 붙잡혔다가 수용소에서 사망했다. 버락 오바마 미 대통령은 2013년 카폰 대위에게 최고 영예인 명예훈장을 사후 추서했다. 미 육군
“적이 진격하면 우린 후퇴한다(敵進我退).
적이 멈추면 우린 교란한다(敵駐我攪).
적이 피곤하면 우린 공격한다(敵疲我打).
적이 후퇴하면 우린 추격한다(敵退我追).”
(마오쩌둥이 강조한 유격전법인 ‘16자 전법’)

③적유령산맥 11월 7일: 적이 사라졌다

이 정도로 불의의 일격을 당했다면, 잠시 고삐를 놓고 무엇이 잘못됐는지를 처음부터 찬찬히 돌이켜보는 게 사리에 맞다. 다행히도 워커는 그렇게 했다. 워커는 8군 전병력을 다시 청천강선으로 물리고 추가 보급과 병력 충원에 힘을 쏟았다. 그러나 맥아더는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그는 여전히 낙관적이었다. 1기병사단 패배 이후인 11월 4일 워싱턴에 보낸 서신에서 “중공군은 보급 문제가 있기 때문에 개입 가능성은 매우 낮다”며 여전히 현실을 외면했다.

그사이 중공군은 청천강의 유엔군 쪽으로 더 이상 남하하지 않았다. 청천강 이북 쪽에서도 중공군의 공세 강도가 점점 약해졌다. 그러다 11월 7일에 이르러서는 중공군이 전선에서 싹 모습을 감추는 상황이 벌어졌다. 왜, 어디로 사라진걸까? 적이 갑자기 실종된 이유를 정확히 분석한 뒤 행동에 나서야 했지만, 맥아더는 이번에도 객관적 정보를 따르지 않고 자기 편의에 따라 중공군 실종 사건을 해석했다. 중국이 북한을 구하기 위해 전면적으로 나선 게 아니라 압록강 이남에 완충지대를 만들 목적으로 제한적으로만 개입했을 뿐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면서 압록강이 얼어붙기 전(당시 CIA 예상으로 11월 24일~12월 10일 결빙) 공세를 재개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패배 원인도 찾지 못한 채, 적의 정확한 규모도 모르는 상태로, 유엔군은 오로지 맥아더 한 사람의 의지에 따라 또다시 위험한 공세에 나서야 했다.

중공군에게 한번 호되게 당한 워커는 이번엔 신중했다. 2차대전 유럽 전선 조지 패튼의 휘하에서 가장 용맹스러운 군단장으로 불리던 ‘불독’ 워커였지만, 이번 공격은 그리 내키지가 않았다. 불안한 마음에 1차 공세(추수감사절 공세)보다 병력을 보강해 좌익(미1군단)과 우익(국군2군단)외에 중앙에도 1개 군단(미9군단)을 추가했다. 그리고 맥아더에게 보급을 위해 공격 개시일을 미뤄줄 것을 요청했다. 결국 11월 24일이 공세 재개일로 결정됐다.

여전히 맥아더와 워커는 중공군의 능력을 과소평가하고 있었다. 맥아더는 11월 17일 주한미대사 존 무초와의 만남에서 중공군 병력을 3만 명 수준으로 예상했고, 8군 정보참모는 11월 21일 중공군 규모를 6만 명으로 추정했다. 2차 공세 시작일인 11월 24일 윌로비는 “최소 4만에서 최대 7만1,000명 수준”이라고 추산했다. 그러나 이미 한반도에 들어와 있던 실제 중공군 병력은 30만 명에 달하고 있었다.

1950년 11월 23일 추수감사절 존 쿨터 미군 9군단장이 군우리에서 병사들에게 추수감사절 만찬을 배식하고 있다. 미 국립문서기록관리청

총공세 전날인 11월 23일은 추수감사절이었다. 병사들은 이번 공격만 성공하면 이 지긋지긋한 전쟁이 곧 끝날 것이라는 기대감에 가득 차 있었다. 이날 밤 8군 장병들은 후방에서 공중 수송된 훈제 칠면조에 크랜베리 소스를 곁들여 먹었고 △칵테일 새우 △아스파라거스 △토마토 △올리브 △파인애플 △견과류 △과일 케이크 △과일 칵테일로 이뤄진(한 호주 병사의 기록에 남은 메뉴) 성대한 만찬을 즐길 수 있었다.

8군 전체에 희망이 가득한 날이었지만 ‘불독’ 워커는 남들이 맡지 못한 이상한 냄새를 맡은 것처럼 불안한 마음을 지울 수 없었다. 워커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맹장이었지만, 당시 8군 군수참모(G-4) 앨버트 스테빈스 대령의 증언에 따르면 워커가 맥아더에 의해 강요된 이 총공세를 매우 주저했다고 한다. 그는 마지못해 총공격 명령을 내리긴 했지만, 좌측 공략을 맡은 1군단장 밀번에게는 “중공군이 출현하면 곧바로 병력을 뒤로 물리라”는 당부를 남겼다. 또 부대의 진격 한계선을 미리 설정해 두고 이 선을 넘어서 북진할 때는 자기 승인을 받도록 했다.

워커의 걱정은 기우가 아니었다. 추수감사절 다음 날, 유엔군에 진짜 지옥이 찾아왔다.

1950년 11월 미 8군 소속 병사들이 청천강 방어선에 기관총 진지를 설치하고 있다. 미 국립문서기록관리청
“유엔군의 거대한 포위 압박이 결정적인 결실의 순간을 맞이하고 있다. 오늘 유엔군은 진격을 시작했다. 이것이 성공한다면 전쟁을 끝낼 수 있다. 한반도에서 평화를 되찾고 통일을 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유엔군은 즉각 철수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지금껏 싸운 이유가 바로 그것이었다.”

(1950년 11월 24일 더글러스 맥아더의 코뮈니케)

④청천강 11월 24일: 생지옥의 시작

1950년 11월 24일 10시 마지막 공세가 시작됐다. 지상군 총병력 24만 명으로 구성된 워커 8군은 세 갈래(좌: 미1군단, 중: 미9군단, 우: 한국군2군단)로 나눠 압록강을 향해 달렸다. 그날 아침은 추웠지만, 낮에는 영상 14도까지 올라갈 정도로 날이 풀렸다고 한다. 전 세계 언론의 눈이 공세 출발점 청천강으로 쏠린 순간을 맥아더가 놓칠 리 없었다. 맥아더는 이날 도쿄에서 여러 명의 기자를 대동하고 날아와 신안주에 있던 8군 전방지휘소를 방문했다. 그는 기자들 앞에서 “이번 공격이 성공한다면, 유엔군 장병들을 크리스마스 전까지는 집으로 돌려보낼(Home by Christmas) 수 있을 것”이라고 자신했다. 그래서 기자들은 이 두 번째 총공격에 ‘크리스마스 공세’라는 별칭을 붙였다.

상황은 한 달 전 ‘추수감사절 공세’와 똑같이 돌아갔다. 공격 첫날 왼쪽의 밀번 1군단, 가운데 쿨터 9군단이 압록강 방면으로 순조로운 진격을 거듭했다. 몇 시간 만에 최대 24㎞까지 북진한 부대도 있었다. 중공군은 진짜로 한반도 땅에서 다 사라진 것만 같았다.

그런데, 한 달 전처럼 이번에도 8군 오른쪽을 담당하던 한국군 쪽에서 일이 터졌다. 산악지대로 북상 중이던 국군2군단 소속 7·8사단이 공세 이틀째인 11월 25일 평안남도 덕천 근처 금성호 일대에서 중공군의 강력한 공격을 받았다. 적은 정확히 7사단(8연대)과 8사단(10연대) 경계 지점에 가장 강력한 공격을 퍼부으며 국군 병력을 몇 시간 만에 절반으로 찢어버리는 데 성공했다. 이미 11월 26일 아침에는 국군2군단 전체가 혼란에 빠질 정도로 전황이 빠르게 악화됐다. 이번에도 한국군을 먼저 공격하고 그 틈 사이로 들어와 미군을 포위하는 중공군 전술이 성공을 거뒀다.

전선 오른쪽 한국군 군단이 이미 전투력을 거의 상실했지만, 맥아더와 워커는 상황이 얼마나 나쁜지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패배 소식이 속속 도착하고 있었지만, 워커는 이를 8군 전체의 문제로 인식하지 않고 한국군 작전 지역 내 국소적 문제로 여기고 있었다. 묘향산 북쪽 희천으로 접근하던 미 2사단이 공격을 받은 구장동 전투(11월 25~28일), 튀르키예 여단이 중공군과 첫 번째로 맞붙은 와원 전투(11월 27~30일)를 치르며 비로소 적의 공격을 감당하기 어렵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크리스마스 공세 당시 맥아더 사령부는 중공군 병력을 4만~7만 명으로 예상하고 있었다. 그러나 중공군은 실제 워커 8군 쪽 서부전선에만 18개 사단 23만 명을 배치했고, 동부전선 미 10군단 쪽에 배치된 15만 명(12개 사단)을 합치면 총 38만 대군을 운용하고 있었다. 맥아더 사령부가 자기들 편한 쪽으로만 첩보를 왜곡 해석하다가 결국 ‘범죄 수준의 예측 실패’를 저지르고 만 것으로 볼 수 있다. 워커가 아무리 날고 기는 명장이라 하더라도 예상보다 최대 10배나 많은 적병을 만나 평정심을 유지하기는 어려웠다.

1951년 미공군 B-29 폭격기가 북한 지역을 전략 폭격하고 있다. 미 공군
“20세기 미군의 최대 실수는 맥아더가 군대를 압록강까지 몰아붙인 것이었다. 중공군은 높은 언덕을 점령해 미군이 후퇴할 수 있는 길을 모두 봉쇄하고, 미군이 올라오는 모습을 조용히 지켜보고 있었다.”

(데이비드 핼버스탬 ‘콜디스트 윈터’)

결국 워커는 청천강을 포기하고 병력을 물려야 했다. 8군 전체에는 평양-원산선까지 후퇴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예로부터 적의 공세를 버티며 뒤로 물러나는 철수 작전은 공격보다 훨씬 난도가 높고, 때에 따라 많은 피해를 감수해야 하는 법이다. 당시 미 8군의 비극도 철수 작전 도중에 발생하고 말았다.

중공군은 8군의 진격과 후퇴를 다 지켜보고 있었다. 그리고 후퇴로에 미리 병력을 매복해 두고 있었다. 퇴각 도중 중공군 포위망에 제대로 걸린 부대는 8군의 가운데를 떠받치던 미2사단(현재 주한미군 주력)이었다. 당시 2사단은 군우리(개천)에 포진 중이었는데, 군우리에서 평양 방면으로 가려면 두 갈래 길 중 하나를 선택해야만 했다. ①하나는 청천강을 따라 신안주까지 서진했다가 신안주에서 왼쪽으로 90도 꺾어 숙천으로 남하하는 서쪽길이었다. 이 길은 멀리 돌아야 했지만 평야지대여서 이동이 쉬웠고 신안주-평양 간 대로를 이용할 수 있었다. ②나머지 하나는 군우리에서 곧장 순천으로 남하해 평양으로 직행하는 동쪽길이었지만, 도로가 좁고 산악지대여서 적의 기습을 받을 우려가 있었다.

당시 2사단장 로런스 카이저 소장은 동쪽길을 선택했다. 상부에서는 서쪽길을 이용하라는 지시가 내려왔지만, 서쪽길은 1군단 병력이 이용하느라 교통 정체가 심할 것이라고 생각해 직선로를 택한 것이다. 동쪽길 일부가 중공군 병력에 선점됐다는 전초부대가 보고가 있었지만 그 정도는 사단 병력으로 뚫고 내려갈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는 카이저의 치명적 착각이었다. 동쪽길을 감싼 양쪽 산악지대에는 중공군 1개 사단 병력이 제대로 자리를 잡고 유엔군 병력이 남하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결과는 끔찍했다. 11월 29일부터 12월 1일까지 사흘 동안 이어진 군우리 철수전에서 미 2사단은 계곡 양쪽 중공군에게 집요한 공격을 당했다. 당시 미군 보병사단의 정원은 1만8,000명이었으나 2사단은 이 전투 후 병력이 1만 명까지 급감했다. 이 사단에서만 5,000명 가까운 사상자(4,940명)가 발생했고, 사단 전투력은 1개 연대전투단(1개 보병연대+포병·공병 등 소규모 부대) 수준으로 추락했다. 당시 미 언론은 2사단의 참패를 ‘인디언 태형’(북아메리카 원주민이 두 줄로 서서 생포된 적을 가격했던 형벌)이라고 묘사했는데, ‘인디언 헤드’라는 별명을 가졌던 2사단이 오히려 적에게 인디언 형벌을 당하는 기막힌 치욕을 맛본 것이다.

미8군 병력이 좁은 도로를 이용해 평양 방면으로 철수 중인 장면. 1950년 11월 말 경으로 추정된다. 피란민들은 도로를 이용하지 못해 길 옆 논을 따라 대피 중이다. 해리 트루먼 도서관
“후퇴하는 병사들 사이에서 사단장(카이저 소장)도 함께 걸었다. 사단장은 ‘누가 여기 책임자인가, 자넨 누군가’라며 질문을 거듭했지만, 아무도 답하는 사람이 없었다. 시체처럼 보이는 물체를 사단장이 발로 걷어차자, 그 시체가 갑자기 ‘이 개자식이’라며 욕설을 퍼부었다. 사단장은 ‘미안하네, 친구’라며 사과할 수밖에 없었다.”

(역사가 클레이 블레어가 묘사한 미2사단의 군우리 철수 혼란상)

투스타가 일개 병사에게 상스러운 욕을 먹고 있는 사이, 백두대간 동쪽에서도 비극이 일어나려 하고 있었다. 원산에 상륙한 뒤 장진호까지 북상한 미해병1사단은 11월 27일 최대 12만 명에 달하는 중공군에게 포위돼 기습을 당했다. 미군은 자칫 2개 사단이 동시에 몰살당할 수 있는 역사상 최악의 위기에 몰려 있었다.

맥아더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이 전쟁을 쉽게 이길 수 없겠다는 생각을 처음으로 하게 됐다. 자칫하다간 패장으로 역사에 남게 생겼다. 뭔가 대책을 마련해야 했다. 그래서 서부전선 8군사령관 워커와 동부전선 10군단장 알몬드를 동시에 호출했다. 이때가 11월 28일이었다.

그러나 기가 막히게도 맥아더 자신이 한국으로 가서 작전회의를 소집한 게 아니라, 한창 바쁜 두 야전사령관을 굳이 바다 건너 도쿄 사령부까지 호출했다. 시시각각 전선이 붕괴하던 위급한 순간, 워커와 알몬드는 맥아더를 만나러 왕복 8시간 비행을 하며 장시간 자리를 비워야 했다. 공세가 시작되면 특파원들을 끌고 그렇게나 자주 한반도를 찾아 스포트라이트를 즐기던 맥아더였다. 그러나 정작 결정적 순간엔 필요한 현장 방문을 외면하고 편한 도쿄 사무실에 머물렀다. 그리고 불과 한 달 전 ‘현장 지휘 때문에 바쁘다’며 군통수권자(트루먼)를 지구 반 바퀴 돌아 남태평양 외딴섬까지 불렀던(10월 15일 웨이크섬 회담) 맥아더가 자기 부하를 소집한 중요한 회의에선 단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았다.

맥아더의 가장 나쁜 특성 중 하나인 ‘유아독존’과 ‘내로남불’이 가장 결정적인 순간, 가장 적나라한 모습으로 드러나고 있었다.

※평양철수, 워커의 죽음, 리지웨이의 부임 등 중공군 두 차례 공세에 따른 여파를 다룬 2편으로 이어집니다. 4월 9일 출고 예정입니다.

◆기사 작성에 참고한 자료
<유엔군의 반격과 중공군의 공세>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6.25 전쟁사 ⑥ ⑦’
-심호섭 ‘한국전쟁에서 미국과 중국의 첫 본격적인 대결: 중공군 2차공세와 미군의 ‘가장 긴 퇴각’에 대한 작전적 차원의 분석과 평가를 중심으로’

-Bill Mossman ‘Ebb and Flow’
-Clay Blair ‘The Forgotten War’
-Joseph Goulden ‘Korea-The Untold Story of the War’
-Roy Appleman ‘Disaster in Korea’
-Roy Appleman ‘South to the Naktong, North to the Yalu’

<맥아더의 행적>

-이상호 ‘맥아더와 한국전쟁’
-James Ellman ‘MacArthur Reconsidered’
-Stephen Taffee ‘MacArthur’s Korean War Generals’

<회고록>

-백선엽 ‘군과 나’
-Douglas MacArthur ‘Reminiscences’
-J. Lawton Collins ‘War in Peacetime’

<당시 미국 정부의 대응>

-H. W. Brands ‘The General vs. The President’
-데이비드 핼버스탬 ‘콜디스트 윈터’

이영창 논설위원 anti092@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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