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양병원과 정거장

광주일보 2026. 4. 2. 0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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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승규 대한요양병원협회 전남회장
정거장은 ‘열차나 버스 등이 일정 시간 머무르며 승객을 태우고 내리는 곳’이라는 사전적 정의를 넘어, 그보다 더 깊은 철학이 담겨 있다. 한자로 풀어보면 멈출 정(停), 수레 거(車), 마당 장(場), 즉 수레가 멈추는 마당이다. 하지만 정거장은 단순히 멈추는 곳이 아니다. 그곳은 도착과 출발이 공존하고 만남과 이별이 교차하며 일상과 여행이 맞닿는 경계다.

우리나라 근대사에서 정거장은 여러모로 특별한 의미가 있다. 1899년 경인선 개통과 함께 등장한 기차역은 새로운 문명의 관문이었고 식민지 시대에는 고향을 떠나는 이의 눈물이 밴 곳이었으며 전쟁 중에는 생사가 갈리는 피난의 길목이었다. 1953년 남인수가 부른 ‘이별의 부산정거장’은 한국전쟁의 아픔을 고스란히 담았고 곽재구의 ‘사평역에서’는 평범한 부부의 모습을 통해 한국 현대사의 애환을 담아냈다. 정거장은 거창한 역사가 아닌 소박한 일상의 터전이었다.

문학과 대중가요 속에서도 정거장은 늘 특별했다. 박목월의 ‘나그네’에서 ‘강나루 건너서 밀밭 길을’ 가는 나그네가 잠시 머무는 나루터, 황석영의 ‘삼포 가는 길’에서 공사판을 떠도는 노동자가 만나는 버스 정류장, 김수희의 ‘남행열차’에서 ‘비내리는 호남선’을 타고 떠나는 복잡한 심경까지. 우리는 인생의 전환기, 잠시 숨 고르는 시기를 비유할 때 정거장이라는 공간을 자주 사용했다. ‘길 위의 휴식처, 다음 행선지를 선택하는곳’이라는 뉘앙스가 녹아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요양병원은 어떨까? 많은 이들은 요양병원을 종착지라고 생각한다. 더 이상 갈 곳이 없는, 인생의 마지막 정거장이라고 여긴다. 하지만 15년간 요양병원에서 환자와 함께하며 보니 이것은 사실과 달랐다. 요양병원은 정거장이었다. 잠시 머물며 숨을 고르고 다음 여정을 준비하며, 때로는 새로운 만남을 기다리는 ‘정거장’말이다.

2011년 전남대학교 화순노인전문병원에서 요양병원 의사로 첫발을 내디딘 이후, 2015년 전남제일요양병원을 개원하며 지금까지 걸어온 길을 돌아보면 수많은 환자가 이곳에서 다시 일어섰다. 인공호흡기를 떼고 집으로 돌아간 할머니, 재활치료를 통해 걸음을 되찾은 어르신, 암 치료 후 새로운 삶을 시작한 청년. 이들에게 요양병원은 삶의 전환점이자 정거장이었다.

그러나 모든 환자분이 다 좋은 결과를 받아 든 것은 아니다. 이곳에서 생의 마지막을 평안하게 보내신 분도 있다. 하지만 돌이켜보면 그분에게마저도 요양병원은 종착역이 아닌, 또 다른 여정을 위한 정거장이었다.

정거장의 본질은 연결이다. 정거장은 머무는 곳이지만 떠나는 곳이고 쉬는 곳이지만, 달릴 준비를 하는 곳이며 혼자인 듯하지만 함께하는 곳이다. 요양병원도 마찬가지다. 환자와 가족, 의료진이 만나 서로를 돌보고 치유하며 성장하는 공간이다. 때로는 회복의 디딤돌이 되고 때로는 평안한 쉼터가 되며 때로는 새로운 출발의 발판이 된다.

하지만 요양병원이라는 정거장을 둘러싼 시선은 여전히 따가웠다. ‘사회적 입원을 양산하는 곳’, ‘환자를 버리는 곳’이라는 편견 속에서 때로는 ‘말기 암 진단을 받은 요양병원’처럼 느껴질 때도 있었다. 정부의 억제 정책은 마치 세포독성항암제처럼 좋은 병원과 나쁜 병원을 구분하지 않고 전체를 위축시켰다. 그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뼈를 깎는 변화가 필요했고 의료 기능을 강화하며 새로운 길을 찾아야 했다. 15년의 여정동안 암 요양 시장의 변화와 혼란을 겪으며 결국 가장 본질적인 것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바로 의료와 돌봄이라는 hospital의 원래 의미 말이다.

오늘도 요양병원은 여전히 환자와 함께 ‘환대(hospitality)’의 정신을 실천하고 있다. 매일 아침 환자를 살피는 회진을 통해 작은 기적을 만들어가고 있다. 때로는 밤새 심폐소생술을 해야 하는 응급 상황이 찾아오고 때로는 ‘친절한 죽음’을 위한 어려운 선택 앞에 서기도 한다. 그러나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 이곳이 여전히 사람을 중심으로 존엄을 지키며 희망을 품고 운영되는 진정한 정거장이라는 사실이다. 이 정거장에서 만나는 모든 이와 함께 성장해 가고 있다는 현실 말이다.

아이유의 노래 가사처럼 ‘다음 정거장엔 네가 있을 것 같아 왠지 설레는’ 그런 기대와 희망이 살아 있는 곳, 그곳이 바로 요양병원이라는 정거장이다.

요양병원은 인생의 끝이 아니다. 새로운 만남과 위로를 기다리는 우리 모두의 정거장이다.

/지승규 passji@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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