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사일언] 반드시 ‘주인공’이어야 할까?
언제부턴가 노래방을 가는 것이 싫었다. 노래를 부르거나 듣는 게 싫은 건 아니었다. 내가 마이크를 잡으면 동석자들은 잠자코 내 노래를 듣고만 있어야 한다는 사실이 이상하게도 불편했다. 노래를 잘하든 못하든 3~4분 동안은 마이크를 쥔 사람이 주인공이며 다른 사람은 조연의 역할에 충실해야 한다.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도, 딴짓을 하고 싶어도, 마이크를 붙잡고 노래에 끼고 싶어도 참는 것이 노래방의 불문율이니까.
살면서 스스로 주인공이라고 느끼는 순간은 흔하지 않고, 노래방에서나마 주인공이 되는 것은 그래서 충분한 동기와 효용을 갖는다. 다만 지금의 나로서는 거기 작동하는 작위성과 비대칭성이 조금 싫을 뿐이다. 반드시 타자를 조연으로 만듦으로써만 주인공이 될 수 있나? 아니, 주인공이 꼭 돼야만 하나?
사람들은 소설이나 영화 같은 서사 예술을 통해서도 ‘주인공 되기’를 경험한다. 특히 소설은 ‘나’라는 마법 같은 단어를 이용해 소설 속 화자와 소설 밖 독자를 손쉽게 일치시킨다. 독자의 관점에서만 보자면, 현대소설에서 1인칭 시점이 늘어난 것은 주인공 되기에 대한 욕망이 증가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소설 속 화자에게 나를 일치시킴으로써 화자의 고통과 승화, 사랑과 성장 같은 것들을 내 것으로 만드는 것이다. 더 나아가면 소설 안에서 작동하던 힘이 소설 밖의 나를 경유하여 현실에서도 발휘될 수 있을 것 같다. 어쩌면 그것이야말로 예술의 효용일지도.
하지만 소설이 꼭 그렇게 기능해야만 하는 걸까. 예술이 효용을 잃고 개인이 주인공의 지위를 잃어버리면 그 존재는 무의미해지는 것일까. 움켜쥐려던 것들을 잃어버렸을 때, 그러고도 남는 것은 무엇일지 생각해본다. 쉽게 호명되지 않는 그 잔여물들이 내게는 조금 안쓰러우면서 조금 더 애착이 간다.
그럼에도 1인칭 소설을 읽고 쓰는 것은 역시나 즐겁다. 노래방에서 내가 선곡한 노래의 전주가 나오면 나는 예전처럼 마이크를 넘겨받을 테다. 다만 전주가 끝나기 전에 동석자들에게 한마디 건넬지도 모르겠다. 같이 부를 사람?
/김선준·2026 조선일보 신춘문예 소설 당선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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