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나날을 보내는 마음 [김은형의 너도 늙는다]

김은형 기자 2026. 4. 1. 18: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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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가 사카모토 류이치가 세상을 떠나기까지 매일 썼던 일기장으로, 영화 ‘류이치 사카모토: 다이어리’의 한 장면. 영화사 진진 제공

김은형 | 문화데스크

뛰어난 신경의학자이자 재치 있는 글쟁이로 빛나는 책들을 세상에 내놓은 올리버 색스(1933~2015)는 말기 암 판정을 받은 뒤에도 글쓰기를 멈추지 않았다. 특히 2014년 말 시한부 선고를 받고 이듬해 8월 세상을 떠날 때까지 뉴욕타임스에 기고해 좋은 반응을 얻었던 글 4편은 ‘고맙습니다’(Gratitude)라는 제목의 얇은 책으로도 묶여 나왔다.

세상과 작별을 고하는 글들은 여전히 유려하고 다정하고 품위 있었다. 그런데 나는 좀 허전했다. 늘 궁금해하던 게 빠져 있었던 탓이다. 나는 “이제 길어야 몇개월 남지 않았습니다”라는 시한부 선고를 들을 때의 심정이 늘 궁금했다. 악취미 같지만 결국 나도 언젠가 들을 이야기인데 이 순간 내가 얼마나 의연할 수 있을지 자신이 없기 때문이다. 클리셰와 같은 이 대사는 드라마나 영화에서 흔해 빠졌지만 그 순간의 마음에 대해서 상세히 기술된 글들은 의외로 많지 않다. 색스처럼 ‘나’를 주어로 다가오는 죽음에 대해 쓴 의사들의 글은 대체로 이 부분에 대해서 간략하고 담담한데 많은 죽음들로 예습을 한 터라 그런가 싶다. 의사의 말에 “아 그렇군요, 아쉽지만 남은 6개월을 6년처럼 알차게 살아봐야겠습니다”라고 다짐하며 착착 버킷리스트 도장 깨기를 하면 좋겠지만 어디 인생이 그런 것인가. 게다가 현대의학은 우리에게 늘 다른 선택지를 제공한다. 의미 없는 연명치료를 줄여야 한다는 데 동의한다고 해서 삶을 연장하고 싶은 마음이 하찮아지는 건 아니다.

2023년 세상을 떠난 음악가 사카모토 류이치의 마지막 날들을 상세하고 솔직하게 기록한 다큐멘터리 ‘류이치 사카모토: 다이어리’를 보면 이와 관련한 고뇌가 담겨있다. 9년 전 인두암이 발병했지만 치료를 받고 활발하게 창작활동을 하던 2020년 말 그는 두통 때문에 간 검진에서 머리가 아니라 간에 퍼진 4기 암, 남은 시간 6개월이라는 선고를 받는다. 이게 현실인지도 믿기지 않는 상황에서 그는 일기장에 쓴다. 치료 없이 주어진 시간을 살까, 부작용을 견디며 5년을 살까, 치료를 받다가 견디기 힘들어지면 그만둘까, 지금 안락사를 선택할까. 그리고 또 하나의 질문을 던진다. 더 하고 싶은 일은 없는가. 아무에게도 전하지 않고 홀로 고민하던 사카모토로부터 며칠 뒤 담당 의사는 전화를 받는다. “10년은 더 음악을 만들고 싶다고 힘 있게 말씀하셨어요.”

알려졌다시피 그는 10년 더 음악을 만들지 못했다. 그렇다고 2년여를 병마와 싸우기만 했느냐 그건 아니다. ‘오퍼스’라는 영화 제목으로 세상에 남은 아름다운 리사이틀 공연을 했고, 이우환 화가가 그를 위해 표지를 그려준 앨범 ‘12’를 완성해 여러 음악 매체로부터 찬사를 받았다. ‘나는 앞으로 몇번의 보름달을 볼 수 있을까’라는 제목으로 잡지에 에세이를 연재했고 동일본 대지진 피해지역 아이들을 모아 만든 도호쿠 유스 오케스트라 지도를 계속했다. 병 따위는 잊어버린 예술가의 가공할 에너지처럼 느껴지지만 그 와중에 투병의 고통, 치료 중단에 대한 내적 갈등, 고통을 잊기 위한 일상의 노력 등이 화면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연재 에세이와 같은 제목으로 나온 유고집을 보면 세상을 떠나기 불과 두달 전 지인의 소개로 면역치료를 시작하면서 “다시 살 수 있다고 생각하니 흥분으로 눈이 말똥말똥해져서 밤새도록 잠들 수 없었다”고 일기에 썼다. 생의 종점이 임박한 상황에서 가느다란 희망의 끈을 놓지 않은 거장의 인간적인 모습이 마음을 후벼 팠다.

나는 담대하게 죽음을 받아들이고 기품 있게 삶을 정리했던 올리버 색스보다는 삶에 대한 애착과 원하는 걸 이루고자 하는 욕망, 냉정한 현실을 받아들이려는 노력 사이에서 번민했던 사카모토 류이치의 마지막 날들을 보면서 용기를 얻었다. 죽음을 받아들이는 건 누구에게나 힘든 일이라고, 내 앞에 남겨진 게 짧은 시간뿐이더라도 빨간 약이냐 파란 약이냐를 선택하는 게 전부가 아니라고 말해주는 것 같아 위로가 됐다. 가족과 친구의 죽음을 경험하면서 인간은 결국 죽어야 하는 존재라는 걸 부정하기 힘든 나이에 들어선 이들이 모두 봤으면 하는 영화다.

dmsgud@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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