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성리학의 아버지, 수은 강항


- 일곱 살에 ‘맹자’를 외우다
일본 열도를 구성하는 4개의 주요 섬 중 가장 작은 섬이 혼슈섬 바로 밑에 있는 시코쿠(四国)다. 시코쿠(섬) 에히메현 오즈시(大洲市) 초등학생들이 사용하는 교과서 부교재에 ‘일본 성리학의 아버지’로 소개되는 한국인이 있다. 영광 출신의 강항이 그다. 성리학을 전한 강항은, 천자문과 논어를 가지고 건너가 일본 고대문화를 꽃피운 왕인을 이어, ‘제2의 왕인’으로도 불린다.
조선 중기의 문신인 강항(姜沆, 1567-1618)은 1567년(명종 22) 영광군 불갑면 금계리 유봉마을에서 강극검과 영동 김씨 사이의 5남 중 넷째 아들로 태어난다. 자는 태초(太初), 호는 수은(睡隱)이고, 본관은 진주다. 조선시대의 빼어난 문장가 강희맹의 5대손인데, 강희맹의 아들 강학손이 무오사화에 연루돼 영광으로 유배온 후 정착하면서 영광 사람이 된다. 강학손은 강항의 고조부다.
강항은 어려서부터 매우 영특했다. 다섯 살에 글을 지을 줄 알았고, 일곱 살 때에는 ‘맹자’를 외울 정도였다. 일곱 살 때 강항이 외웠다는 ‘맹자’와 관련된 재미있는 이야기가 전한다.
7살 강항이 서당가는 길에 느티나무 아래서 책 장수를 만나, 7권으로 된 ‘맹자’ 한 질을 보고 보여달라고 간청한다. 책 장수는 강항에게 “네가 이 책을 읽을 수 있으며 살 수 있겠느냐?”고 되묻는다. 강항은 스스럼없이 “읽어보고 살 만하면 사지요”라고 대답하자, 책 장수가 보는 것을 허락한다.
강항은 그 자리에서 맹자 일곱 권을 한참 동안 뒤적여 본 뒤 “잘 보았습니다”하고 돌려줬다. 책 장수가 책을 봤으니 사라고 하자, 강항은 “이미 책 내용을 다 알았으니 소용없습니다”라고 대답한다. 괘씸한 생각이 든 책 장수는 강항을 골려 줄 생각으로 “네가 정말 다 알았다면 나와 내기를 하자. 네가 맹자 한 권을 다 외우면 내가 이 책을 너에게 줄 것이고, 만일 한 곳이라도 틀리면 이 책을 사야 한다”라고 말하니, 강항은 그 자리에서 맹자 한 권을 글자 한 자 틀리지 않고 줄줄 외웠다는 것이다. 이에 책 장수는 강항이 신동임을 알고 내기에 진 것을 핑계로 책을 주려고 하자, 강항은 내용은 다 외웠으니 받지 않겠다며 거절한다. 책 장수는 강항과 한 약속을 저버릴 수 없어 느티나무 가지에 ‘맹자’ 책을 매달아 놓고 떠난다.
이 사건 이후 사람들은 느티나무는 ‘맹자수’(孟子樹)라 불렀고, 그 옆에 세운 정자를 ‘맹자정’(孟子亭)이라고 했다. 지금 맹자수와 맹자정은 없어졌고, 2011년 맹자정 자리에 강항을 기리는 ‘수은 강선생 맹자정 기적비’(睡隱 姜先生 孟子亭 紀蹟碑)가 세워진다.
신동 소리를 듣던 강항은 1588년(선조 21) 진사시에 합격하고, 임진왜란 중이던 1593년(선조 26) 광해군이 전주에 머물면서 실시한 별시 문과에 급제한다. 그리고 받은 첫 관직이 승정원 주서의 임시직인 가주서였다. 이후 성균관 박사와 전적을 거쳐, 공조와 형조의 좌랑을 지낸다. 전란 중이었지만 비교적 순탄하던 그의 운명을 송두리째 바꿔버린 것은 1597년(선조 30) 발발한 정유재란이었다.
- 왜군의 포로가 되다
1597년(선조 30), 형조좌랑 강항이 휴가차 고향 영광에 내려갔을 때 정유재란이 발발한다. 휴가를 보내던 강항에게 내려진 직책은 분호조 참판이던 이광정의 종사관이 돼 전라도에서 군량을 모아 남원에 주둔한 조선 및 명군에게 조달하는 일이었다. ‘분호조’(分戶曹)란 조선시대에 국가적인 대사가 있을 때 호조의 일을 나눠 맡아보기 위해 임시로 설치된 관청을 말한다.
군량을 모았지만 이미 왜군이 남원에 진출했고, 동년 8월16일 남원성이 함락된다. 남원성이 함락된 후 영광으로 돌아가 김상준과 함께 격문을 띄워 의병 수백 명을 모집했지만, 왜군의 위세에 눌려 곧 흩어진다.
남원성을 함락한 왜군의 폭력과 살육은 전라도 도처에서 자행된다. 강항의 고향, 영광도 예외는 아니었다. 1597년(선조 30) 9월23일자 ‘난중일기’의 “영광 칠산도 바다를 건너 저녁에 법성포로 가니, 흉악한 적들은 육지를 통해 들어와서 인가와 창고에 불을 붙였다”는 기록도 한 예다.
강항은 배에 두 형과 식솔들을 싣고 이순신 진영이 있는 서쪽으로 향했지만, 뱃사공이 서툴러 뱃길이 어긋나는 바람에 9월23일 논잠포(염산) 바다에서 왜 수군에게 사로잡히고 만다.

“용과 애생의 죽음이 너무도 애달프다. 모래사장에 밀려 물결 따라 까막까막하다가 그대로 바다 깊숙이 떠내려가고 말았다. … 용은 내가 30살에 비로 서 얻은 아이다. 이 아이를 가졌을 때 용이 물 위에 뜬 꿈을 꾸어 이름을 ‘용’(龍)이라 지었는데, 이 아이가 물에 빠져 죽으리라고 누가 생각했겠는가?”
왜군은 강항이 관리임을 확인하고 일본으로 압송한다. 가족이 포함된 강항 일행은 부산 근처의 안골포(진해)를 출발, 대마도와 규슈 서북단의 나고야, 시모노세키를 거쳐 10월15일 시코쿠 섬의 나가하마(長浜)에 도착한다.
강항 일가족을 붙잡은 사람은 명량해전 당시 일본 수군 총대장인 ‘도도 다카토라’(藤堂高虎)였다. 강항 일행은 나가하마에서 15㎞ 정도 떨어진 다카토라의 영지 오즈성(大洲城)으로 끌려간다.
강항은 1598년(선조 31) 오즈성에 억류된 9개월 동안 두 번 탈출을 감행하지만 실패했다. 이에 오즈성의 영주인 도도 다카토라는 강항을 오사카로 옮겼고, 다시 교토(京都)의 후시미성(伏見城)으로 이송시킨다.
-일본 성리학의 아버지로 불리다
수은 강항이 오늘 일본 성리학의 아버지로 불리게 된 것은 후지와라 세이카(藤原惺窩)와의 운명적인 만남 때문이었다.
후시미에서 강항이 만난 일본인 승려가 성리학에 깊은 지식을 가지고 있던 후지와라 세이카였다. 강항의 학문적 깊이에 감동한 후지와라는 그 길로 승복을 벗고 강항의 제자가 된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에도(江戶)에 새 막부를 열고 성리학을 장려하는 정책을 추진했는데, 중심인물이 후지와라 세이카와 그의 제자 하야시 라잔이었다. 후지와라는 승려였지만 일본 최고의 성리학자이기도 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그를 불러 ‘대학’ 강의를 명하자, 제자 라잔과 함께 에도시대에 성리학을 공부하고 가르치는 일을 맡게 된다.
강항은 후지와라와의 만남을 귀국 후 ‘간양록’에 기록했다.
“나는 일본의 서울(교토)에 온 뒤로부터 왜국의 실정을 알기 위해 때때로 일본인 승려를 접했다.…후지와라는 매우 총명하고 고문(古文)을 해독해 통달하지 않은 책이 없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그의 재주가 뛰어나다는 것을 듣고 왜경(교토)에 집을 지어주고 해마다 쌀 2천석을 주고자 했다. 후지와라는 그 집에 살지 않고 녹미(祿米)도 사양하고 받지 않았다.”
후지와라는 강항 등 조선에서 체포해 온 유학자들에게 사서오경의 정서(淨書)를 의뢰했고, 이에 강항 등이 정서한 사서오경을 바탕으로 후지와라가 책임자가 돼 발간한 책이 ‘사서오경왜훈’(四書五經倭訓)이다. ‘사서오경왜훈’은 이후 일본 성리학의 교과서가 됐고, 일본 성리학이 번영하는 뿌리가 된다.

- ‘간양록’을 남기다
1600년(선조 33) 4월2일, 강항과 일행 38명은 후지와라 세이카의 도움으로 교토의 후시미성을 떠나 귀국길에 오른다. 쓰시마 섬을 거쳐 부산에 도착한 것은 동년 5월19일로, 포로로 잡혀간 지 2년8개월 만이었다. 강항은 6월9일 선조에게 서계(書啓)를 올려 일본에서 보고 들은 일본 정세를 소상하게 아뢴 후, 9월 초 고향 영광으로 내려간다. 대구향교와 순천향교의 교수에 임명됐지만, 죄인이라며 부임하지 않는다.
고향에 은거하면서 윤순거 등 수많은 제자를 길러냈고, 일본에서 포로 생활을 하면서 보고들은 내용을 기록으로 남긴다. ‘간양록’(看羊錄)이 그것이다.
‘간양록’의 원래 이름은 ‘건거록’(巾車錄)이었다. ‘건거’란 천으로 가린 수레, 즉 죄인이 탄 수레를 말한다. 죽지 못하고 돌아온 죄인으로 자처해 선조가 주는 벼슬도 마다했고, 책 이름마저 죄인이 기록한 것이라 하여 ‘건거록’이라 했는데, 강항이 세상을 떠난 후 제자 윤순거가 ‘간양록’으로 바꿔 간행한다.
윤순거가 선택한 책 제목 ‘간양’은 중국 한무제 때 흉노에 사신으로 갔다 억류돼 흉노왕의 회유를 거부하고 양을 치는 노역을 하다, 19년 만에 돌아온 소무(蘇武)의 충절을 기린 말이다. 여기서 “소무가 양을 쳤다(蘇武牧羊)”는 고사가 생겼는데, 이 고사는 이민족의 회유에 굴하지 않은 충절을 이야기할 때 차용된다. 윤순거가 책 제목을 ‘건거록’에서 ‘간양록’으로 바꾼 것은 스승 강항이 일본에 나포됐지만 굴하지 않고 조선에 대한 충성을 다했음을 말하고 싶어서였을 것이다.
‘간양록’은 적국에서 임금에게 올리는 적정 보고서인 ‘적중봉소’, 일본의 지도를 그린 ‘왜국팔도육십육주도’, 일본에 남은 포로들에게 국가와 임금에 대한 충성을 잃지 말기를 권하는 글인 ‘고부인격’, 일본에서 자기 체험을 일기 형식으로 적은 ‘섭란사적’ 등으로 구성돼 있다.
‘간양록’은 16세 말부터 17세기 초에 해당하는 일본의 상세한 정보가 들어있는 오늘날의 ‘일본 현지 보고서’로, 포로 문학의 백미로 불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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