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션 재고 소각의 끝, 공급망 혁신이 답이다[기자수첩]

패션 업계에서 재고 소각은 오랜 기간 '이미지 관리'를 위한 불가피한 선택으로 통용돼 왔다. 헐값에 제품을 털어내 브랜드 희소성을 훼손하느니 일정 비용을 들여 태워 없애는 것이 더 경제적이라는 논리였다.
실제 환경부 통계에 따르면 국내 의류 폐기물 발생량은 연간 11만 톤을 상회한다. 이 중 상당수는 유통 단계에서 주인을 만나지 못한 미판매 신상품이다. 업계가 매년 소각장으로 밀어내는 재고의 시장 가치는 약 1조 원 규모로 추산된다. 그동안 기업들은 이를 '재고 자산 감액 손실'이라는 회계 처리로 매듭지으며 브랜드 로열티를 지켜왔다.
하지만 '프리미엄'을 유지해주던 이 은밀한 안전장치는 이제 수출길을 가로막는 자충수가 되고 있다. 당장 100일 뒤인 7월 19일부터 유럽연합(EU)의 '에코디자인 규정(ESPR)'이 발효되면 미판매 의류의 소각은 전면 금지된다.
문제는 단순히 물리적 폐기를 막는 데 그치지 않는다는 점이다. 생산부터 폐기까지 전 과정을 QR코드로 추적하는 '디지털 제품 여권(DPP)' 공시 의무가 뒤따른다. 투명해진 데이터 체계 안에서 재고 처리 실태가 공개되면, 글로벌 유통망 입점 제한은 물론 ESG 평가 하락에 따른 투자 압박까지 감내해야 한다. 과거에는 내부적 선택이었던 재고 관리가 이제는 생존을 좌우하는 규제의 영역으로 편입된 것이다.
그동안 주요 패션사들의 실적은 외형적으로 견실해 보였다. 소비 침체 속에서도 '역대 최대 매출'을 경신했다는 소식이 이어졌다. 그러나 장부상의 화려한 숫자 이면에는 창고 깊숙이 쌓인 채 비용 부담으로 전이되는 악성 재고가 자리하고 있었다. 소각이라는 손쉬운 회피 수단이 차단되면, 이 재고는 한순간에 기업의 숨통을 죄는 실질적 리스크로 바뀐다.
해법은 분명하다. 공급망 관리의 본질적 혁신, 즉 생산 방식의 근본적 재설계다. 그동안 소각 비용을 브랜드 가치를 지키기 위한 '방어 비용'으로 여겼다면, 이제는 그 자본을 생산 단계의 정밀도를 높이는 데 투입해야 한다.
'선(先) 생산, 후(後) 할인'으로 이어져 온 구시대적 방식에서 벗어나야 한다. 인공지능(AI) 기반의 실시간 수요 예측을 통해 초기 생산 물량을 최소화하고, 시장 반응에 따라 생산량을 조절하는 '적기 생산' 체계로의 전환이 시급하다.
재고를 바라보는 시선도 달라져야 한다. 단순히 창고에 쌓아두다 폐기하는 대신 '리세일(Resale)'이나 '업사이클링'을 브랜드의 공식 전략으로 편입해야 한다. 중고 시장을 브랜드 가치를 훼손하는 적이 아니라, 자산의 생애주기를 연장하는 또 하나의 수익 모델로 인식할 필요가 있다.
100일 남짓 남은 데드라인은 K-패션에 단순한 규제 준수를 넘어 '양적 팽창'의 시대를 끝내고 '순환형 가치 사슬'로 전환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창고에 쌓인 1조 원의 재고가 자산으로 남을지, 청산해야 할 부채로 전락할지는 '소각로의 불을 끄고 시스템 혁신에 투자할 결단력이 있는가'에 달려있다.
매연 뒤에 숨어 유지돼 온 '장부상의 승리'는 이제 시한부다.
양미정 기자 certain@newswa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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