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평] 읽히지 않는 계약서의 사회

2026. 4. 1. 07: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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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알 같은 글씨로 빼곡히 적힌 가입 약관
기계적 동의 절차, 진정한 합의인지 의문
서명은 찰나지만 결과는 삶 크게 흔들어
김보희 법무법인 윈 변호사

고백하건대, 변호사인 나도 계약서를 잘 읽지 않을 때가 많다. 사소한 물건 하나를 구입하려고 해도 깨알 같은 글씨로 빼곡히 적힌 서비스 가입 약관이 먼저 제시되곤 하지만, 기계적으로 동의 버튼 위치를 찾아 누르고 다음 화면으로 넘어가기 급할 뿐이다. 휴대전화를 새로 구입할 때, 정수기 대여 약정을 갱신할 때, 버스표라도 예매할 때. 삶은 끊임없는 소비행위로 영위되고 그사이에는 어김없이 어떤 약정이라든가 약관, 혹 계약 등 제목만 달리하는 서류들이 따라붙는다.

어느새 이것은 마치 익숙한 도시의 소음과 같아졌다. 비슷한 소음에 오래 노출되면 그 소리는 특별히 의식하려고 애쓰지 않는 이상 잘 들리지 않게 된다고 한다. 계약문건에 서명을 하는 일도 그렇다. 처음부터 기계적으로 반응하지는 않았다. 무언가에 서명하기 전에 꼼꼼히 읽어본 적도 있었고, 이를 무척 성가시게 느끼던 시절도 있었건만, 쇄도하는 동의 요구의 물결 속에서 어느새 기계적인 관성이 생겨나고, 곧 익숙해져 더 이상 불편함이나 성가심조차 느끼지 않게 되었다.

어째서 이렇게 되었을까. 돌아보면 비단 계약서만의 문제는 아니다. 현대의 삶은 수많은 시스템 위에 얹혀 있고, 우리는 그 시스템들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한 채로 참여할 수밖에 없다. 날마다 새로이 쏟아져 나오는 새로운 기술과 제도들을 온전히 이해한 후에만 이에 참여할 수 있다고 말한다면, 현대인이 발을 붙이고 서 있을 수 있는 곳은 몇 되지 않을 것이다. 결국 사람들은 개별적인 이해와 판단을 포기한 채 그저 기성 시스템에 입장하기를 택한다. 그때마다 제시되는 계약서는 합의 문건이라기보다는 시스템 진입을 위한 입장권에 가깝다. 읽어봤자 이해하기 어렵고, 이해해 봤자 협상은 허락되지 않는다. 그러니 반쯤 눈을 감은 채 서명란을 찾아 이름을 쓸 뿐이다.

이렇게 기계적으로 이루어진 동의를 진정한 동의라고 볼 수 있는지는 의문이다. 소비자는 처음부터 서명만 하면 그만인 상대방으로 설계되어 있을 뿐이다. 물론 우리 법은 이 불균형 구조를 마냥 방치하지는 않는다. 약관규제법은 사업자에게 중요한 내용을 설명할 의무를 부과하고, 고객에게 일방적으로 불리한 조항은 무효로 처리한다. 일정한 거래 분야에는 표준약관을 만들어 사용을 권장하기도 한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규제가 늘어날수록 불확실성도 커진다. 어떤 조항이 살아남고 어떤 조항이 무효가 될지는 결국 법원의 판단이 필요한 문제다. 계약당사자들은 자신들이 합의한 내용 중 어느 부분이 실제로 효력을 갖는지 확신하기 어려운 상태로 서명대에 선다. 변호사로서 일을 하다 보면, 내심의 의사와 다른 내용이 기재된 문건에 서명하는 일에 큰 저항감을 갖지 않는 사람들을 자주 접하는데, 이런 사회적 배경이 일조를 하는 것이 아닌가 한다.

그러나 이 습관이 일상적 소비 거래를 넘어서면 위험해진다. 쇼핑몰 가입 약관에 무심히 서명하던 그 습관이 수억 원 단위의 부동산 거래나 투자 약정 앞에서도 그대로 작동하기 쉽지만, 법은 냉정하다. 문서에 서명한 순간 그 내용에 진정한 의사로 동의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런 내용인 줄 몰랐다거나 자세히 살펴보지 않았다는 말은 거의 통하지 않는다. 많은 사람들이 "서명은 했지만 합의는 하지 않았다"며 변호사를 찾지만, 이미 합의한 문건의 효력을 뒤집는 것은 무척 어려운 일이다.

일상의 소비거래에서 기계적인 동의가 불가피한 현실이라고 하더라도, 모든 계약이 그런 것은 아니다. 경제적, 사회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계약에는 대부분 협상의 여지가 있다. 설령 그렇지 않더라도 그 계약을 체결할지 여부를 선택할 권리만큼은 남아 있다. 그러므로 지금 내가 서명하려는 계약이 기계적으로 처리해도 될 것인지, 아니면 눈을 뜨고 임해야 할지 스스로 판단할 수 있어야 한다. 때로는 읽고, 이해하고, 납득되지 않으면 물어야 한다. 서명은 찰나지만, 그 결과는 삶을 크게 흔들 수도 있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김보희 법무법인 윈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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