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도 모른 채 400개 악보 더미서 발견한 보물… 진은숙 曲이었죠”

김성현 기자 2026. 4. 1. 00: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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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영음악제 상주작곡가 조지 벤저민

“현존하는 가장 중요한 작곡가 가운데 하나.”

통영국제음악제 예술감독인 작곡가 진은숙(65)은 올해 이 음악제 상주 작곡가로 처음 내한한 영국 작곡가 조지 벤저민(66)을 이렇게 소개했다. 지난 28일 오전 독일 현대음악 전문 단체 ‘앙상블 모데른’이 그의 관현악과 실내 오페라 등 두 편을 연주한 직후에 열린 관객과의 대화 시간이었다. 충분히 그럴 만했다.

작곡가 조지 벤저민(왼쪽부터)·진은숙·조윤제씨가 지난 29일 통영국제음악제에서 인사하고 있다. 이날 독일 현대음악 전문 단체 앙상블 모데른이 이들의 곡을 연주했다. /통영국제음악재단

벤저민은 아홉 살부터 작곡을 시작했고 열일곱 살에는 프랑스 파리로 건너가 현대음악 거장 올리비에 메시앙(1908~1992)을 사사했다. 케임브리지대 재학 시절인 불과 스무 살 때 영국 명문 음악제인 ‘BBC 프롬스(Proms)’ 사상 최연소로 관현악곡을 발표하면서 ‘작곡 신동’으로 일약 주목받았다. 벤저민은 “어릴 적부터 바그너와 드뷔시,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와 알반 베르크의 오페라를 사랑해서 필사적으로 작곡에 매달렸던 것 같다”며 웃었다.

이날 한국 초연한 실내 오페라 ‘작은 언덕으로(Into the little hill)’는 독일 전통 설화 ‘피리 부는 사나이’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작품이다. 오페라는 “(쥐들을) 죽여라, 그럼 우리의 표를 얻을 것”이라는 대사가 보여주듯이 외국 이민자와 소수자 같은 현재적 문제들을 결합시켜서 강렬한 효과를 자아냈다. 벤저민은 “마법 같은 음악의 힘은 물론, 정치인들의 거짓말이 일으키는 비극성에도 매료되어 작품을 쓰기 시작했다”고 밝혔다.

그는 작곡과 지휘는 물론, 피아노와 후학 양성까지 ‘1인 4역’의 만능 음악인. 하지만 모든 신동이 거장으로 성장하는 건 아니다. 관객과의 대화 직후 인터뷰에서 “1980년대 후반 나만의 음악 언어를 찾기 위해 고심하다가 작품 숫자가 줄어드는 창작력의 위기를 겪었다”고 했다. 답답한 마음에 스승 메시앙을 찾아갔더니 잊기 힘든 조언을 들려줬다. ‘네가 작품을 쓰지 못하고 고민하는 동안 오히려 성장하게 되니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말이었다. 그는 ”상상력은 매주 찾아오는 선물이 아니라는 걸 깨달으면서 조금씩 걱정에서 벗어났다”고 했다.

작곡가 진은숙과의 인연도 적지 않다. 벤저민이 2001년 쇤베르크상의 초대 수상자가 되고 4년 뒤 진은숙이 같은 상을 받았다. 지휘자 카라얀·번스타인 등이 받아서 ‘클래식의 노벨상’으로 불리는 지멘스 음악상 역시 2023년 벤저민과 2024년 진은숙이 잇따라 받았다. 이날 인터뷰에서 그는 34년 전의 일화도 공개했다. 벤저민은 1992년 파리에서 열렸던 작곡 심사에 심사위원으로 참석한 적이 있다. 그는 “당시에는 한국인인지, 여성 작곡가인지도 몰랐지만 이름을 가린 채 출품한 300~400여 곡의 악보 가운데 발견한 최고 작품을 쓴 작곡가가 바로 진은숙이었다”고 회고했다.

당시 다른 심사위원들의 이견으로 최우수상은 불발됐다. 하지만 벤저민은 잊지 않고 있다가 진은숙의 곡을 출판사에 추천했고 이듬해에는 직접 지휘했다. 영국 언론들의 호평을 받으면서 진은숙의 이름을 전 세계에 알렸던 출세작인 ‘말의 유희’였다. 벤저민은 “예술가는 자신의 신념에 끝까지 책임을 져야 하는 존재들이다. 때로는 그 확신이 틀릴 수도 있겠지만…”이라고 했다.

그 뒤에도 벤저민은 진은숙의 작품을 꾸준하게 지휘했고 올해도 진은숙의 피아노 협주곡을 지휘할 예정이다. 벤저민은 “작품에서 발견할 수 있는 지성과 감수성, 유머와 극적인 성격까지 진은숙의 작품에서는 독창성이 빛난다”고 했다. 34년 음악적 우정이 녹아 있어서 예사롭지 않게 들렸다. 4월 5일까지 계속되는 올해 통영국제음악제에서는 벤저민의 오페라·협주곡 등 5곡을 연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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