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고 있는 세상은 언제나 개벽세상 [김현아의 우연한 연결]


김현아 | 작가·로드스꼴라 대표교사
바리에게 문자가 왔다. 어딘, 오늘 수업에서 이길보라 작가님 글 보면서 학생들에게 어딘 얘기도 좀 했어요. 학생들이 몇명 어딘 알던데요. 노벨 문학상 예측한 사람으로. 흐흐흐흐. 더불어 ‘수어로 비밀 말하기’ 전문과 학습활동 페이지를 사진 찍어 보내주었다. 바리는 나와 함께 어린이글방과 청소년글방 활동을 하는 청년으로 올해 3월 고등학교 국어 선생님으로 첫 발령을 받은 병아리 교사다. 어찌나 반갑던지 이길보라 작가 수업에도 초대하세요. 학교서도 가까운데. 오지랖을 부렸다. 바리와 나와 이길보라 작가와 이슬아 작가는 모두 정릉에 산다.
이길보라 작가의 글과 이슬아 작가의 글이 교과서에 실린다는 건 작년에 알았다. 소식을 듣고 몹시 기뻐 아아, 정말 국운이 상승하나 봐, 답장을 보냈던 기억도 난다. 돌이켜보면 나는 많은 시와 소설과 수필을 교과서에서 배웠다. 지금도 선명하게 남아 있는 글도 많다. 김동인의 ‘붉은 산’, 안톤 슈나크의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 주자청(주쯔칭)의 ‘아버지의 뒷모습’, 피천득의 ‘인연’ 같은 글들은 어찌나 강렬하던지 지금도 뚜렷이 떠오른다. 소설 속 캐릭터의 대표적 전범을 꼽아보라면 나는 ‘붉은 산’의 삵을 떠올린다. 그토록 비열하고 그토록 인간 말종인 사람에게도 순정이라는 게 한 방울쯤 고여 있으니, 그래서 사람인 것이다. 작가란 어쩌면 그 순정을 발견하는 사람일지도 모르겠다. 피천득의 ‘인연’에 대해서 고등학교 시절의 나와 친구들은 좀 냉소적으로 굴었다. 식민지 지식인이 일본 여자를 저렇게까지 좋아할 게 뭐람, 아니꼬운 마음이 일어 아사꼬를 우리말로 하면 조자(朝子)라며 까불었다. 이어지지 않은 인연에 대해 애달픔이 잘 묻어나서 더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가르치는 선생님도 배우는 우리도 자각하지 않았지만 모두 남성 작가들의 작품이었다. 남성의 시선으로 세상을 감각하고 경험하고 해석한 작품들이 대부분이었지만 교사도 학부모도 학생도 대수롭게 생각하지 않은 것이 문제라면 문제였겠다. 2026년 이상문학상 수상자들이 모두 여성이라는 점이 부각되었을 때 오히려, 비로소, 오랜 세월 남성 작가들이 문학상을 독식했구나, 감지했던 것처럼.
교과서에서 그나마 여성 작가들의 작품은 고대시가 쪽에서 만날 수 있었다. ‘공무도하가’는 고조선에 살던 여옥이라는 여자가 쓴 시라고 전한다. 맙소사, 고조선에 살던 여자가 쓴 시를 우리가 알게 되다니. 게다가 그 사연도 재밌었다. 여옥의 남편 뱃사공 곽리자고가 어느 날 새벽에 배를 손질하고 있을 때 머리가 하얀 한 미친 남자(백수광부)가 술병을 들고 강물을 건너가다 빠져 죽고 뒤쫓아온 아내가 통곡하는 장면을 보고 집에 와 얘기하니 여옥이 그 사연을 노래로 만들었다. 그 시가가 ‘공무도하가’라는 것이다. 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 님은 결국 물을 건너시네/ 물에 빠져 죽으니/ 장차 님을 어찌할꼬. 눈에 보듯 이미지가 그려졌다. 시적 상상력이 마구 발휘되는 순간이었다. 황진이의 시도 바로 외울 수 있었다. 청산리 벽계수야 수이 감을 자랑마라. 가부장적 질서가 삼엄하던 시절 유일하게 문자가 허용되던 여성들이 있었으니 기생이었다. 천민이면서 문자를 다룰 수 있었던 기묘한 신분의 몇몇 기생들은 자신들의 이야기를 시가로 남겼다. ‘조침문’ 역시 앞머리를 외웠던 작품이다. 유세차 모년 모월 모일에 미망인 모씨는 두어자 글로써 침자에게 고하노니. 4·4조의 사설은 입에 착 붙기도 해서 저절로 외워지는 글이었다. 바느질을 하던 중에 바늘이 부러져 그를 애도하는 글을 지었단다. 아니 새 바늘 쓰면 되지 왜 이런 글을 써가지고 우릴 힘들게 하냐고, 시험을 앞두고 친구들이 한탄하던 생각도 난다. 작가는 유씨 부인이라고만 되어 있을 뿐 이름은 남겨져 있지 않다.
초중고 12년 동안 시를 배우는 일도 참 좋았다. 동주, 소월, 영랑, 지용, 만해, 육사의 주옥같은 시들은 지금까지도 내 가슴에 살아 있다. 부다페스트에서의 소녀의 죽음, 분수처럼 흩어지는 푸른 종소리, 얇은 사 하이얀 고깔은 고이 접어서 나빌레라, 아버지 그 먼 나라를 알으십니까, 그토록 아름다운 모국어를, 그토록 찬란한 모국어를 교과서에서 배웠다. 모두 남성 시인이다. 내 시절에는 그랬다. 유일하게 노천명 시인의 시, 모가지가 길어서 슬픈 짐승이여, ‘사슴’ 정도가 여성 시인의 시로 수록되었다. 그러고 보니 우리들이 몹시나 좋아하는 백석의 시도 이용악의 시도 교과서에 없었다. 월북 시인들로 분류되어 그랬을 것이다. 딱히 월북이랄 것도 없는 것이 그들의 고향이 이북이니 고향으로 돌아간 것뿐인데, 엄혹하던 시절에는 그랬다. 참 옹졸한 처사였다. 요즘은 백석의 시도 고정희 시인의 시도 수록되어 있다고 알고 있다.
1980년대 초중반, 내가 고등학교를 다니던 시절, 국어 교과서에는 백여명 필진의 글이 실렸다. 고대에서부터 현대까지. 시가에서부터 논설과 희곡, 시나리오 갖가지 장르를 망라하며, 최현배 유치환 오 헨리 릴케 두보 이백, 서양에서 동양까지를 가로지르며. 그중에 여성 필자는 다섯명 정도가 전부였다. 기이한 현상을 기이하지 않게 여기던 시절이 길었다. 이슬아, 이길보라, 젊은 여성 작가의 글이 교과서에 실린다니 참으로 반갑다.
나는 요즘도 청소년들에게 말한다. 여러분, 교과서는 참 좋은 책이에요. 아주 많은 사람들이 이것만은 알았으면 좋겠다고 하는 글을 공들여 고르고 골라 편집한 책이랍니다. 교과서에 나오는 작품들만 열심히 배우고 익혀도 세상 살아가는 데 참 힘이 됩니다.
바리는 수업 시간이 참 좋다고, 재밌다고 한다. 꽃같이 어여쁜 여학생들과 이 봄날을 만끽하길 바란다. 요런 시도 읽으며.
오고 있는 역사는 언제나 개벽세상이고
와 있는 역사는 언제나 남자세상이었으니
이제 평등하지 않은 것은 종래 버림받겠지요
고정희, ‘외경읽기―손이 여덟 개인 신의 아내와 나눈 대화’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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