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뚜껑으로 엮은 아프리카…버려진 것들의 재탄생
금속 병뚜껑 망치로 펼치고 잘라
구리선으로 이어 직조하듯 연결
거대한 조각, 고향 아프리카 닮아
신작 ‘루보 1 ~ 4’ 18일까지 전시

폐기물과 자연, 과거와 현재가 교차하는 작업으로 주목받는 아프리카 현대미술의 거장 엘 아나추이의 개인전 ‘루보’(LuwVor)가 신사동 화이트큐브 서울에서 열리고 있다. ‘루보’는 가나어로 ‘영혼’이라는 의미다.
이번 전시에는 최근에 제작한 대형 설치 연작 ‘루보 1∼4’ 4점이 선보인다. 작품은 금속 병뚜껑을 펼치거나 자르고, 구리선으로 엮는 방식으로 마치 천을 짜듯 연결된다. 병뚜껑 외에도 고리나 병목을 감싸는 금속을 활용하기도 했다. 멀리서는 거대한 직물이나 태피스트리처럼 보이기도 한다. 가까이 다가가면 재료의 흔적과 질감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이번 전시 작품들은 모두 가나의 수도 아크라에 위치한 스튜디오에서 제작됐다. 전시의 하이라이트는 ‘루보 2’다. 가로 303㎝, 세로 270㎝ 크기로, 작가의 요구에 따라 전시장 한가운데 자리하고 있다. 벽에 고정시키지 않고 공중에 매달린 형태로 흔들리는 작품은 아프리카에서 불어오는 바람과도 같다. 하나의 면이 다른 면에 종속되지 않는 작가의 ‘비(非)고정적 형태’ 개념을 선명하게 드러냈다는 평가다.
작품 상단은 병뚜껑을 촘촘히 엮어 구성됐다. 한 면은 은빛 단색의 평면을 이루고, 반대편은 브랜드가 인쇄된 흑색, 갈색, 황색, 적색 등 여러 컬러가 조화롭게 어우러지며 거대한 아프리카 대륙을 연상시킨다. 하단은 병뚜껑의 고리만을 연결해 만든 구조로, 크고 작은 구멍들이 자연스럽게 드러난다. 이 구멍 사이로 반대편 풍경이 비치고 조명이 통과하면서, 작품은 하나의 물질적 덩어리를 넘어 빛과 공기가 흐르는 반투명한 직조로 확장한다.
작가가 병뚜껑 작업에 매진한 계기는 우연히 찾아왔다. 아나추이가 나이지리아에서 교수 생활을 하던 1990년대 어느 날, 길을 걷던 중 버려진 병뚜껑이 가득 담긴 자루를 우연히 발견했다. 폐기물이긴 하지만 작업의 재료로 쓸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 작업실로 가져왔다. 병뚜껑을 망치로 두드려 펼치고, 자르고 붙이는 방식을 거듭한 끝에 직물 형태의 조각이 생겨났다. 이어 붙여 탄생한 거대한 조각은 마치 고향인 아프리카를 닮은 듯 반가웠다.
엘 아나추이 스튜디오의 디렉터 루이스 네리는 “아나추이는 조각을 제작 순간에 고정된 형태의 대상으로 보지 않고 장소와 방향, 설치 조건에 따라 끊임없이 변화하는 잠정적인 상태로 이해한다”며 “이러한 접근은 작가 작업의 핵심 개념인 ‘비고정적 형태’로 이어진다”고 소개했다.

작품에는 작가의 삶이 고스란히 녹아 있다. 유럽인들이 ‘골드코스트’라고 불렀던 서아프리카 가나에서 1944년 출생한 작가는 가나 콰메 은크루마 과학기술대에서 미술 교육을 받았다. 영국 식민지 교육 체제 아래 서구 모더니즘 양식에 기반한 교육이었다. 1975년 이웃 나이지리아로 이주해 은수카 대학에서 교수로 일하며 작업을 이어왔다.
병뚜껑 작업을 본격 시작하기에 앞서 작가는 점토, 목재, 금속 등 다양한 재료를 활용한 작업을 통해 물질의 변형과 문화적 서사를 탐구해 왔다. 1970년대 제작한 테라코타 작업, 특히 ‘깨진 항아리’ 연작은 작가 작업의 중요한 전환점을 이뤘다는 평가다. 다양한 점토 파편을 거칠게 접합해 만든 이 작업은 해체와 재구성을 생산적인 조형 행위로 전환했다. 작가는 “깨뜨린다는 발상은 개혁의 기회이며 이는 파괴가 아니라 재탄생을 위한 필수 조건”이라고 자신의 작업을 규정했다.

1990년대 후반부터는 병뚜껑을 활용한 대형 설치 작업을 이어가며 국제적 명성을 얻었다. 2015년 베네치아 비엔날레에서 평생 공로 부문 황금사자상을 수상했고, 2023년 영국 런던 테이트 미술관에서 현대자동차 커미션으로 선보인 설치 작품 ‘비하인드 더 레드 문’(Behind the Red Moon)으로 호평을 받았다. 그해 미국 시사주간지 ‘타임’이 선정한 ‘가장 영향력 있는 100인’에 이름을 올리기도 했다.
전시를 기획한 화이트큐브 측은 “작가의 작품은 어떠한 상태도 영원하지 않다는 서아프리카의 오랜 철학적 통찰을 형상화한다”고 전했다. 전시는 4월 18일까지다.
최수문 선임기자 chsm@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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