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주석 첫 방한에 “대만과 수교” 엄포 놓은 북한

김상준 기자(kim.sangjun@mk.co.kr) 2026. 3. 31. 17:09
음성재생 설정 이동 통신망에서 음성 재생 시 데이터 요금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글자 수 10,000자 초과 시 일부만 음성으로 제공합니다.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1995년 외교문서 공개
러시아·중국 대외정책 변화에
북한 ‘대만인정’ 공세로 맞불도
1990년 노태우 당시 대통령과 미하일 고르바초프 소련(러시아 전신) 대통령이 오미국 샌프란시스코 페어먼트 호텔에서 정상회담을 하기 전 기념사진을 촬영하고 있다. 한국과 소련은 같은 해 수교했다. [사진=매경DB]
1995년 한국의 외교적 노력으로 북한의 우방인 러시아와 중국이 한국과 관계를 개선하자 북한은 불편한 심기를 감추지 못했다. 러시아가 한국과의 협력 확대를 위해 북한과의 군사동맹 폐기를 시사하자 북한은 러시아와 군사적 접촉을 즉각 중단했다. 중국 국가주석이 한중 수교 이후 처음으로 한국을 방문하자 북한은 대만과 수교하겠다고 으름장까지 놓았다.

외교부는 30년이 지나 비밀이 해제된 1995년 외교문서를 31일 공개했다. 분량은 2621권, 37만여쪽이다. 문서에는 냉전 종료 후 세계화가 빠르게 진행되던 시기 한반도를 둘러싼 지정학적 변화의 흐름이 생생하게 기록됐다. 한국은 새로운 국제질서가 형성되고 있음을 포착하고 북한의 우방으로 분류되던 러시아와 중국을 포섭했다.

한국과 협력 확대 위해 ‘러북 군사동맹’ 폐기 시사한 러시아, 군사접촉 즉각 중단한 북한
외교문서를 보면 1995년 당시 한국은 다음 해에 만료되는 북러 간 ‘우호 협력 및 상호 원조 조약’의 폐기를 위해 북러 사이의 틈을 벌리기 위한 작업에 돌입했다.

북한과 러시아는 1961년 김일성 주석의 소련 방문 계기에 상호 우호 조약을 체결했다. 효력 만료 1년 전까지 한 쪽이 폐기를 희망하지 않으면 5년간 자동으로 연장되는 조약의 핵심은 사실상 군사동맹으로 해석될 수 있는 ‘자동 군사개입’ 조항이었다.

공로명 당시 외무부 장관은 그해 5월 한국을 방문한 알렉산드르 파노프 러시아 외무부 차관과의 면담에서 ‘자동 군사 개입’ 조항으로 해석되는 북러 우호조약 제1조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한러관계 발전을 위해 조약의 개폐를 위한 러시아 측의 조치를 촉구했다.

러시아 측은 결국 7월에 개최된 한러 정책협의회에서 “현재의 러북관계가 과거의 이념적 관계에서 실용적 관계로 변화됐다”며 “군사 조항이 더 이상 실천 불가능한 조항임은 공개된 비밀”이라고 말했다.

이는 러시아의 노선 변경과 경제적 발전 필요성 때문으로 풀이된다. 1980년대 후반 미하일 고르바초프 소련(러시아 전신) 공산당 서기장은 더 이상 이념 중심 외교를 고수하기 어렵다고 판단하고, 자본주의 국가들과 실용적 경제협력 관계를 구축하기 시작했다. 한국과 러시아는 1990년 수교(한소수교)했고, 1994년에는 김영삼 대통령이 러시아를 방문하기도 했다.

북한은 즉각 러시아에 불만을 표했다. 북한은 8월로 예정됐던 러시아 태평양함대 함정의 원산 방문 제의를 거절했다. 러시아는 이에 대해 “(북한이) 조약의 향배를 낙관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을 감지하게 해주는 측면”이라고 해석했다.

9월, 러시아는 북한에 조약을 폐기하겠다고 통보했다. 러시아는 그러면서 새로운 내용의 조약을 체결하자고 북한에 제의했지만, 북한은 호응하지 않았다.

1995년 11월 14일 청와대에서 김영삼 당시 대통령과 장쩌민 중국 국가주석이 한-중 정상회담을 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한중수교 3년 후 중국 국가주석 방한 수순에 뿔난 북한 “대만과 수교하겠다”
북한은 한국과 중국의 밀착에도 크게 반발했다. 1995년에는 11월에 장쩌민 당시 중국 국가주석의 1992년 한중 수교 이후 첫 방한이 이뤄졌다. 1990년대 개혁·개방 정책을 밀어붙이던 중국에게 한국은 핵심적인 파트너였다.

북한의 노골적인 반감은 외교문서에 잘 나타나 있다. 장 주석의 방한이 추진되고 있던 그해 5월, 중국 외교부 산하 ‘국제문제 연구소’ 대표단은 북한을 방문해 북한 외무성 산하 ‘군축 및 평화문제연구소’와 회의했다.

중국 측은 이 자리에서 북한과 대만의 관계를 예의주시하고 있다며 북중 특수관계를 고려해 대만과 관계를 처리해야 한다고 경고했다.

북한 측은 이에 중국 측 방한 인사 명단을 일일이 언급하고는 “중국과 한국이 고위인사 교류를 하는데 북한은 왜 대만과의 관계를 발전시킬 수 없느냐”고 밝혔다. 나아가 “만일 보도된 대로 금년 11월 장 주석이 한국을 방문한다면, 대만과의 관계에서 어떠한 조치를 취할 수 밖에 없으며 대만과의 외교관계 수립까지도 검토하지 않을 수 없다”고 엄포를 놨다.

북한은 6월에 방북한 탕자쉬안 중국 외교부 부부장에게도 한중관계가 발전하고 있는 데 대해 불만을 표했다. 특히 한중 간 군사교류 문제에 대해서는 매우 민감한 반응을 보인 것으로 파악됐다.

중국도 북한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었으나 이 때에도 한국은 중국 설득에 성공했다. 중국 공산당은 북한을 자극하지 않기 위해 장 주석이 당시 일본 오사카에서 열린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회의에 참석한 이후 방한해야 한다고 권고했다.

한국은 APEC 이전이든 이후든 장 주석의 방한에 대한 북한의 불만은 마찬가지라면서 북한 눈치를 볼 필요가 없다고 했다. 결국 장 주석은 APEC 이전에 한국을 찾았다.

Copyright © 매일경제 & mk.co.kr. 무단 전재, 재배포 및 AI학습 이용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