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은의 시선] 다정한 배웅

김은숙 시인·수필가 2026. 3. 31. 16: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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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은숙 시인 수필가

며칠 사이 공기가 부드럽게 달라졌다. 봄이 어느새 자리 잡으니 동네 풍경에도 밝은 기운이 퍼졌다. 나무마다 새순이 솟아오르고, 창밖을 내다보며 곧 푸르게 변할 가지들을 상상했다. 오후 햇살에 얇은 옷으로도 충분할 만큼 따스했다. 생동하는 봄을 만끽하며 나는 공항으로 향하는 길에 올랐다. 연둣빛을 띠기 시작한 가로수, 멀리 언덕진 산마저 포근하게 보였다.

집을 나설 땐 모든 게 여유롭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때가 봄이라는 걸 잠깐 잊었나 보다. 도로엔 차가 부쩍 많아지더니 급기야 정체가 이어졌다. 길 위의 차들은 멈춰서 세상 모든 움직임이 멎은 듯했다. 느려지는 속도와는 달리 마음만 급하게 앞섰다. 바깥 풍경을 감탄하던 나는 어느새 초조함에 휩싸였다. 안절부절못하게 된 마음이 온몸을 조여왔다.

며칠째 쉴 틈 없이 달려왔다. 귀국한 지 사흘 만에 곧 다시 떠나야 했지만, 잠깐이나마 숨 고를 틈이 있을 줄 알았다. 하지만 일정은 생각보다 촘촘했고, 출발하는 날까지도 허둥거렸다. 남편이 건넨 말이 그나마 위로가 됐다. "한 시간이면 여유로우니 두 시에 나가자." 평소 침착한 그의 말을 믿고 출발했지만, 도로 상황은 예상을 비웃듯 답답하게만 흘렀다.

운전대를 잡은 남편이 중얼거렸다. "차선이라도 바꿔볼까? 이러다 비행기 못 타는 거 아냐?" 내가 초조해진 건 말할 것도 없다. 남편은 담담했다. "바꿔도 별 소용 없을거야. 이럴 때일수록 그냥 자리를 지키는 게 나아." 나는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공항에 세 시까지 도착해야 모든 절차가 순조로울 텐데, 내비게이션에는 예상 도착시각이 벌써 3시 25분으로 찍혔다. 아무리 조바심을 내도 달라지는 게 없다는 걸 알지만, 입안이 바짝 타들어 간다. 발끝을 동동거리며 억지로 미소를 짓고, '괜찮아, 괜찮아'라고 자신을 다독였다.

기분을 바꾸고 싶어 창문을 살짝 열었다. 계절은 사람의 감정과 상관없이 자기 길을 간다. 꽃향기 실은 바람이 머리칼을 스치고, 따듯한 햇살이 차창을 두드렸다. 급한 마음을 어루만지듯 부드러운 바람이 위로처럼 다가왔다. 언덕에 핀 개나리는 길게 손짓하며 노랗게 웃었고, 진달래는 막 꽃을 틔운 채 주변을 밝히고 있었다. 그 풍경에 잠시 한숨을 쉬며 마음을 가라앉혔다.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큰 짐과 작은 가방을 챙겨 달렸다. 남편이 침착하게 카트를 챙기는 동안, 나는 다급하게 짐 부치는 곳으로 달려갔다. 겨우 도착한 순간, 직원의 한마디가 날 멈춰 세웠다. "이미 마감됐습니다." 순간 머릿속이 하얘졌다. "혹시 다른 방법은 없을까요?" 작은 목소리로 물었지만, "오늘은 어렵고 내일 다시 오셔야 해요. 상하이행은 하루 한 편뿐이에요." 냉정한 답이 돌아왔다.

떨리는 마음을 애써 다잡았다. 트렁크를 열고 노트북을 꺼내 가벼운 가방만 챙겼다. "일단 비행기부터 타야 해." 남편에게 남은 짐을 부탁하며 손을 꼭 잡았다. 에스컬레이터를 급히 타고 오르는 내내 두 손은 떨리고, 입안은 바짝 말랐다. 이마엔 식은땀이 흐르고 심장은 쿵쾅대며 온몸이 무너지는 듯했다. 탑승구에 도착하니 이미 3시 48분, 간신히 안도의 숨을 쉬었다.

기내 의자에 앉아 겨우 숨을 고르고 핸드폰을 켰다. 남편에게서 "비행기 탔으면 연락 줘요"라는 문자가 와 있었다. 그 한 줄에, 며칠간 쌓인 불안과 조급함이 조금씩 녹아내렸다. 창가로 스며드는 포근한 햇살에 거북했던 등도 슬며시 풀어졌다. 천천히 안정을 되찾으며 오래 잊고 있던 여유가 돌아왔다.

삶은 이렇게 예측할 수 없게 흐른다. 갑작스러운 소용돌이에 휘말렸다가 다시 빠져나오기도 하고, 살다 보면 봄볕처럼 평온이 깃들기도 한다. 어느새 내 안에는 고요가 찾아왔다. 연둣빛 계절과 잔잔하게 곁을 지켜주는 남편의 다정함이 오늘은 더욱 따뜻하게 다가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