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겨진 창틀·종이 의자… 나약한 것에 ‘힘’을 불어 넣다[세계로 가는 K-조각의 미래]
(6) 고정관념을 비트는 재창조 조각가 박원주
꽃분홍색 창틀과 투명한 창문…
뒤샹의 ‘프레시 위도’ 작품 속
은밀히 숨겨진 여성코드 해체
A4로 만든 설치작품 ‘전기의자’
단단한 조각재료 고정관념 탈피
힘 없는 입체물의 새로운 확장

폐품(혹은 기성품)을 예술로 전환시키는 일은 작가만의 전유물은 아니다. 마르셀 뒤샹이 그랬고, 그를 따르는 많은 예술가들이 ‘레디메이드(Ready-made)’ 따위의 형식으로 (기존)사물에 다른 생기를 불어넣었다. 미술은 이러한 일을 가능하게 했던 마법이었고, 이 맥락에서 미술가들은 마법사였다. 그들은 자신들의 연금술을 몰래 익히고 연마하여, 은밀한 장소(=작업실)에서 온갖 실험의 성공과 실패를 경험하고 그 결과물들을 내어놓았다.

◇반(反)조각
조각은 장르 특정상 물질과의 갈등과 마찰 그리고 극복을 전제한다. 무겁고 단단한 돌은 물론 다루기 쉽지 않은 무기질 재료들을 다루는 기술을 섭렵하고, 또한 이것을 넘어 작가가 의도한 형상을 자유롭게 물질에 입히는 것이 조각이 가지는 난제이자 특성이었다. 현대의 조각도 이러한 전통적인 장르적 개념에서 크게 벗어나 있지는 않다. 때론 개념예술 따위로 물질적 근거를 아주 없애버리지 않는 한 그렇다.
박원주가 손에 잡은 재료는 이 장르를 바라보는 시각을 쉽게 넓혀준다. 예를 들자면 그의 종이작업이다. 설치조각인 ‘전기의자’는 전적으로 A4용지를 사용해 만든다. 복사나 프린트용으로 쓰이는 사무용지에 대한 고정관념을 오브제라는 개념으로 이전했다. 이렇게 작가는 ‘편재적 작업(ubiquotous working)’이라고 설치의 개념을 확장시켜 놓았다. 종이의 가벼움 그리고 부서지기 쉬움은 또한 재료가 주는 다른 난제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돌이나 나무가 주는 것과는 다른 문제를 야기한다. 그리고 이 문제는 단순히 작업상의 난제가 아니라 사물에 대한 일반적인 사고에 대한 문제라는 것을 인식시키는 데에 이른다. “힘없는 입체물을 만드는 도중 구겨지거나 망가질까 봐 숨죽이고 손 떨리게 하는 예민함”은 바로 재료(물질)의 본질을 체감하게 만드는 언급이다.

◇재구성 혹은 재창조
나아가 작가는 그림을 싸던 단순한 틀을 작품의 구성요소로 끌어들였다. 액자는 부가적인 요소로서 존재했었지만, 이제는 작품의 외형을 결정하는 중요한 근거가 되었다. 마치 어떤 내부의 힘에 의해 일그러진 모습들은 조각이 지닌 역학적 관계를 보여주면서 또한 의미의 역학이 함께 작용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작가는 이전에 이 작업에 대해서 ‘펴기(Smoothing)’로 정의했다. 의미론적으로는 마치 뭉쳐져 있었던 것을 곧게 펼치는 작업처럼 들리지만, 가시화된 현상은 오히려 그 반대다. 즉 곧은 형태가 내부로 구겨지는 응축력의 상황을 연출한다. 작가의 역설은 그가 내세운 제목과 실제로 나타난 현상과의 대비된 관계 속에서 형성된다. 작가의 의도적인 역설은 예술이 지닌 본질을 실토하는 듯하다. 사물과 현상의 본질을 호도하는 예술에서 그 모순관계를 노출하는 예술로서 이미 현대미술은 자신의 역설적 성격(혹은 내재된 가역성)을 폭로하는 일을 드물지 않게 수행했었다.

◇패러디
하지만 작가의 경로는 자신을 선행했던 현대미술의 길 위에 또 다른 의미의 루트를 겹쳐서 더 복잡해졌다. 복합된 루트는 패러디 혹은 동어반복적인 방식으로 보인다. 마르셀 뒤샹의 ‘프레시 위도(Fresh Widow)’(1920)를 연상하게 만드는 작품인 ‘프레셔 위도(Fresher Widow)’가 그런 예증이다. 막막한 8개의 검은 창을 보여주는 뒤샹의 창틀은 예술에 대한 새로운 정의나 선언으로 이해되었다. 아무것도 보여주지 않는 창은 근세 이후 창문의 개념으로 이해되었던 회화의 존재성을 부정했다. 또한 창틀의 지지대에 쓰인 ‘카피라이트 로즈 셀라비(Copyright Rose Selavy·1920)’는 이 작품이 마치 다른 예술가에 의해 만들어진 것처럼 독창성(Originality)을 부정할 뿐만 아니라, 그 이름에서도 ‘에로스 세 라 비(Eros, c’est la vie)’처럼 들리게 하여, 일종의 성(性)적인 환상이 개입된 것처럼 만들어 놓았다. 또한 실수나 장난처럼 보이는 작품의 이름 또한 창(window)이 아니라 과부(widow)다. 오브제의 인격화는 문이 지닌 여성적 코드를 우의적인 방식으로 발전시킨 결과다.
박원주 작가의 대응은 꽃분홍색을 가진 구겨진 창틀이다. 그리고 작가는 뒤샹의 창문보다 더 신선한 창문이라는 사실을 제목을 통해 강조한다. 박원주의 작품은 오히려 뒤샹의 막힌 창을 열어 그의 은밀한 코드를 해체하고, 창틀과 창문을 함께 구겨서 작품 자체가 지닌 내적 역학을 보여줌으로써 뒤샹의 의미론적 폐쇄성을 상쇄시켜버린다. 그러므로 박원주의 작품은 패러디의 형식을 - 패러디야말로 뒤샹의 전매특허였다 - 뛰어넘어 등가적인 가치를 지닌 예술작품이 되게 만들었다. 이것에 상응하여 작가는 “균형 잡힌 긴장(balanced tension)”이라고 작품의 위치를 정의했다. 이와 함께 작가는 루시오 폰타나의 찢긴 캔버스를 ‘칼날 삼부작(Blade Trilogy)’으로 과거와 현재 사이 저울에 균형을 이루었다. 폰타나가 평면에 그은 칼자국은 현대회화가 추구했던 원리적 이상을 폭력적으로 해체한 것이라면, 박원주는 이것을 액자에 담아 보듬고, 또한 일그러진 조형으로 제시함으로써 특유의 감성적 접근을 보여준다. 현대미술의 거장들이 남긴 ‘위대한’ 행위(혹은 작품)에 작가의 사적 상상력을 평형으로 대치시킨 것이다.
◇사유의 균형
흔한 종이 한 장에서 무거운 의미를 구축한 ‘전기의자’와 마찬가지로 작가는 미미한 사물들 속에서 그리고 그것을 만들고 연출하는 속에서 거시적인 의미의 지층을 쌓아 올린다. 그만큼 작가의 언사는 그 관념이나 사물처럼 미시적이지만, 그 언사가 지닌 의미는 무한 확대가 가능한 것이 된다. 그리고 개념과 의미의 확대는 모순이나 가역성을 촉매로 해서 가속화될 수 있다. 작가라는 개인과 그 사적 영역에서 출발한 사유는 점차 사회적인 지평 속에서 각 부분을 차지하며 평형을 이루게 되는데, 이러한 평형에 작가는 추분과 춘분을 의미하는 라틴어인 ‘이쿼녹스(Equinox)’라는 개념을 붙였다. 일 년에 딱 두 번밖에 없는 낮과 밤의 길이가 같아지는 순간, 어쩌면 그의 조각이 완성된 상태를 보여주려는 것이 아니라 여전히 기다려지고 혹은 금방 지나간 순간에 대한 회한을 보여주려는 것이 아닐까?

균형에 대한 심리와 소망은, 세 개의 미니어처로 이루어진 ‘희망봉’에서 “확신을 종용받고 있는 의심과 의심을 종용받고 있는 확신”이라는 동시적이고 가역적인 인간의 심리로 재현되었다. ‘구름 1, 2, 3’에서도 균형의 순간, 즉 찰나적인 현상이 작품 속에서 박제되어 있는 인상을 받을 수 있다. ‘춘추분 사이’는 크롬도금을 한 머그컵에 무쇠장미가 꽂혀있는 작품이다. 작가는 이 작품을 가리켜 잠시간의 휴식(coffee-break)이라고 했다. 순간에 대한 작가의 집착과 관심은 사물이 지닌 물리적 속성의 상반성에 기대어 더욱 강조되는 형국이다. 굳어버린 순간에 대해 작가는 “세상에는 긴장(tension)만 있는 것이 아니니까요”라고 대답했다. 결국 극단적인 대치로서의 평정이 아니라 중간 어디쯤에서의 편안하고 안정된 순간, 이것이 작가가 바라던 사유의 도착지다.
김정락 미술평론가

▲ ‘약함의 힘’ 탐구 박원주(65) 작가는 성신여대 조형대학원을 졸업하고, 약함의 힘을 탐구해왔다. 주로 유리 매체에서 개념으로 작동하는 ‘구겨진 종이 한 장’을 재료로 도입해, A4 사무용지 조형물을 동시에 전개하고 있다. 작가 설정 맞춤보다는 세상 밖으로 나가 휩쓸리며 계속 작업 현장을 리셋 해온 태도는 유리, 사무용지, 금속주조, 목조 등으로 변신해 오는 근간이 되어왔다.
▲ 美·덴마크 등 아트센터와 협업 대도시 기반 작가로서, 설비와 재료가 아쉬운 중량감 있는 작업은 주로 전문 중장비 워크숍 지원을 받아서 해오고 있다. 존 마이클 콜러 아트 센터(John Michael Kohler Arts Center·미국), 바크(VAK·덴마크), 센터 포 아트 인 우드(Center for Art in Wood·미국)에서 캐스팅 등을 직접 경험하고 변주해오고 있다. 여기서 ‘약함의 힘’은 단단한 물성 오브제로 변하지만, 여전히 친근하고도 아슬아슬한 관계를 암시하는 숨겨둔 흔들림을 보여주고 있다.
▲ 한국 현대미술 대표 100인의 작가 2013년에는 필척글래스 스쿨의 서머 프로그램에 초빙 강사로 12년 만에 돌아가 볼 기회를 가졌고, 2009년 김종영미술관 ‘오늘의 작가’로 선정되었으며, 2012년 한국문화예술위원회 발간 ‘100.Art.kr: 코리아 컨템퍼러리 아트 신(Korean Contemporary Art Scene)’에 한국 현대미술을 대표하는 100인 작가 중 한 명으로 소개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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