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경8300조원` 美퇴직연금 빗장 풀린다…가상자산 편입 허용
주식·채권에 몰린 401k 운용, 비트코인·사모펀드·사모대출로 확대
손덜링 노동차관 "모든 상품 평가토록…자산 우열 안 따진 중립안"
가상자산 대규모 자금 유입 기대…은퇴자금 손실위험 비판 거세
[이데일리 이정훈 기자] 자국 근로자 9000만명 이상이 참여하고 운용자산만 12조달러(원화 약 1경8300조원)에 이르는 미국 퇴직연금(401k)이 가상자산은 물론이고 사모펀드(프라이빗 에쿼티), 프라이빗 크레딧, 부동산 등 좀 더 위험한 대체투자 자산에 넣을 수 있도록 도널드 트럼프 미국 정부가 길을 터주기로 했다.

이 규정은 현재 주식형과 채권형펀드에 들어 있는 수조달러의 자금 가운데 일부를 프라이빗 크레딧이나 비트코인 같은 더 불투명하고 위험도가 높은 자산으로 이동시키는 촉매제가 될 것으로 예상된다. 특히 이 중 프라이빗 크레딧은 대체자산 운용사들이 자금을 빌려주는 시장으로, 최근 들어 불안 조짐을 보이고 있다.
종전에 이들 투자자산이 직장 퇴직연금에서 명시적으로 금지돼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실제로 직원들이 자신의 투자 메뉴에서 이를 접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1기 트럼프 행정부는 지난 2020년 가이드라인을 통해 프라이빗 에쿼티 편입에 사실상 청신호를 보낸 바 있다. 그러나 이후 조 바이든 행정부는 이를 보다 신중한 방향으로 재해석하며 대체투자에 대해 사실상 경계하는 접근 방식을 취했다.
키스 손덜링 노동부 차관은 이날 브리핑에서 “이번 규정은 운용자들이 신중한 절차를 따르면서 잠재적인 모든 상품 제공안을 평가해야 한다는 점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며 “이 제안은 특정 자산군이 다른 투자 유형보다 더 낫거나 더 나쁘다고 말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명백히 중립적이며, 이는 법이 요구하는 바”라고 말했다.
플랜 수탁자(f fiduciaries), 즉 퇴직연금 플랜을 감독하도록 책임을 맡은 고용주나 관리자들은 ERISA로 알려진 법률을 따라야 한다. 이 법은 이들이 ‘직원들의 최선의 이익만을 위해 행동해야 하며, 신중한 투자상품을 선택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이번 규정안은 플랜 감독자들이 ‘절차 기반 세이프 하버(process-based safe harbor)’를 준수하는 한 수탁 의무를 충족한 것으로 인정하도록 허용한다. 이 절차는 성과, 수수료, 복잡성, 유동성(예를 들어 가입자의 인출 요청에 대응할 수 있는 충분한 현금이 있는지 여부) 등 6가지 요소를 기준으로 투자상품을 평가하도록 요구한다.
플랜 스폰서들과 일하는 엔데버 로(Endeavor Law)의 파트너 변호사인 보니 트라이컬은 “이 규정은 수탁자들에게 분석 의무를 면제해 주는 것이 아니다”라며 “오히려 ERISA가 항상 요구해 왔던 유형의 신중한 평가를 수행하기 위한 로드맵을 제공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 규정안은 이해관계자들이 의견을 제출할 수 있도록 60일간의 의견 수렴 절차를 거치며, 마감일은 6월 1일이다. 노동부 관계자들은 연말까지 최종 규정을 발표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고 밝혔다.
이번 조치는 앞선 정책 변화의 연장선상에 있다. 지난해 5월 노동부는 퇴직연금에 디지털자산을 편입하기 전에 수탁자들이 ‘극도의 주의(extreme care)’를 기울여야 한다고 권고했던 기존 지침을 철회했다. 트럼프 대통령의 행정명령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디지털자산을 다른 투자 옵션과 동등하게 취급할 것을 요구했다.
디지털자산업계는 이에 큰 수혜를 기대하고 있다. 401k 플랜 자금 중 극히 일부만 디지털자산으로 이동하더라도 시장에는 새로운 자금이 유입될 수 있다. 예를 들어 수만명의 근로자가 가입한 대형 플랜이 포트폴리오의 1%만 비트코인에 배정하더라도, 수백만달러가 디지털자산 펀드나 토큰으로 흘러 들어가게 된다.
이 제안에 대해 찬성하는 쪽은 대체투자를 퇴직 포트폴리오에 추가하면 수익률을 높이고 분산투자 효과도 강화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반면 비판론자들은 이들 투자자산이 지닌 추가적인 위험성과 불투명성에 초점을 맞추며, 실제 성과가 과장돼 있다고 본다.
워싱턴 D.C. 소재 메이어 브라운(Mayer Brown) 로펌의 파트너인 에린 조는 이번 규정안이 401(k) 투자 옵션에 대체투자자산을 포함하는 방식을 바꾸는 것은 아니라고 했다. 그는 “투자자들이 타깃데이트펀드(TDF) 같은 수단을 통해서만 제한적인 노출을 얻을 것”이라며 “가입자들이 어느 날 갑자기 아침에 일어나 보니 자신의 401k 플랜 투자 메뉴에 프라이빗 에쿼티 펀드, 프라이빗 크레딧 펀드, 디지털자산 같은 독립형 상품이 한꺼번에 올라와 있는 상황을 맞게 되지는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민주당 소속인 엘리자베스 워런 상원의원은 “프라이빗 크레딧 시장에 균열이 나타나고, 프라이빗 에쿼티 수익률이 16년 만의 최저 수준으로 떨어지며, 디지털자산도 계속 급락하는 상황에서 트럼프 대통령은 지금이야말로 이 모든 위험자산을 미국인들의 401k에 집어넣을 때라고 판단한 셈”이라고 비판했다. 그는 이 규정이 대형 금융회사들에는 이익을 주는 반면, 근로자들은 손실 위험에 노출될 수 있다고 경고했다.
보다 강한 규제를 지지하는 비영리 옹호단체 베터 마켓츠(Better Markets)의 최고경영자(CEO) 데니스 켈러허 역시 이번 제안을 위험한 조치라고 비판했다. 그는 “이번 세이프 하버가 만들어내는 법적 면책은 금융자문사들이 이런 독성 상품을 권유하도록 부추길 것”이라며 “결국 수천만 개의 퇴직계좌 속에서 시한폭탄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실제 프라이빗 크레딧은 본질적으로 대형 은행과 공공 자본시장 밖에 존재하는 그림자 대출시장이다. 이 시장의 업체들은 돈을 빌려주지만 전통 은행에 적용되는 규칙과 규제를 받지 않는다. 프라이빗 에쿼티 회사들은 공개 주식시장에 상장되지 않은 기업의 지분을 매입하기 때문에, 마찬가지로 공적 감시를 피하게 된다. 그 결과 일반 투자자들은 해당 투자자산의 실제 가치나 자신이 얼마나 큰 위험을 부담하는지 충분히 이해하기 어려워진다. 이들 자산은 또한 수수료가 더 높고, 대개 더 오랜 기간 자금을 묶어두어야 한다.
현재 직장 퇴직연금 플랜에서 가장 흔한 투자자산은 3조4000억달러가 들어 있는 주식형 펀드이며, 그 다음은 1조6000억달러 규모의 혼합형 펀드다. 혼합형 펀드에는 TDF 같은 인기 상품이 포함되는데, 이는 여러 주식·채권 펀드를 섞은 형태로, 가입자의 목표 은퇴 시점이 가까워질수록 자동으로 보다 보수적으로 운용된다.
그러나 세계 최대 자산운용사인 블랙록은 이미 그레이트 그레이(Great Gray)와 협력해 프라이빗 에쿼티와 프라이빗 크레딧 비중을 포함한 TDF를 제공하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다.
이정훈 (futures@edaily.co.kr)
Copyright © 이데일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외인이 ‘방패’, 국민연금은 힘못써…금융그룹 지배구조 도마 위
- "170만닉스 간다"…이란전쟁·터보퀀트 쇼크는 매수 기회
- 한동훈 "조국, 트럼프도 안하는 욕을" vs 조국 "강한 자기애, 우습다"
- “비트코인 10만달러 돌파할 것”…모건스탠리 코인 ETF 파장
- “돈가스 4000원, 순댓국 3500원”…돈 아끼는 ‘거지맵’ 등장
- '대패' 후 나서는 홍명보호 "브라질전 통해 위기 극복 실험했다"
- "XX 왜 찍어"...190cm 헤비급도 중2 담배 훈계했다가 '봉변'
- “음료 3잔 가져갔다”…알바생 ‘횡령’ 고소한 점주, 이유는
- 파월 “이란전에도 장기 인플레 기대 안정“…금리 인상 선그어
- "팔아도 남는 게 없어"…포장용기값 급등에 사장님들 '비명'